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정말 비가 많이 온다. 밖에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
옥탑방, 玄牝은 이렇게 비가 내릴 때마다 물이 샌다. ㅡ_ㅡ;; 화장실 천장에선 물이 똑똑 떨어지고 싱크대가 있는 쪽에도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면 바닥이 흥건할 정도다. 방은 물이 새지 않아 다행이다. 책이 젖으면 정말 속상할 테니까. 하지만 방바닥이 습해 조금 불안하다. 바닥에 쌓은 책들 중 가장 아래에 있는 책들이 상할까 걱정이다.
나름 재밌다면 재밌고 신기하다면 신기하게도 이런 곳에서 얼추 5년을 살았다. 슬슬 이사를 준비해야 할 때다. 이번에도 학교 근처로 이사할지 아예 다른 동네로 옮길지 고민하고 있다. 문제는 이삿짐을 싸는 일. 이삿짐 싸는 데 적어도 일주일에서 한 달은 걸릴 텐데 박스는 어디서 구하며 짐을 싼 박스는 어디에 쌓아두지? ㅡ_ㅡ;; 참 대책 없이 살았다. ;;
02
며칠 전부터 이 얘길 쓸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냥 쓰기로 한다.
리퍼러로그를 확인하며 이곳 [Run To 루인]에 들어온 검색어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검색어는 “숨책 직원” … 헉;;;;;;;;;;;;; ![]()
링크를 따라 가면 결과물이 총 8개인데 그 중 4개가 이곳이다. …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0- 흐흐. (저 검색어로 검색한 분이 날 찾았는지 다른 사람을 찾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리퍼러로그를 확인하고 글을 쓸까 말까를 망설인 이유는, 이 검색어로 검색한 분이 다시 이곳에 올 가능성 때문이다. 다시 이곳을 찾을 때 이 글을 본다면 좀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망설였다. 하지만 짧게 언급하기로 한 이유는 검색어 자체가 무척 재밌기 때문이다.
“숨책 직원”이란 검색어를 확인하는 순간, 내가 사는 세상은 검색창과 검색어로 이어진 세계란 걸 새삼 깨달았다.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부터 검색과 링크로 이어지는 세상. 무언가를 찾기 위해선 일단 검색부터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터넷이 되지 않아 검색을 할 수 없으면 안절부절 못 하고 답답함을 느끼고. 이런 생활이 몸에 배다 보니,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내 몸은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검색기능이 없는 인터넷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안 되고.
언젠간 모든 것이 검색창으로 통하고 그 결과가 개인의 앎을 좌우하는 시대가 오겠지? 뭐,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몇몇 인터넷 업체가 검색기술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가.
03
02의 이야기와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른 얘긴.
구글에서 내년에 OS를 출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어이 하는구나 싶었다. 자신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고 모든 걸 웹으로 해결하는 OS라는 건 꽤나 매력적이다. 아직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곳이 많고, 접속해도 연결이 불안한 곳이 많지만, 인터넷에 접속만 할 수 있다면 무척 편할 거 같다. 이메일을 확인하듯 문서를 비롯한 각종 작업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부산에 갈 때 굳이 후치(노트북)를 챙기지 않아도 될 거 같고. 물론 부산집엔 컴퓨터 자체가 없어 후치를 챙겨야 하지만.;;;
무엇보다 컴퓨터 사양이 높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매력적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나올 때마다 나스타샤(데스크탑)의 생명을 연장하는 기분이고. 흐흐. 그래서 기다리는 OS가 있는데, Cloud 1.0이다. 이 역시 모든 걸 웹으로 해결하는 OS란다. 나스타샤와 놀 때 사용하는 기능은 이메일 확인, 웹서핑 정도란 점에서 잘 맞을 거 같다. 아울러 윈도처럼 고사양의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OS가 나오는 와중에도 이렇게 저사양의 컴퓨터에서도 작동하는 OS가 나와 다행이다.
