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진학, 휴식기, 유근피

01
요즘 진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으응? 진로라기보다는 진학이네요. 간단하게 말해서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반드시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지요. 요즘 학생이란 신분으로 공부하고 싶은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학생이란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공부와 학생 아닌 신분으로 공부하는 것이 좀 다르니까요. 학생 아닌 신분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좋지요. 하지만 저처럼 의지력이 약하고 누군가 강제하지 않으면 당최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인간에게, 학교와 학생이란 제도는 유용합니다. 더욱이 좀 더 체계적으로, 혹은 좀 더 규범적 형식으로 공부하고 싶은 바람이 있달까요. 제가 얼마나 무지/무식하고 제멋대로인지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기도 하고요.
학교와 학과는 대충 정한 상태입니다. 지도교수에게 말했고, 제게 도움이 될 거란 답을 줬고요. 문제는 하나 뿐이에요. 등록금… 덜덜덜. 근데 빚을 내서라도 진학을 할 계획입니다. ㅠㅠㅠ
02
휴식기입니다.
특별히 저에게 휴식 혹은 휴가를 줄 이유는 없습니다. 뭔가 열심히 한 것이 있어야 휴가를 주죠. 그럼에도 휴가를 준 이유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속편하게 읽기 위해서입니다. 세 권 합해, 1,600 쪽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휴가라는 기분 전환 없인 읽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다 읽을 때까지 휴식기. 흐.
미미 여사의 책은 정말 재밌어요. ㅠㅠ [낙원]까지 읽는 시간을 휴식기로 바꾸고 싶지만, 할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엉엉.
03
혹시 유근피를 달여 드시는 분 있나요?
오늘 우연히 유근피가 비염에 무척 좋다는 글을 읽고 검색하니, 거의 종교더라고요. 평소 비염으로 고생하는 저로선 단박에 혹했습니다. 검색하는 동안, 당장이라도 시장에 가서 유근피를 살 기세였달까요. 크크. 하지만 직접 달여야 한다는 것이 난관! 유근피를 한약 달이는 곳에 가서 대신 달여달라고 하면 욕 먹을까요? 아, 아니, 그 전에 너무 비쌀까요? 귀차니즘이냐 자금의 압박이냐 그것이 문제로고. ㅠㅠ

[기고-인권오름] [나와 당신의 거리]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눈치 챈 분도 있을 듯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글에서 어떻게든 엮으려고 애쓰는 지점은 퀴어와 장애 이슈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작년부터 둘의 연관 관계를 모색하며 짧게라도 글에서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영향은 2009년 가을부터 시작한 장애-퀴어 세미나고요. 굳이 기원을 찾아가면 트랜스젠더 이슈와 장애 이슈의 고차점을 고민하도록 한 화장실 이슈네요.
문제는 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정리한 상황이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단편적 아이디어와 고민으로 둘을 엮어내고 있죠. 그래서 내용이 너무 서툴고, 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글에서 계속 언급하려고 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안에서 충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한두 줄이라도 꾸준히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고민을 정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제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고민을 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펜과 손가락으로 한다는 것. 그래서 글을 쓰지 않을 때면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펜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앟으면, 고민도 한두 문장의 단편으로 그칩니다. 크크. ;;;
암튼. 며칠 전 인권오름에 글을 하나 실었습니다. 욕심이 과해 망했지요. 엉엉. 마감 문제만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한 글입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초 기고버전. 청탁을 받고 원고 마감일까지 보낸 첫 번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체 기획 내용을 담아서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따른 수정 버전입니다. 기획 연제의 큰 주제는 “나와 당신의 거리”입니다. 전 글에서 직접 거리나 공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거리나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죠. 하지만 이런 글은 내공이 장난이 아닌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업!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망했죠. 크크. ㅠㅠ 그래서 거리 얘기를 분명하게 담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장애 이슈와 퀴어 이슈의 교차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저의 한계입니다. 언젠간 좋아지겠죠,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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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률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포털 메인에 실린 어느 기사는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인데, 공포와 위험은 그 거리를 좁혔다. 물론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사회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몸을 향한 혐오와 차별이 떠올랐다.


02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구체적 현실이다.

광고를 게재했던 집단과 관련 있을 누군가는 한동안 동성애를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찬반으로 논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세상에서 퀴어는 사람이 아니란 뜻일까? 나는 우연히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앞을 지나간 적 있다. 판넬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으며, 약간의 분노와 실소와 어이없음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분노보다는 그저 그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가 느끼는 근거 없는 불안, 그 불안을 퀴어에게 덤터기 씌울 수 밖에 없는 그의 취약함에 그가 조금 불쌍했다.

그 사람 앞을 지나가며 나는 연민과는 또 다른 어떤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고, 또 너무 멀었다.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가란 사실을 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욕을 했을까? 아님 그저 얼어붙었을까? 내게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거리를 걸으며 나 혼자 조금 심란했다. 그가 인간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는 그 자리, 나만 혼자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1인시위자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1인시위자가 신경쓰이는 나와 1인 시위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현실을 겪고 있었다.


03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과 1인 시위 내용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장애인이나 퀴어가 존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함께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내가 1인 시위자 앞을 지나간 것처럼, 내가 간과하고 있는 이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간과해서 그저 없는 것처럼, 나와 너무 먼 것처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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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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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 같은 건 없다.
루인(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 runtoruin@gmail.com)

  지난 4월 7일,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선 난리였다.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교육청은 교장에게 휴교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이유는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한 가지, 방사능때문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지진이 나고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서 다들 방사능 ‘전문가’가 되었다. 방사능 위험을 얘기하고,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를 환기하며 불안을 가중했다. 어느 신문에선 일본을 “민폐국”으로 불렀다.

