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승을 부리는 찜통더위 덕분에 옥탑방은 사우나가 따로 없다. 밤에 잠을 못 자고 계속 깬다. 덕분에 지금 아무 것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앞에 두고 동동거리면서도 미루는 행동. 무기력하고 무력하다.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피곤하다. 몇 시간이 지나면 헛되이 보낸 시간을 자학할 게 분명한데도 지금은 멍청한 표정이다. 아, 피곤해.
연애: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이렇게 부를 수 없는
01
ㅅ은 대학에 입학하고 두어 달 정도 지나, 동아리 선배 ㅁ과 사귀기 시작했다. 이 둘은 아마도 ㅅ이 졸업할 때까지는 연애관계를 유지한 듯하다. 같은 동아리에 ㅁ의 동기인 ㄴ은 ㅅ을 처음 본 순간 반했지만 고백이 늦었다. 망설이고 있을 때 ㅅ과 ㅁ이 사귀기 시작했고, 이후 ㄴ은 속만 태웠다. ㄴ이 ㅅ을 좋아한다는 건 ㅅ과 ㅁ을 포함한 동아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ㅅ과 ㅁ이 헤어질 것 같진 않았다. ㄴ 역시 드러내놓고 ㅅ에게 감정 표현을 하진 않았다.
나는 그 동아리에 잠깐 속했다가 탈퇴했기에 이후의 자세한 소식은 모른다. 그저 몇 해 전, ㅅ이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아는 사람에게 전해들었다. 상대는 ㄴ이라고 했다.
02
ㅇ과 ㅂ은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 둘이 사귀지는 않았다. 이런 건 웹에서도, 오프라인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데, a도 b도 c도 연애를 하고 싶다며 커플들을 부러워하지만, 부러움을 표현하는 이들 각자가 만나고 연애를 하진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이 풍경. 서로 연애를 하고 싶다는 푸념만 반복할 뿐이다.
다시 ㅇ과 ㅂ의 경우. 주민등록번호의 성별이 같은 ㅇ과 ㅂ에게 ㅊ은 서로 사귀면 어떻겠냐고 말했는데, 이 말과 동시에 둘은 “나는 동성애자가 아냐!”라고 답했다. 하지만 ‘동성’이 사귄다고 동성애인 건 아니잖아. ㅊ은 ㅇ과 ㅂ의 반응이 무척 흥미로웠다고, 내게 말해줬다.
나의 경우를 상상하자. 연애를 안 하고 있지만, 하고 있다고 치고. 나의 파트너가 레즈비언이라면, 바이라면, 이성애자라면 각각의 상황은 어떻게 다른 걸까? 이 모든 관계가 피상적으론 이성애관계로 보일까?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선 동성애일까? 레즈비언이 레즈비언과 연애를 한다고 반드시 그 관계가 동성애/동성“연애”일까? 레즈비언과 바이의 연애는 동성애일까, 양성애일까?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의 연애는 동성애일까, 양성애일까, 이성애일까? 아니, 다 필요없고 그냥 변태성애일까? 흐흐.
다른 한편, 나의 성적지향과 상대의 성적지향은 반드시 일치해야 할까?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의 연애를 상상할 때, 이성애 ‘여성’은 이 관계를 이성연애관계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성애 ‘여성’의 파트너가 레즈비언 트랜스며 ‘여성’보단 ‘남성’으로 더 잘 통하는 외모라면. 파트너가 여성으로 더 잘 통하는 외모라도 상관 없다. 만나는 둘(혹은 그 이상의) 사람 각자가 자신의 상황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지만,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은 무시된다. 한 사람이 동성애자라면 상대로 동성애자, 한 사람이 이성애자라면 상대도 이성애자란 식이다. 개인의 외모로 젠더를 단정하는 것과 꼭 같다.
