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인생: 구금시설, 트랜스젠더, 프로젝트들

인생이 참 얄궂어요. 요즘 제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와 하고 싶지만 못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인생이 참 얄궂다”란 말을 연신 중얼거립니다.

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현재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프로젝트는 “십대 여성(청소녀) 구금시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명칭이 안 나왔고,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긴 애매하지만, 위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어요. 이 일을 하기로 한 계기는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단체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면서지요.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중요한 역할의 하나를 담당하고 있더라고요. 분명히 충분한 설명을 들었고, 저도 좋아서 참여했는데,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에요. 하하. ;; 암튼 단체 이름은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죠(이것으로 이 글이 이 단체 이름을 기록한 첫 번째 웹문서가 되려나요? 하하;;).

단체 설립에 함께 하면서 진행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의 키워드가 위에서 언급한 “십대 여성(청소녀) 구금시설”이죠. 이 단어 중 제가 가장 많이 끌리는 단어는 구금시설입니다. 제가 구금시설에 있었다는 식의 이유는 아니에요. 그냥 사람마다 유난히 끌리는 이슈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십대 여성(청소녀) 이슈에 관심이 없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죠. 이 모두에 끌리지만 구금시설에 유난히 끌려요. 이 프로젝트의 경험을 살려 나중에 트랜스젠더-구금시설 이슈로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으니 소중한 경험이죠. 그래서 인생이 얄궂어요.

현재 퀴어 운동 판에서 소소하지만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트랜스젠더-구금시설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 이슈가 조금씩 제기되었고, 현재 몇몇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어떤 사업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근데 전 이 프로젝트에 참여를 못 하고 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 시간의 문제도 있고, 생계 문제도 있고 …. 다 변명일까요? 하지만 때론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죠. 트랜스젠더-구금시설 이슈를 진행하기 좋은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시작하면 좋으련만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죠. 내년이면 할 수 있을까요? 내후년이면 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너무 늦은 걸까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다짐하지만 인생이 참 얄궂어서 아쉽죠.

예전같으면 일단 같이 한다고 했을까요? 하지만 생계비를 주는 일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상황에선 쉽지 않더라고요. 더구나 프로젝트를 위한 회의의 대부분이 저녁에 잡히기 마련인데, 전 저녁마다 알바를 하거든요. 하하. 저녁마다 하는 알바는 오랫동안 할 수 있길 바라고요. 그나마 하고 싶은 일, 관심 있는 일을 하면서 생계비도 벌 수 있으니 행복한 걸까요? 이런 점에선 분명 행복해요.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바쁘고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못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니 바쁘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게 그나마 좀 더 행복하죠. 그러고 보면 제가 언제 하기 싫은 일을 한 적이 있긴 했나 싶기도 하네요. ;;;;;;;;;;;;;;;;;;;;;;;;;;;

아무튼 내년엔 프로젝트를 가급적 줄이기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더구나 하고 싶은 것 욕심내서 다 했더니 정작 혼자 숨어지낼 시간이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더라고요. 아하하. 가끔은 해야 할 일을 펑크내기도 하고요. ㅠ_ㅠ 내년엔 절대 새로운 사업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올해 시작한 일 중 내년으로 이어지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네요. 새로 사업을 하지 않아도 간간히 단기적인 일이 생길 테고요.

그나저나 올해 하기로 한 일 중에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 몇 개를 포기해야 할까요? 아하하하하하하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기와라 히로시 『벽장 속의 치요』

소설에 굶주려서 잠들기 전 단편소설을 한 편씩 읽기로 했다. 최근 이렇게 해서 몇 권의 소설책을 읽었는데, 오늘 다 읽은 오기와라 히로시의 단편집 『벽장 속의 치요』는 특히 인상적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무렵, 『판타스틱』에 실린 광고를 읽고 살까 말까를 망설였다. 왠지 재밌을 거 같은 느낌이었달까. 하하. ;;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워낙 많아 망설이고 미루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거의 잊었을 무렵, 숨책에 이 책이 나왔다! 선점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헌책방에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는 건 아니다. 일하고 있는 책방에 ㄱ이란 사람이 A란 책을 찾았는데, 그땐 찾는 책이 없었다. 근데 다음날 A란 책이 들어왔다.  ㄱ은 며칠이 지나 다시 왔지만 그땐 이미 다른 사람이 A란 책을 사간 뒤였다. 기다린다고 복이 있는 건 아니다. 흐흐)

첨엔 장편을 기대했는데 단편이라 살짝 놀랐다. 하지만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어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은 느낌이기도 하다. 유령도 나오고 귀신도 나오고 살인사건도 나오고 이런저런 반전도 나오는 장르소설인데, 이 정도의 설명만 들으면 뻔한 내용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소재가 진부하다고 소설이나 내용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유령이나 귀신이 나오지만 공포소설은 아니라거나,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범인을 찾는 식의 내용이 아니기에 특별한 건 아니다.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느꼈을 법한 묘미를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십대 시절 오 헨리 소설을 즐겨 읽었다). 이른바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반전의 묘미가 『벽장 속의 치요』에 실린 단편들에 잘 살아 있다. #스포일러지만, 단편 하나를 예를 들자. 우연히 애인을 죽여 시체를 숨기려고 하는데, 고객서비스라며 가전제품회사의 직원이 무료로 집안청소를 해준다고 찾아왔다. 살인을 들키지 않고 청소를 끝낸 직원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그 직원은 이런 수법을 사용하는 도둑. 그래서 주인공은 그 도둑이 살인한 것으로 꾸미려고 하는데, 다시 누가 찾아온다. 그 도둑의 뒤를 밟던 경찰이 도둑을 잡아서 찾아온 것. 집에 들어가겠다는 경찰을 들일 수도 없고 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설은 마무리. 이런 식이다. 스포일러 끝.#

