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수집할 때 마주치는 표정

인권포럼 아카이브와 역사 세션 질의응답 때, 한 분이 퀴어락 발표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말했는데 오프라인 수집과 관련해선 어떤 대응책이 있냐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질문을 주셨다. 그 외 다른 질문과 함께 무척 좋은 질문을 해줬다.

그런데 답변 과정에서 결코 하지 못 한 내용이 있다. 시간이 차고 넘쳤어도 못 했을 것이다.
부스 같은 곳에 퀴어락에 기념품 등 자료를 기증해달라고 부탁을 하러 가면, ‘이걸 팔아서 우리 단체/모임 재정을 마련할 건데 어떻게 공짜로 달라고 할 수 있니?’라는 표정이나, ‘우리가 이걸 모두 팔아서 다른 좋은 단체에 기부할 건데 어떻게 그렇게 염치없게 그냥 달라고 할 수 있냐, 그냥 돈 주고 사라’라는 표정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표정을 이해한다. 나 역시 돈이 없어 단체를 해소시킨 경험이 있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가한 140여곳의 단체 중에서 70여곳이 그런 표정을 짓는다. 나머지는 엄청 잘 챙겨주거나 그냥 무관심하거나.
그런 표정을 하루 동안 70번 넘게 마주한 이후로, 부스행사가 있는 어떤 자리에 가도 더 이상 기증 요청을 하지 않는다. 아예 부스를 둘러보지 않기도 한다.
2015년부터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여한 단체의 기념품을 기증받으려 하고 있지만 올해는 하지 말까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하지 않는 방향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어 있다.
좀 더 현실적인 다른 이유로, 올해는 아예 퀴어문화축제에 참가 자체를 안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때 가봐서 결정하겠지만.
+
참고로 좋은 단체에 기증한다고 할 때 그 단체가 비온뒤무지개재단일 때가 한 번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문재인의 나중에, 성적소수자는 연대하고 있는 집단인가.

‘문재인의 나중에’란 언설이나 인식론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이 사건과 성적소수자 운동의 법제화 운동 과정에서 의제를 선별하고 법조항에서 누군가를 나중으로 미루는 작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문재인의 나중에’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성적소수자 운동 내부의 어떤 배제, 정책제정과 법제화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제의 우선순위 선정 과정의 문제는 지워지는 것 아닌가? ‘문재인의 나중에’가 성적소수자 운동을 동질화시키는 알레고리로, 면피용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가? 마치 성적소수자 운동 자체에선 문제가 없다는 착오를 야기시키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성적소수자라는 집단은 혹은 LGBT/퀴어라는 집단은 그 자체로 연대를 하고 있을까? 그래서 타 단위(?)와 연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어떤 토론문

어느 자리에서, 발표자의 논문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시간을 넘길 듯하여 빠르게 읽으려고 작성했습니다. 랩하듯 읽으며 자잘한 오탈자나 고칠 부분을 찾았는데 다시 수정하기 귀찮아 그냥 올립니다.
===
2017.02.24. 어느 자리에서 읽은 토론문
– 루인
선생님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젠더퀴어 연구가 극히 드물고, 논문 제목으로 젠더퀴어를 표시한 경우로는 두 번째며 자신을 젠더퀴어로 설명하는 이들의 생애사 논문은 선생님의 것이 최초란 점에서 의미 있는 논문이라고 고민합니다. 논문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구와 고민을 공유하는 이 자리에서 이 논문을 발표하셨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고민하고요. 저는 선생님의 이 논문을 이런 식으로 평가하고 논할 수 있다고 믿고, 이런 평가 혹은 의의 설명을 분명하게 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논문이나 발표문을 두고 논문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의나 그 내용이 아니라 단지 특정 주제나 소재를 다뤘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무척 슬픈 일이라고 고민합니다. 잘 쓴 논문인지, 못 쓴 논문인지, 어떤 논의를 어떻게 전개했는지가 아니라 드문 주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그 논문을 혹은 그 논문의 연구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이것은 그 연구자도, 해당 연구 주제도 평생 논의를 발전 시키지 못 할 것입니다. 그저 특정 주제를 다뤘다는 평가로 끝나며 그 주제는 영원히 논의되지 못 하고 해당 주제나 해당 논문의 급진성이나 다른 사유의 가능성은 영영 은폐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평가는 어떤 연구의 장이 확장하지 못 하고 더 깊게 논하지 못 하도록 하는 언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젠더퀴어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이 논문의 의의를 평가하는 말을 앞서 한 것이, 선생님께는 결례가 될 수 있음을 무척 잘 알고 있으며, 사과의 말씀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맥락의 논문을 감히 제가 토론하기로 했는데요. 제가 토론자로 나설 자격이 되나란 고민도 했습니다. 이 자리엔 젠더퀴어 이슈로 저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깊고 넓고 복잡하게 사유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계신 분들이 한가득인데, 저 같은 쪼렙, 쪼무래기가 토론에 나서도 괜찮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저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토론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논문을 받아서 읽기 시작한 이후(참고로 저는 석사논문을 먼저 받아서 읽었고, 이 토론 역시 석사논문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한 고민은 ‘토론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좋은 토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토론이란 무엇일까? 오만하지 않으면서 관습적이지 않으면서 연구발표 자리를 사교행사로 만들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연구자의 1년 농사를 망치지 않으면서 생산적 토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적절한 형태의 토론은 무엇일까요? 토론을 어떻게 하는 것이 트랜스젠더퀴어 커뮤니티와 연구자들에게, 혹은 퀴어-젠더 연구의 장에서 더 나은 연구를 하는데 눈꼽만큼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제 토론을 들으러 오신 것도 아니고 제 토론에는 관심이 없으실테고 선생님께 직접 질문하고 듣고 싶은 말씀이 무척 많으실테니, 제가 하고 싶은 토론 주제는 137개 정도 되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로 압축하겠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부족한 저의 토론이 선생님의 연구 성과에 누가 되지 않기만 바랍니다.