케슬러와 맥켄나의 『젠더』: 1970년대 젠더 이론을 추적하기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관련 글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원래 계획이라면 지난 달에 다 읽었어야 했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이런 이유는 모두 핑계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면 열흘이나 늦을 리가 없으니, 그냥 게을러서 늦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세 편 정도의 관련 글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닐 테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기고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면 ‘좋은 책’이지 않을까? 즉, 어떤 형태로건 독자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인 건 분명하다. 다 읽었는데도 할 말이 없고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에 가까우니까. 그렇다면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은 어떨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즘이건 트랜스젠더이론이건 퀴어이론이건 뭐건 간에, 내게 1970년대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론과 논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번창했다기 보다는 싹이 트기 시작하는 시기랄까. 좀 더 구체적으로 쓰면, 1950년대 중반 ‘젠더역할’이란 용어를 의학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며 ‘섹스역할’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 즈음 트랜스젠더 개인(Virginia Charles Prince)과 의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섹스와 젠더 구분을 1960~1970년대 페미니즘에서 적극 받아들였고, 젠더는 페미니즘 논의의 중심이 된다. (논의하는 사람에 따라 1930년대의 마가렛 미드를 섹스-젠더 구분의 시발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1970년대까지의 섹스-젠더 구분 논의는 상당히 단순했다고 이해했다. 앤 오클리(Ann Oakley) 식으로, 섹스는 용기처럼 변하지 않지만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정도랄까? 혹은 성전환수술의 토대를 닦은 존 머니(John Money)나 로버트 스톨러(Robert Stoller)처럼 섹스가 변할 순 있지만, 지정한 젠더를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정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1970년대까지는 섹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란 이분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란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한다는 게 내 앎의 전부였다. 그래서일까? 1979년에 처음 나온 케슬러와 맥켄나의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들은 시종일관 이분법을 당연하게 가정하는 이론들을 꼼꼼하게 비판하며 이분법을 가정하지 않는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미국 젠더 논의의 지평을 넓혀줬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흥분했고, 마지막 결론을 기대했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범주인 트랜스섹슈얼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이유기도 하다. 트랜스섹슈얼을 다루지 않는 젠더 이론이었다면 나중에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젠더 이론을 다루는 동시에 트랜스섹슈얼의 경험도 다루고 있어 예정보다 일찍 읽었다. 다루는 정도도 한 챕터가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한 챕터에선 집중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장면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케슬러와 맥켄나는 두 영혼의 사람(버다치)은 젠더 이분법을 위반하거나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지만 트랜스섹슈얼은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전환수술은 트랜스섹슈얼들이 이분법을 내면화하고 강화하는 실천의 하나란 것이 저자들의 주장 중 하나다. 이런 큰 주장때문에, 수술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로 설명하는 이들의 경험은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다른 부분에선 매우 영민한 저자들이 트랜스섹슈얼을 분석할 땐 왜 이렇게 막힌 걸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분법을 강화하느냐 하지 않느냐란 논쟁은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분법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기 전 나는 무척 기대했다. 제목도 “Toward a Theory of Gender”(젠더 이론을 향하여)로, 이분법의 한계에 갖히지 않는 새로운 젠더 이론을 제시할 거란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 기대는 금물. 간단하게 요약하면, 젠더를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서 접근하면 차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구분 자체를 질문하고 이분법을 몸에 익히는 과정 자체를 질문하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끝. ㅡ_ㅡ;; 1970년대 후반엔 상당히 새롭웠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어떤 사람들에겐 이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신선할 거 같다(젠더는 양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하니까). 하지만 나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에겐 무척 진부할 따름이다. 아니, 내용이 진부한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난 케슬러와 맥켄나가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읽고 싶었지, 문제제기를 읽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논문 한 편으로 써도 충분할 주장을 도대체 왜 책 한 권 분량으로 쓴 거냐고!!”라고 구시렁거렸다. 흐흐.
이 책을 읽던 초기엔 이 책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다 읽고 나니 어쩐지 허탈하다. ;;;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1970년대 젠더 논의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란 점이다. 아울러 버틀러와 같은 이의 주장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진행한 이론적 논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젠더 이론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 듯 하다.
『동무와 연인』 중에서
대의(大義)가 푯대라면 그 푯대 아래 ‘동지’가 모인다. 그들은 거사(擧事)에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 더불어 벤야민의 비평론이 가릋듯이, 객관성(Saclishkeit)마저도 당파적 실천을 위해서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배신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 전두환들이나 김영삼들이, 최민수들이나 강호동들이 웃는 표정만으로 족하다. 이론이 부재한 자리를 정서적 일체감이 들물처럼 채우는 사적(私的) 우연성, 그것이 친구다. 공유된 이념이 없으니, 원칙상 배신도 존재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관계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관계의 형식은 대의와 이념의 부재가 남긴 정서의 진공 속에서 생긴다. 대의는 공간적 관념의 정합성이 없는 대신,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이와 대조적으로 동지는 무시간적 관계랄 수 있는데, ‘같은 뜻[同志]’은 원리상 시간을 초월해서 동아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햇차가 좋고 묵은 술이 좋다고 하듯이, 친구는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다. 그것은 시간이 보존해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그래서 친구의 관계가 정실에 치우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 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머 -얼 -리 몸을 끄 -을 -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니체와 짐멜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 (31-33)
김영민 『동무와 연인』 서울: 한겨레출판, 2008.
요즘 한글로 쓴 책이나 글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어 잠들기 전 이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문장 좋은 글을 읽고 싶었는데, 이런 바람에 부합하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괜찮은 구절이 많다. 위에 인용한 구절도 그 중 일부다. 특히 같은 뜻이란 시간을 초월한다는 구절, 동무는 동무(同無)는 곱씹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