이야기로서도 재밌지만, 두 번째로 실린 단편 「Call」은 정말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 가장 절묘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듯. 「Call」을 아직 읽지 않은 분이 나중에 읽는다면 최소한 두 번(혹은 한 번 반)은 읽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다른 작품은 안 읽어도 이 단편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치명적인 스포일러라 더 말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 언젠가 이런 기법의 글을 쓰고 싶다. (근데 이런 기법이 진부하다면 낭패;;; 흐흐)

의외의 발견: 동성애 관련 논문들

예전에 전자사전을 쓰지 말고 종이사전을 사용하란 요지의 글을 읽었다. 이제는 출처도 저자도 다 잊은 글이다. 종이사전을 추천한 이유는 간단한데, 전자사전은 원하는 단어만 찾지만 종이사전은 단어를 찾으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에서 의외의 단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나. 의외의 발견에 강조점을 찍은 글이었다. (잠깐 딴 소리하면, 난 전자사전을 쓰지만 종이사전을 더 좋아하는데 종이사전엔 필요한 정보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의외의 발견은 인터넷서점과 오프라인서점 혹은 도서관의 차이기도 하다. 구매를 결정한 책만 검색하는 인터넷서점에선 의외의 발견을 하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나의 습관때문 이겠지). 물론 관련 서적을 제공하는 인터넷서점도 있지만, 그 서비스에 도움을 받은 적은 별로 없으니 생략. 하지만 오프라인 서점이나 도서관은 다른 듯. 도서관에 가면 도서반납대에 있는 책을 훑어 보는 걸 좋아한다. 내 전공서적이나 관심 도서가 있는 서가에선 대개 예측할 수 있는 책들만 만나지만, 반납대에선 의외의 책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에 구비할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보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생은 다른 분이 다 했고, 나는 약간의 추가 작업을 하는 정도다. 근데 이런 작업에서도 의외의 발견을 할 수 있어 즐겁다. 정리해야 하는 자료들은 모두 퀴어와 관련 있지만, 퀴어와 관련 있다고 모든 자료에 다 관심 있는 건 아니다. 평소라면 아무래도 조금 더 관심 있는 주제의 책들을 주로 읽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정리를 하다 보면 평소엔 관심이 없는 주제의 책들도 훑는 기회가 생긴다.

오늘 찾은 의외의 발견은 나치독일의 동성애 탄압과 아리안 민족성 형성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다. 자세히 읽은 건 아니고 논문요약과 목차 정도만 읽었는데 꽤나 흥미롭다. 히틀러 시대에 독일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현재의 범주로 환원해서)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 집시와 같은 이들도 탄압했고 말살정책에 따라 많은 이들을 죽였다. 조일구씨가 쓴 이 논문은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나치의 한 관리가 남성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독일인의 남성성을 형성하고, 이 과정을 통해 아리안족을 남성의 신체로, 남성다움으로 재현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고 조일구씨가 요약했다). 예전에 한국의 군입대 경험과 국민국가 형성을 탐구한 논문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기에, 동성애 탄압과 아리안족(더 정확하게는 독일 남성성)의 민족성 형성의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기대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아니 시간 내서 읽어야 할 듯. 근데 이렇게 기대하고 읽었는데 내용이 별로면 어떡하지? ;;;

다른 한 편, 국내에 있는 여러 신학대학에서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논문이 의외로 많아 놀랐다. 워낙 보수적인 기독교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관련 논의가 없을 줄 알았다. 근데 아카이브에서 소장하고 있는 논문만 13편 정도다! 그 중 몇 편은 대충 읽었는데,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성서의 맥락에서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입장과 동성애를 죄로 여기는 입장을 개괄한 후 동성애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입장을 비판한 후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성애자가 아무리 죄인이라해도 그들을 내쳐선 안 되고 감싸고 어떻게든 이성애자로 전향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절한 목회상담 방법을 나열한다. 내가 웃었던 건, 이들의 글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어찌나 진지하게 염려해 주시는지 웃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한 태도,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심각하게 염려하지만, 그런 태도가 웃기다는 걸 알까? 한 가지 더 웃긴 거. 목차를 훑다가 깜짝 놀랐는데, 상당히 많은 논문들이 목차부터 내용까지 비슷하다. 미묘하게 다르고 대체로 비슷하다. 그래서 첨엔 내가 실수로 같은 논문을 다시 집은 줄 알았다. ㅡ_ㅡ;;

암튼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을 즐기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