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비평은 퀴어만 할 수 있는가

LGBT/퀴어 논의는 이른바 LGBT/퀴어에 해당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가? 이성애자-비트랜스는 LGBT/퀴어 비평과 연구에 참여할 수 없는가? 이것은 오랜 질문이고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른바 LGBT/퀴어 바닥이란 곳(여기가 어딘지는 애매모호하지만)에 있다보면 어쩐지 퀴어 비평은 퀴어일 때에야 비로소 자격을 얻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떤 퀴어 운동이 문제라고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퀴어가 아니라면 그 의견은 다소 무시당하고, 퀴어가 이성애규범적이고 동성애규범적 발언을 할 땐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는 어떤 분위기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럼 퀴어 비평은 퀴어인 사람이 하는 비평일까? 퀴어 비평은 퀴어라는 규정된 어떤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 이득인가? 퀴어 비평과 퀴어 연구는 퀴어 정체성을 보장해주는 논의인가?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퀴어 연구를 젠더 및 섹슈얼리티와는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몇 편의 글을 읽고 있는데(이와 관련해선 10월 즈음에 나올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나는 이 논의에 상당히 동의한다. LGBT/퀴어를 다루거나, 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만이 퀴어 이론이나 연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분석 프레임과 큐레이팅이 필요하다. 퀴어가 정체성 범주가 아닐 때 퀴어 연구 역시 어떤 형태로건 정체성 범주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어떤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며, 이것이 퀴어 인식론이지 않을까? 뭐, 이런 식의, 이미 누군가가 다 한 고민을 뒤늦게 하고 있다.
이 다른 어떤 인식론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려나 그것이 퀴어 이론에,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과 정치학에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번 글에선 이것을 쉽게 쉽게 풀어가겠지만 어떻게 하면 전혀 다른 인식론을, 내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것을 깨달으며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을까? 쪼렙인 내겐 어려운 일이겠지만, 또 계속 공부하다보면 언젠가 뭔가를 찾겠지.

순두부 먹으러 강릉가기

저는 오는 12일 월요일에 강릉으로 순두부 먹으러 갑니다. 호호호. 추석 전, 월요일 저녁으로 맛난 두부를 먹으러 강릉가는 나란 인간. 호호호. 파티원 모집해봐야 없을 거 아니까 혼자 맛나게 냠냠해야지. 호호호.

취약점과 불안

나는 나의 취약점, 불안, 두려움 등을 사랑하는데 이런 감정은 내가 어떤 다른 상상력을 하도록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언제나 갈등하고 렉사프로를 처방받아서 사왔지만 선뜻 복용하겠다고 결정을 못 한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나를 힘들게 하는 힘이기도 할 때, 늘 어렵다. 그런데 나는 늘 이런 딜레마가 아니지만 딜레마로 인식되기도 하는 상황에 처할 때가 많다. 나의 덕질이 그렇고 다른 많은 것이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이런 상황을 딜레마로 인식하지 않지만, 글로 쓰거나 할 때면 딜레마처럼 적혀서 난감하다.

그러나저러나 일단 주말 마감부터 어떻게 하자… 아아아…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