이런 고민은 일상 생활에선 크게 문제될 것 없지만, 그냥 개개인이 만나는 순간엔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해명’해야 하는 순간 심각한 문제가 된다. 동성애자는 동성애자끼리, 이성애자는 이성애자끼리(그럼 바이는 누구와?) 만난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개인의 다양함을 설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럼에도 이성애 여성과 이성애 여성이 연애를 할 경우 둘의 관계를 어떻게든 분류해야 한다면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글쎄 ….
03
암튼 제목처럼 저의 연애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연애하고 있다는 글을 기대하셨다면 낚이신 거죠. 케케. 😛
푸른 빛, 정전
번개가 우르르쾅쾅. 뒤늦게 등 뒤가 환했다는 걸 깨달았다. 밤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망설이다 카페에 갔다. 워드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들려온 천둥번개 소리. 그리고 미리 찾아왔던 푸른 빛.
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찍 泫牝에 갈 걸 그랬다고 구시렁거렸다.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을 땐, 차마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泫牝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 들어갔지만, 10분 정도의 거리가 아득한 거리같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서둘러 걸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땐 옷이며 가방이 다 젖었다.
문을 열고 泫牝에 들어섰다. 스위치를 켜는데, 아, 이런. 불이 안 켜졌다. 천둥에 정전사태가 발생한 걸까. 이 더운 여름날 선풍기 없이 잠들어야 하는 걸까. 밖에선 간간히 푸른 빛이 번졌다. 그러고 보면 이 건물의 다른 집들도 모두 불이 꺼진 것 같다. 아닌가. 기억이 긴가민가하다. 아, 그래. 계단의 야간등은 켜진 것 같은데, 야간등은 별도의 전지를 사용하는 걸까. 옆 건물도 모두 불이 꺼진 거 같다. 이 일대가 모두 정전인 걸까. 근데 가로등엔 불이 들어왔던데. 근처 가게도 불이 환했는데. 가정집만 정전인 걸까. 옥상에서 살피니 대부분의 집이 불이 꺼졌지만 불이 켜진 집도 있다. 어떻게 된 걸까. 泫牝만 문제인 걸까. 천둥번개가 泫牝만 정전사태로 만든 걸까. 泫牝의 전기배선이 고장난 걸까. 며칠 동안 계속 전기가 안 들어오면 만나기 싫은 주인집을 찾아가야 하는 걸까. 주인과 마주치는 건 정말 싫은데,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일단 하루는 그냥 지내기로 했다. 만약 번개로 이 일대가 정전이라면 수요일에도 비가 많이 내린다고 했으니 목요일 즈음에나 복구가 가능하겠지. 그렇담 내일도 어둠 속에서 선풍기 없이 잠들어야 하는 걸까. 소리 없는 번개가 참 많이 친다. 심심찮게 푸른 빛이 泫牝을 비춘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씻고 라디오를 듣다가 잠들었다. 자면서도 걱정했다. 이러다 복구가 안 되면 이 여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걱정을 껴안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가끔씩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내리니 덥지는 않아 다행이야. 잠결에 몇 번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다.
늦잠을 잤다. 라디오 알람을 들으며 깨어났다가 다시 잠든 기억이 난다. 벌써 7시가 넘었다. 이런, 이런. 서둘러 씻고 나갈 준비를 하다가, 두꺼비 집을 찾았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방 안에 있다. 이제 5년 째 살고 있는데, 두꺼비 집을 찾은 건 처음이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예전에도 두꺼비 집을 찾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두꺼비 집의 위치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같기도 하다. 기억이 헝클어진다.
두꺼비 집 뚜껑을 여니 차단상태다. 어제 천둥번개로 스위치가 자동으로 바뀌었나 보다. 조금 허탈했다. 갖은 걱정을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하다니. 불이 들어오고 선풍기도 잘 돌아간다. 잠을 설치게 했던 고민을 간단하게 혹은 허탈하게 해결하고 나선 泫牝을 나설 준비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