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퀴어다’의 의미 탐문

원고에 쓰려고 작성했으나 대거 날리고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인데, 그 중 날려야 하는 구절 일부… 퀴어란 용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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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란 용어가 사용된 맥락을 설명하는 방식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LGBT를 적대하는 개인이나  LGBT를 향해 “야이, 퀴어[기괴한, 이상한, 괴상한]야”라고 말했을 때 “그래, 나 퀴어다”라고 반응하며 그 의미를 재전유하면서 퀴어란 용어가 LGBT 커뮤니티에서 쓰이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실제 많은 퀴어 이론이나 퀴어 연구자가 퀴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역사적 맥락 중 하나로 채용하는 설명 방식이다. 그런데 “그래, 나 퀴어다”라는 방식의 의미 재전유는 퀴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범주 용어로 사용할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신화적 근거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런 식의 설명에서 퀴어를 정체성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퀴어 정치학을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매우 ‘잘’ 사용하는 것이다.
아울러 퀴어문화축제를 반퀴어 집단이 동성애축제로 부르는 것을 두고, LGBT/퀴어나 그 지지자 집단에선 ‘이름이나 제대로 불러라’라는 반응이 많지만, 퀴어를 동성애로 치환했던 역사는 퀴어이론 역사부터 현재의 퀴어문화축제까지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1991년 퀴어이론이란 용어가 처음 학제에서 쓰이기 시작한 이후, 퀴어 혹은 퀴어이론은 대유행처럼 널리 쓰였다. 그런데 그때 퀴어는 거의 항상 동성애를 지칭했고, 학술대회 제목이 퀴어이론일 때 부제는 게이와 레즈비언만 나열하곤 했다(Goldman 1996). 이런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퀴어 이론 논문을 묶은 독본[Reader]의 경우, 해당 독본에 실린 논문의 대부분은 게이나 레즈비언 관련이며 트랜스젠더퀴어 관련 글은 한 두 편, 바이섹슈얼 관련 글은 전혀 없는 일이 허다하다. 퀴어문화축제를 동성애축제로 부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퀴어를 동성애로 인식하는 방식 자체는 반LGBT/퀴어 집단의 무지가 아니라 LGBT/퀴어 커뮤니티나 연구 집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연구자 네트워크

나는 연구자 네트워크나 모임 같은 것이 일종의 패거리가 될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상당히 꺼리는 편이지만, 끊임없이 동성애규범성/동성애중심성으로 LGBT/퀴어 논의가 구축되거나 회자되는 것을 접할 때마다, 어떤 형태로건 연구자 네트워크 같은 걸 만들고 비슷한 의견을 모아가고, 이런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결집하는 작업이 필요하긴 한 걸까란 고민을 할 때가 있다. 무엇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퀴어 비평은 퀴어만 할 수 있는가

LGBT/퀴어 논의는 이른바 LGBT/퀴어에 해당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가? 이성애자-비트랜스는 LGBT/퀴어 비평과 연구에 참여할 수 없는가? 이것은 오랜 질문이고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른바 LGBT/퀴어 바닥이란 곳(여기가 어딘지는 애매모호하지만)에 있다보면 어쩐지 퀴어 비평은 퀴어일 때에야 비로소 자격을 얻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떤 퀴어 운동이 문제라고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퀴어가 아니라면 그 의견은 다소 무시당하고, 퀴어가 이성애규범적이고 동성애규범적 발언을 할 땐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는 어떤 분위기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럼 퀴어 비평은 퀴어인 사람이 하는 비평일까? 퀴어 비평은 퀴어라는 규정된 어떤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 이득인가? 퀴어 비평과 퀴어 연구는 퀴어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논의인가?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퀴어 연구를 젠더 및 섹슈얼리티와는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몇 편의 글을 읽고 있는데(이와 관련해선 10월 즈음에 나올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나는 이 논의에 상당히 동의한다. LGBT/퀴어를 다루거나, 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만이 퀴어 이론이나 연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분석 프레임과 큐레이팅이 필요하다. 퀴어가 정체성 범주가 아닐 때 퀴어 연구 역시 어떤 형태로건 정체성 범주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어떤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며, 이것이 퀴어 인식론이지 않을까? 뭐, 이런 식의, 이미 누군가가 다 한 고민을 뒤늦게 하고 있다.
이 다른 어떤 인식론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려나 그것이 퀴어 이론에,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과 정치학에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번 글에선 이것을 쉽게 쉽게 풀어가겠지만 어떻게 하면 전혀 다른 인식론을, 내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것을 깨달으며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을까? 쪼렙인 내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또 계속 공부하다보면 언젠가 뭔가를 찾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