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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세요?
지렁이 역사나 트랜스젠더 운동에 관심이 있으신 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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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파일의 내용을 텍스트로 적어야 하는 것이 좋으나… 두 번째 키워드 때문에 쓰지 않기로 함. 두 번째 키워드의 기관에선 자신을 언급한 글을 자동 집계한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물론 다른 국가기관도 같은 일을 하겠지만요..

메모: 트랜스젠더, 장애, 인터섹스

01

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접점을 모색한다.
젠더는 인간을 인식하는 장치인 동시에 의료 진단 범주다. 젠더는 의학의 진단 범주로 등장했고, 병리현상 혹은 이상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처음 쓰였다. 즉,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란 범주가 필요했다. 타고났다고 여기는 몸과 일치하지 않는 자기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내적 자기 인식을 명명하기 위해 젠더를 사용했다. 그래서 젠더는 언제나 의료병리화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일으키는 ‘트러블’은 사회적 인식 뿐만 아니라 몸의 형태를 포괄한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남성인가와 같은 질문은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가르는 기준 자체를 흔든다. 하리수 씨가 여성이라면 여성의 몸을 이루는 ‘생물학적 공통 경험’은 무엇일까? 하리수 씨가 여성이 아니라 여전히 남성이라면 하리수 씨가 재현하는 여성성(혹은 어떤 다른 방식의 성성)의 물적 토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트랜스젠더는 그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몸과 젠더의 관계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변호사인 스페이드는 젠더의 의료화를 비판하면서,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을 법적으로 풀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미국장애인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장애인법에서 정의하는 장애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선 불가능한 전략이다.
이 전략으로 승소한 스페이드는 장애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한 가지 제시한다. 그것은 단 한 가지의 몸과 정신만을 규범으로 특권화하고 그 외의 몸과 정신은 모두 배제하는 인위적 조건을 ‘위반’한다는 점이다.
02
드레거는 몸을 규범화하는 장치 중 하나인 인터섹스의 수술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섹스가 태어나면 의학은 이 태아를 여성 아니면 남성에 적합한 몸이 되도록 수술한다. 이 수술은 현재 의학의 표준 처방이다. 드레거에 따르면 의사들은 인터섹스나 그 부모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때때로 엉뚱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본인이나 자식이 인터섹스란 얘기를 들으면 본인이나 부모는 그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고 혼란만 느낄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사들/의학계의 믿음이다. 많은 인터섹스 당사자와 지지자는 이를 비판한다. 이를 테면 암에 걸린 사람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환자는 혼란을 겪을 테니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의사가 수술을 한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의료 윤리의 문제인데도 인터섹스에겐 기본적 의료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드레거는 비판한다.
인터섹스 관련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의사가 얘기하는 혼란(당사자나 부모, 가족이 겪을 것으로 예상하는 혼란)이 사실은 의사 자신의 것이란 의심이 든다. 인터섹스란 존재 자체가 의사에겐 혼란스러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인터섹스 조건은 당사자의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사자의 문화를 위협한다.”(30)는 케슬러와 드레거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규범적 몸을 만들려는 기획이 인터섹스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수술을 최상의 처방으로 만든다.
03
이것은 며칠 후에 있을 강의를 위한 메모. 더 자세한 것은 강의 때. 🙂
주제는 ‘의료기술과 비규범적 몸’이며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장애, 그리고 의료기술의 관계를 모색할 예정이나 실패할 가능성이 97.5%라 남은 2.5%에 희망을 걸어야 함… ㅠㅠ

재개발 반대 시위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시위대라고 해봐야 열댓 명 정도였다. 다들 60대 이상으로 보였다. 나이든 이들이 영상물을 틀어 놓고 촛불을 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풍경.

내가 사는 곳은 재개발을 해야 할 법한 분위기지만 재개발을 하기엔 참 난감한 곳이다. 도로정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라 좁은 골목이 많다. 동네에 있는 차도엔 자동차 두 대가 함께 지나갈 수도 없다. 이 동네에 처음 온 택배기사는 길을 잃기 쉽고 집을 못 찾아 엉뚱한 곳으로 갈 때도 많다. 건물도 참 오래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지난 장마 때 현관문 바깥의 천장이 일부 무너지기도 했다. 그런데 재개발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부자는 아니다. 뭐, 일부는 부자일 거다. 하지만 쪽방처럼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상황은 다르리라. 보상금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어렵고 여러 고민이 많으리라. 그냥 이대로 두는 것이 더 좋으리라. 재개발한다고 해서 일시 이주했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난… 한 2~3년 정도는 더 버텨주길 바라고 있다. 난 재개발을 찬성하는 사람과도,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과도 다른 입장이다. 어쨌거나 집이 있는 사람의 입장과 집이 없는 사람의 입장 차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재개발 때문에 전세값이 매우 싸게 나왔다. 얼추 일 년 정도 집을 비워뒀다가 집을 비우느니 사람 들이자는 기분으로 전세를 냈다고 했다. 그래서 전세가 싸게 나왔다. 재개발이 유보되면 전세값이 어떻게 될까?
물론 서로의 이해가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집값 자체가 너무 비싼 것이 문제고 재화가 특정 계층에 몰리는 것이 문제고… 많은 문제가 얽혀 있다.
그런데 재개발을 얼마나 남겨 뒀을 때 반대 시위가 등장할까? 난 이런 게 더 궁금하다.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하는지, 앞으로 1~2년은 더 여기서 버틸 수 있는지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문화가 얽혀 있는 이 동네가 이제는 사라질 거란 사실이 아쉽다. 안타깝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매력적인 동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