선생님의 논문은 젠더퀴어의 생애사를 경청한 후 생애사의 특징을 분석하고 다른 젠더 실천의 가능성, 기존 젠더 체계의 틈새를 살피고자 합니다. 그런데 논문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고민은, 이 논문은 어느 측면에서 젠더퀴어 논문일까 궁금했습니다. 젠더퀴어의 생애사와 다양한 삶의 경험을 경청하고 쓴 이 논문은, 젠더퀴어가 겪는 어떤 경험들을 특징 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특징지어 설명하는 젠더퀴어의 경험, 예를 들어 고독, 갈등, 고립 등은 정말 젠더퀴어만의 것인가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젠더퀴어가 아니라 비트랜스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젠더퀴어가 아닌 트랜스젠더, 혹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인터뷰해도 나올 법한 내용인데, 이것을 젠더퀴어 생애사의 특징 혹은 젠더퀴어의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혹은 선생님께서 다른 어떤 범주도 아닌 젠더퀴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자 하셨다면 젠더퀴어는 LGBT/퀴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다른 많은 범주와는 다른 어떤 방식의 특징이 있다고 말하고 싶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라는 특징을 매핑하는 작업은 무척 중요합니다. 젠더퀴어는 비트랜스 레즈비언이나 게이, 바이섹슈얼과 다르고 트랜스젠더와도 다른 어떤 특징적 생애사 경험이 있고 이것이 젠더퀴어 범주나 삶의 경험을 구성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이것이 다른 LGBT/퀴어 커뮤니티와는 어떤 위치성을 확보하는지 등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죠. 혹은 젠더퀴어 역시 다른 LGBT/퀴어와 비슷한, 유사한, 혹은 동일한 경험을 한다고 판단하셨다면(젠더퀴어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퀴어의 보편적 경험이라는 무언가에 주목하고 싶으셨다면) 그 유사점 또한 매핑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젠더퀴어는 이런 경험을 하는데 그 경험은 다른 LGBT/퀴어의 경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와 같은 분석 작업이요. 이런 작업이 정확하게 진행될 때, 즉 젠더퀴어의 생애사를 통해 젠더퀴어를 LGBT/퀴어의 장이건 한국사회의 어떤 장이건, 연구자가 상정하는 어떤 장에 분명하게 매핑하는 작업이 진행될 때 비로소 그 논문은 젠더퀴어 논문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어리석고 문해력이 떨어져 잘못 읽은 탓이겠지만, 현재 논의에선 왜 젠더퀴어를 다루고자 했고 젠더퀴어의 생애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젠더퀴어의 경험이, 젠더퀴어의 생애사가 그저 인터뷰한 개인의 이야기로 나열되지 연구자가 상정하는 어떤 장에서 매핑되지 않고 있어서라고 고민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경청하는 것은 연구자의 매우 중요한 태도이지만, 경청을 통해 들은 삶을 매핑하고 의미를 설명하고 필요하다면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친구로서 경청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경청이라면, 경청은 그저 듣고 좋게 좋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이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 개입하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 듣고 싶은 점은, 젠더퀴어가 동떨어져 있는 어떤 투명하고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LGBT/퀴어나 다른 어떤 지형에 속해 있는 집단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매핑하고 싶으셨는지, 생애사를 통해 연구자가 상정하는 어떤 지형을 어떻게 비틀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인터뷰를 한 많은 분이 자신을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젠더퀴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가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되는 지점은 선생님께서도 논문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무식하게 정리하자면 트랜스젠더는 이원젠더체계와 그 규범에 맞춰 살고자 하는 존재/범주고 젠더퀴어는 젠더이분법에 부합하지 않고 그것에 저항하며 살고자 하는 존재/범주란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많은 부분 사회적 편견, 혹은 인식에 따른 것이지만 아무려나 그러합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는 이원젠더체계에 부합하며 사는 존재라는 사회적 서사나 인식, 예를 들어 mtf/트랜스여성은 초여성적이고 천상여성적 존재다라는 식의 사회적 서서나 인식을 재/생산하는 주체가 다른 많은 집단도 있지만 여기에 젠더퀴어 역시 어느 정도 공모하는 것인가란 질문이, 이 논문을 읽으며 들었습니다. 트랜스젠더는 규범적 젠더를 실천하는 존재다와 같은 식의 사회적 억압, 이원젠더체계를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실천에 젠더퀴어 역시 참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몇 가지 파생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우선, 저는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이 생각하는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의 차이란 무엇일까가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다르기에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젠더퀴어란 용어가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일까요? 