[고양이] 무늬와 인연

진리의 삼색이라고 얘기했다. 삼색 무늬 고양이를 좋아했다. 비록 지금 리카는 내 생애 최고의 고양이로 남아 있지만, 리카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 갈색 고등어 무늬라 조금 아쉬웠다. 입양 전까지, 삼색이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물론 리카와 살면서 삼색 무늬에 아쉬움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의 리카였다. 리카의 여덟 아깽이가 다양한 무늬였을 땐 경이로웠다. 어떤 무늬의 고양이와 함께 살지에 고민 같은 것 없었다. (비록 반야와 살까란 고민도 했지만 기준이 무늬는 아니었다.)

무늬가 인연일 수도 있다는 고민을 한 건 2012년 어느날이었다. 그냥 문득 깨달았다. 내게 꼬이는 고양이는 성격이나 다른 것이 아니라 무늬라는 것을. 특정 종이나 성격이 인연일 수 있다는 표현은 말이 되지만 특정 무늬가 인연이라는 표현은 말이 될까? 납득은 안 되지만 그랬다. 바람은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고양이다. 동네 길고양이도 비슷했다. 꾸준히 밥을 먹으러 온 융도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고양이다(무늬만 보면 바람과 융은 매우 닮았다). 다른 고양이도 그랬다. 지난 겨울 내내 나를 찾은 고양이는 흰색 양말을 신은 검은 고양이였고, 또 다른 고양이도 흰색이 많고 검은색이 적었다. 동네엔 노랑둥이도, 고등어무늬도 있었다. 다양한 무늬의 고양이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고양이 중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고양이만 집 앞에 밥을 먹으러 왔다. 다른 고양이가 밥을 먹으러 왔을 수도 있지만 그 중 어느 고양이도 꾸준하지 않았거나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 예외라면 시베리안허냥이인데, 허냥이는 회색이었으니 흰색과 검은색의 조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일련의 현상에 문득 깨달았다. 나와 인연이 있는 고양이는 모두 흰색과 검은색이 어울린 무늬인 걸까?
…그리고 이런 이유로 리카는 그렇게 빨리 떠난 것일까?
이 질문이 말도 안 된다는 것, 안다. 경향성은 경향성일 뿐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고양이를 들이는 이슈를 고민할 때 무늬를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아니, 행여나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고양이가 아닐 때, 삼색이나 카오스를 들였을 때 행여라도 일찍 떠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겪는다. 그것이 그 고양이의 운명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궁합이 안 맞아, 그럼에도 내가 괜한 욕심을 내서, 나로 인해 일찍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한다.
이런 식의 고민을 연장하면, 내가 바람(어릴 때 이름은 부타)과 사는 것도 무늬가 만든 인연일까 싶다. 처음엔 반야와 살까 했다. 반야는 리카와 무늬가 닮았었다. 드물게 임시 이름이 아니라 정식 이름을 붙여 준 고양이도 반야가 유일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반야는 떠나갔다(그리고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부디 그 어디에 있더라도 잘 지내기를…). 부타, 아니 새로운 정식 이름 바람이 내게 남았다.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무늬.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붙이면 또 잘 붙는다. 이런 고민이 내 몸에 맴돌면서 진지하게 고민한다. 나와 인연인 고양이는 특정 무늬인 것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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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양이 분양을 자주 하는 지인이 내게 어떤 고양이를 들이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일단은 여이(중성화수술하겠지만), 2-3개월 정도. 어떤 무늬를 좋아하는지 물었을 때, 검은색과 흰색이라고 답했다. 이 무늬가 나와 인연인 듯하다고 말하면서. 아무래도 검은색과 흰색이 어울린 아이여야지 안심이 될 듯하다.
입양과 관련해서 덧붙이면, 작년 말, 한 아이를 입양할 뻔 했다. 입양 직전까지 갔다. 입양 심사도 다 했고 만나는 날짜도 잡았다. 근데 성사가 안 되었다. 그 아이는 카오스 무늬였다. 이것 역시 무늬가 맺는 인연인 걸까? 끼워 맞추려면 뭐든 끼워 맞출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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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구금시설 인문학 프로젝트를 할 때, 나도 강의를 했는데 서두에 당시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고양이 사진을 보여줬다. 그때 한 학생이, 바람/부타의 사진을 보며 예쁘다고,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난 그때 웃고 넘겼던 것 같다. 바람과 살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 염이라도 있었는지 지금 바람과 살고 있다. 묘하다. 참 묘하다.
갑자기 떠올라서 Rica, the Cat 블로그에 갔다가… http://ricathecat.tistory.com/121 리카, 바람/부타, 반야, 눈물점, 이렇게 넷이 남아 있을 때의 얘기다. 사진을 다시 보면서, 슬프고 또 그립다. 이렇게 기록하길 참 잘했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잡담