  사고 초기 가까운 거리의 일본 거주민을 걱정하던 반응은 사라졌다. 방사능의 위험만 부각되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위험만 남았다. 그 위험은 질병공포, 장애공포에서 출발했고, 질병공포와 장애공포를 촉발했다. 나의 기억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는 언제나 병과 장애인을 전시하는 방법으로 설명되었다. 암 발병율이 몇 % 증가한다고, 신생아 중 장애인이 몇 %라고 말하며 원전의 위험을 알렸다.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어떤 신문에선 “기형아 낳을까 무서워요 … 둘째 포기”란 제목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문득 오래 전 유행한 노래가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네 / 할아버지가 히로시마에 살고 계셨다네 / 내 왼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한 덩어리로 붙어있었죠 / 언제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왼손”(<새끼 손가락> 김승진 노래)

  ‘내’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땐 다 괜찮았다.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자 불안과 혐오가 터져 나왔다. 장애를 ‘비정상’과 고통으로 치환하며 규범적이고 ‘건강’한 몸에 강박적인 반응이 보편적 정서로 유통되었다. 이런 반응에 나는 나의 몸을 떠올렸다. 트랜스젠더의 몸,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의 몸, 에이즈 감염인의 몸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떠올랐다.

  몇 달 전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 걸리면 SBS가 책임져라!”는 광고가 일간지에 실려 화제였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오염’되고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질병공포는 방사능 공포와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것은 ‘망상’이라고 누군가는 구분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일까? 어떤 사람에겐 방사능 위험이 현실이겠지만, 내겐 광고가 더 구체적 현실이다. 현실이란 각자의 입장에서 구성되니, 현실과 망상이란 구분은 불가능하다.

  방사능 위험 운운하는 언설을 통해 유포하는 장애혐오, 질병혐오는 장애인을 인간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광고 구절은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에이즈 감염인을 인간 범주에서 배제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 현실이 배제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배제한 존재를 환기하며 늘 그 존재와 조우한다. 방사능 공포가 유발하는 혐오는 장애인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광고를 게재한 이들은 퀴어와 에이즈 감염인을 강박처럼 떠올리며 불안에 떤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는 자신의 규범성, 자신은 ‘정상’이라는 항변을 입증하는 근거로서 배제할 대상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배제는 그 대상이 세상에 두루 존재하도록 하며, 세상을 이루는 토대로 만든다. 불안과 배제는,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토대가 소위 말하는 ‘정상’/규범이 아니라 배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말로, 이 세상은 소위 규범적/’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배제하는 대상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규범의 불안한 토대를 타인에게 덤터기 씌운다. 이것이 지배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비규범적 존재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퀴어는 언제나 일상 생활에서 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 없다. 퀴어의 몸은 뭔가 다르고, 규범적 이성애자의 몸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강박이 퀴어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우발적 사고만이 불안을 조성하지 않는다. 사고의 결과,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또 다른 ‘건강’ 강박이 낙인을 만들고, 몸의 위계를 만든다. 문제는 퀴어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니다. 기준을 알 수 없고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건강’ 강박, ‘규범’ 강박이 문제다. 퀴어만 아니라면, 장애인만 아니라면 ‘건강’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없고 실체 없는 믿음이 문제다. 비장애인만, 규범적 이성애자만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건강과 행복에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엔 어떤 비가 내릴까? 타인을 배제하는 공포가 반영된 비가 내릴까? 하지만 ‘건강’한 몸 같은 것, ‘정상’적인 몸 같은 것,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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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폭주한 특강

오늘, 올 들어 세 번째 강의를 했다. 그리고 좀 재밌는 일이 있었다. 무려 질문이 폭주한 것. 덜덜덜.

기억이 확실하다면 2007년 즈음부터 특강을 다니기 시작했다. 첫 특강/강의는 아는 사람이 자신의 수업시간 특강을 맡겼다(오늘도 이 분의 수업 특강이었다). 수강생이 대략 150명 정도인 수업에서 처음 진행한 특강은 아직도 어떻게 했나 싶게 얼떨떨했다. 놀랍게도, 그 특강의 수강생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특강을 기점으로(응?) 나의 강의는 주구장창 망했다. 크크크. ;;; ㅠㅠㅠ 어떤 날은 너무너무너무 못 해서 한 달 가까이 즐거운 자학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크크. ㅠㅠㅠ (사실 몇몇 강의는 아직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들 지경이다.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 ㅠㅠ )
암튼 나의 이런 무능과는 별도로, 특강을 가면 대체로 질문이 없는 편이다. 물론 강의가 끝난 뒤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이 적은 거야 새롭지 않을 듯. 이제 “질문하세요.”하면 약속이나 한 듯, 다들 고개를 숙이는 모습, 익숙한 일이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크크. 그러다 누군가가 질문을 하면,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한두 명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도 많은 편이 아니라, 보통은 서너 명 정도가 질문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조용해지고, 사회자나 수업 담당 강사가 마무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세요”라고 말을 한 후 “보통 질문하세요라는 말을 하면 질문이 없더라고요”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바로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잠시 쉬는 짬도 없이 사람들이 질문을 했다. 동시에 세 명이 손을 들기도 했다. 심지어 수업시간이 끝났는데도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있나! 심지어 질문 내용도 다 괜찮았다! 수업시간이 아니라 따로 마련한 특강 자리였다면 더 오래 얘기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분위기였다.
나로선 무척 새로운 경험이라 꽤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의 강의를 들은 사람도 과연 좋았을까? 엉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