선생님께서는 논문의 서론에서 트랜스젠더가 반드시 이원젠더에 부합하는 실천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정작 본문에서, 인터뷰이가 바로 이 지점과 긴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젠더퀴어라고 말할 때 그때의 트랜스젠더는 어떤 존재인지,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의 차이는 무엇인지, 인터뷰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연구자인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 궁금함과 연결되는 다음 지점은, 선생님께서는 젠더퀴어를 통해 “창의적인 젠더 실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비트랜스처럼 보이는 젠더 실천은 ‘창의적’ 혹은 ‘다른’ 젠더실천일 수 없는가란 점입니다. 이것은 트랜스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많은 집단이 트랜스는 젠더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논리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전환 수술이나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로 사는 것만으로는 ‘창의적’ 젠더 실천일 수 없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그렇다면 창의적이거나 퀴어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누가, 어떻게 설정하고 규정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새로운 규범과 장벽을 설정하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성전환수술을 통해 태어날 때 지정받지 않은 다른 젠더로 살겠다는 욕망과 실천은 창의적이지 않거나 퀴어하지 않거나 다른 젠더 양식이 아니라고 할 때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이를 테면 섹스?)을 근거하고 무엇을 재강화하는 것인가 궁금합니다.
이어서, 저는 이 대안적 정치, 다른 가능성을 사유하는 정치는 기존의 편견을 재생산하는데 공모하는 행위는 아닌가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젠더이분법에 저항하는 자신의 실천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특정 편견(트랜스젠더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다)이나 이원젠더체계를 안정화하는 언설(트랜스젠더는 천상여자, 천상남자다)을 반복 인용할 때 이 실천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면 좋을까요? 저는 무척 난감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새로운 규범성의 등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은 태만하고 사유를 중단하는 행위니까요. 저는 이것이 젠더퀴어만의 특별한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다른 정치, 대안 정치라고 주장하는 정치학이 등장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흔하고도 위험한 지점이라고 고민합니다. 기존의 이원젠더체계로 포착할 수 없거나 누락디는 삶의 다양한 양상을 정치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어떤 편견이나 억압체계를 재생산하고 공고히하는데 공모하는 지점은 없는가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부상하고 있는 젠더퀴어 정치학이 이미 무언가를 억압하고 그것에 공모한다고 믿지는 않지만, 바로 그 지점은 대안 정치, 다른 정치학을 주장하는 입장에선 첨예하게 고민할 지점이란 점에서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저의 고민은 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은 인터뷰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이고 치명적인 지점입니다. 앞서 말했듯, 연구자는 연구참여자의 언설을 경청하며 그 언설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연구자의 책임 윤리와 관련한 부분입니다. 연구자가 연구참여자의 언설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그 발언을 비판적으로 적극 개입해서 해석하고 분석하지 않는다면 초점은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참여자에게 맞춰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 인터뷰이 너무 이상한데?’라는 반응을 야기한다는 뜻입니다. 연구자가 연구를 진행하고 글을 씀에 있어 비판적 해석 작업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는 연구와 관련한 모든 상황에 무관한 투명한 주체, 신과 같은 재판관이 되고 인터뷰이만 이상한 발언을 한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연구를 행한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참여자가 연구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죠. 종종 인터뷰를 통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보면, “인터뷰이에게 이 논문을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비판적으로 분석을 못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 반응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 *** **** ***? 둘째, 이 연구와 관련한 경력은 내가 취하겠지만 이 연구와 관련한 책임, 비난, 비판은 연구참여자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인가? 인터뷰이의 발언을 매핑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 태도는 자신의 연구에 연구자 본인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태도라고 고민합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고민하는 연구자의 윤리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달리 고민하실테고 이 지점을 어떻게 고민하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