이번 달엔 블로깅을 20개 하겠다는 일념으로 낡은 노트북을 켰는데.. 할 말이 없다.. oTL.. 아니, 쓰고 싶은 주제가 둘 있는데 시간을 좀 많이 들여야 하는 주제다. 한 시간 뒤엔 세미나를 하러 나가야 해서 지금은 쓸 수 없달까…
바람이 따뜻한 햇살의 매력을 알았으면 좋겠다. 평소 낯엔 이불 속에서 잠만 잔다. 내가 억지로 꺼내면 잠깐 나와 있다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햇살 아래서 골골 거리며 좋아했다. 햇살 아래서 잠도 안 자고 좋아하며 내게 자꾸 스팽킹을 요구햤다. 앞으로도 계속 좋아했으면…
그나저나 덕분에 세미나 준비를 제대로 못 했다. (완벽한 핑계!)
방이 너무 건조해서 물그릇과 천으로 임시가습기를 만들었는데.. 효과가 별로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이불을 들추는데 불꽃이 파바박! 그릇의 물은 약간 줄었다. 역시나 젖은 빨래를 말려야 하나? 다이소 가서 긴 끈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요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 2013 겨울 아카데미 강좌를 듣고 있다. 이번 주엔 단행본 한 권을 강독하는 세미나였고, 수강생이 발제를 했는데…
그 중 한 분의 발제가 인상적이었다. 발제를 하는 방식부터 말투가 완벽하게 대학원이란 티가 너무 나서…;;;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대학원에 입학한 후 “딱 대학원생”으로 확신할 수 있을 그런 말투로 바뀐다. 뭐랄까, 배운 사람의 포스가 난달까. 때때로 사용하는 용어가 필요 이상 영어기도 하고. 내 주변엔 잘 없는 그런 모습이기도 해서 인상적이었다.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 아예 감정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좁은 바닥에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다(안 좋아하는 사람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일부러 언급하는 편이다). 그럴 때면 글쓰기의 윤리를 떠올린다. 글쓰기의 윤리란 게 합의하기 힘든 성질이라 내 잣대를 타인에게 들이댈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의 윤리란 측면에서 실망했고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중에 한 번 정리할까?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지 계속 저녁에 일정이 있다. 계속 외출이다. 피곤하다. 방학이니 쉬고 싶은데… 그래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일. 만나면 또 즐거우니 괜찮다.
노트북을 빨리 고쳐야, 1월 중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텐데… 동동

[게이 스터디즈] 발제문: 커밍아웃, 클로짓, 이성애규범성

어제부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2013 겨울아카데미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어제 강좌는 발제가 있어서 이를 대비해서 정리한 글입니다.
Keith  Vincent, 風間孝, 河口和也 세 명이 1997년에 출판한 <게이 스터디즈>는, 무려 16년 전에 나왔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성찰이 있습니다. 정식 출판되면 좋겠지만 힘들겠죠? 제목이 <게이 스터디즈>여서 동성애 얘긴가 했는데 게이 남성을 중심으로 한 논의였습니다. 그래서 발제문을 정리할 땐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맥락으로 좀 바꿨습니다. 그렇게 독해해도 큰 무리가 없겠다 싶어서요. 아울러 뒷부분은 쓰다가 말았는데 아카 얘기는 제가 담당하지 않은 장에서 더 자세히 다뤄 생략했다지요… ;;;

*발제에 오탈자 및 비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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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수. 19:00- KSCRC 퀴어아카데미 [강좌4] 퀴어문화: 일본 <게이 스터디즈> 함께 읽기
-제2부 제3장 “클로젯의 공간과 커밍아웃의 실천” 발제 by 루인
*게이 남성 중심으로 논하는데, 그냥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맥락으로 다시 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 저자의 핵심 주장은 커밍아웃의 정치적 함의다.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를 드러내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이성애규범성, 이성애적 구조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우리들이 클로짓에서 커밍아웃할 때, 내보여지는 것은 우리들의 ‘동성애’가 아니다. 드러나는 것은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의 억압구조다. 동성애를 마치 소름끼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이 억압구조다.” 모든 사람을 당연히 이성애자로 인식하는 사회, 아무 말 없으면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침묵은 이성애자로 통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이성애자로 통하겠다는 기획이 있는가와는 상관없다. 이성애가 기본값이기에 나는 이성애자로 통한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 커밍아웃은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리고/혹은 ‘나는 바이다’, ‘나는 동성애자다’처럼 내가 누구인가만 밝히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라고 인식하는 사회 구조에 내가 적절히 포착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 즉 이 세상은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며, 비이성애-트랜스젠더를 적절히 인식할 수 없도록 하는 억압 구조가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커밍아웃의 이런 효과는 정체성이 본질적, 타고난 것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체득하고 바꿔나가는 작업임을 알려준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를 정당화하는 가장 흔한 작업은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란 발화다. 이 발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란 식의 ‘관용’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언설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겪는 사회적 억압을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개인을 탈정치적 개인, 그리하여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개인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는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란 말을 왜 해야 하는가? 원래 그렇다는데 왜? 하지만 이런 식이라고 해도, 커밍아웃은 “주체 형성 과정”이다. 즉, “클로짓에 있었던” 상황에서 “한 번 커밍아웃한다면 더 이상 같은 그가 아니다.” 커밍아웃은 나를 바꾸는 과정이다. 나만 바꾸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바꾼다. 비록 상대방이 수시로 혹은 실시간으로 나의 커밍아웃을 망각한다고 해도,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와 사람은 나의 커밍아웃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망각이란 실천을 통해 되돌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 중 하나가 “그런 사적인 부분을 끌고 나와서 소란을 일으키는가”와 같은 반응이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 범주를 드러내는 발언이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에 끌어왔다는 반응은 공사이분법을 편안하고 자연질서로 여기는 태도다. 즉, 세상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있으며 공적 영역에선 회사 업무나 사업과 같은 일을 얘기해야 하고 섹슈얼리티 이슈는 사적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태도가 예의처럼 인식된다. 이런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공공 영역에선 하면 안 되는 사적 이야기를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은폐하는 대표적 언설이다. 이런 언설은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 정체성이 공사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인식인 반면,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존재 자체로 사적인 것, 저자의 표현으로는 이들 “정체성은 모든 부분이 섹스와 동일시되는 까닭에, 정체성 전체가 이 프라이버시로 덮혀 버리는 것”과 같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존재 자체로 사적 존재다. 공적 영역에 등장하면 안 되는 것이다. 커밍아웃 자체가 이런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적 질서의 위반이다. 그러니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은 바로 이런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과 같다.
그리고 커밍아웃은 이성애가 그 자체로 클로젯 상태란 점을 밝힌다. 비이성애 실천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이성애는 사유할 필요가 없는 범주로 인식된다. 아니, 인식 조차 안 된다. 이성애는 그냥 인간 조건으로 공기와 같다. 하지만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은 이 조건을 자연질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로 만든다. 동시에 모든 이성애자를 클로젯으로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발휘한다. 아울러 이성애의 규범성, 이성애의 정상성은 비이성애-트랜스젠더의 비규범성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그러니 “이성애자의 정체성은 동성애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성애는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는다. 자신을 규범으로 만들 대항 범주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이성애와 비이성애가 대등한 짝이 아니란 뜻이다.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비이성애는 명료하게 커밍아웃하거나 표현될 때에만 존재한다. 커밍아웃하지 않는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며 “정상”으로 인식된다. 이런 점에서, 국어사전에 동성애, 양성애, 혹은 트랜스젠더는 등재되어도 이성애는 등재되지 않는다. 이성애는 “모든 언어의 배후의 뉘앙스를 조종하는, 모든 언어를 사용할 때의 대조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듯, 클로짓과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일회적 실천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화, 사회의 은폐된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이다.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두 가지 사례로 설명한다. 하나는 미시마 유키오가 동성애자라는 점이 문학평론에서 은폐되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노구치는 미시마 유키오가 동성애자였음이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언급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시마에게 동성애는 문학적 실존이었음에도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이런 발언에 저자는 공공연한 사실이 어떻게 사적일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동성애 범주가 그 개인의 모든 삶, 모든 능력, 그리하여 존재 자체를 판단하는 색안경으로 작동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의를 가정한 동성애 은폐 기능, 동성애 혐오 발화다. 그리고 “클로짓에서 커밍아웃해서 나오는 것은 …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개념을, 다시 말해 사회의 개념 그 자체를 다시 만들라고 위협”하는 것과 같다.
또 다른 유명한 사건은 ‘부중 청년의 집’ 사건이다. ‘행동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모임(아카)’는 1990년 2월, 커밍아웃을 한 후 1박 합숙을 위해 ‘부중 청년의 집’을 이용했다. 그날 밤 시설의 다른 구성원이 아카 회원을 괴롭혔다. 아카는 청년의집 소장에게 이 사건에 대응할 것을 요구했지만 “도민의 합의를 얻지 않은 동성애자의 시설이용은 앞으로 거절한다”는 답을 들었다. 아카는 동경도를 상대로 제소했고 재판과정에서 평등한 대우가 야기하는 차별이 드러났다. … 뒤에서 자세하게.
요약하면 커밍아웃이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의 주체 형성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이성애규범적 사회 구조를 드러내고 저항의 가능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