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재를 담보로 판매하는 미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기

카페에 있으면 이어폰을 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유난히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마련인데. 지금 바로 앞에서 보험설계사가 고객과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다. ㅡ_ㅡ;; 카페에 지금 나와 보험설계사 일행 밖에 없어 설계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잘 들리기도 하고. 암튼 그 얘길 듣기 싫어 이어폰을 끼긴 했는데.
(문득 카페 같은 곳에서 설계사의 목소리는 큰 편이 좋을 거 같다. 설계사의 입장에서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대상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고객만이 아니라 카페에서 우연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들도 포함하니까. 그러니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설계사의 입장에선 어쨌거나 성공이다.)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하면서, 요즘 들어 좀 안정된 직종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계기는 간단하다. 학회일은 11월로 끝나고 저녁 알바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두 가지 일을 해야 생계 유지가 가능하기에 어느 하나만 끝나도 위기가 온다. 그래서일까? 아직 끝나지도 않은 11월을 대비해서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늘만 쳐다보는 꼴인가? 큭큭.

암튼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좀 안정된 직장이나 돈벌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니까 수익 많은 직종은 바라지도 않고! 근데 이런 바람과는 별개로 난 정규직에 취직하고 싶은 바람은 없다. 으하하. (정규직으로 뽑히긴 할 것이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하자. ㅜ_ㅜ) 그리고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싶지 않은 바람의 상당 부분은 국민연금에 가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좀 웃기겠지만 정말이다. ;;;

어렸을 땐 국민연금이 좋은 건 줄 알았다. 정년퇴임할 때까지 국민연금을 내면 은퇴한 후 월급의 80% 수준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유럽 식의 국민연금은 꽤나 괜찮았다. 실상은 몰라도, 표면적으론 그럴 듯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한다고 했을 때 좋게만 느꼈다. 그럼 요즘은? 국가 공권력을 이용한 갈취로 파악하고 있다. 뚜렷한 이유는 없지만, 자동가입에 가까운 제도와 원천징수는 내게 갈취 이상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울러 최초 약속만큼 돌려 주지도 않는다면 이건 사기잖아. 기업과 소비자로 치면 기업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약관을 일방적으로 바꿔선 소비자에게 통보하는 것과 같다. 이건 불공정거래다.

물론 반드시 이런 이유만으로 정규직이 싫은 건 아닐 테다. (어떤 의미에서 난 학생–학교에 다니진 않아도 학생이다–과  활동가란 측면에서 정규직이기도 하다. 수입이 없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규직이긴 하다;;;) 사실 정확하게 무슨 이유로 정규직이 싫은 건지는 나도 모른다. 프리터를 무척 매력적인 노동 방식으로 느끼는 이유 역시 알 수 없다.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난 이게 “책임감”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느낀다.)

암튼 보험설계사가 열심히 상품을 판매하는 얘길 잠시 듣다가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좀 안정된 미래를 바라는 욕심과 보험이나 연금 같은 건 결코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의 공존이 그것이다. 보험이란 게 불안정한 미래를 인질 삼아 현재의 수익을 담보하는 거 아닌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함으로 바꾸고 그 불안을 가중해서 상품을 판매하는 희망장사. 혹은 절망장사. 그러니 좀 안정된 수입을 바라는 나의 욕망과 보험상품을 구매(근데 이걸 왜 “가입”이라고 말하는 걸까?)하는 행위는 유사한 것이 아닐는지. 11월 말 학회일이 끝날 즈음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게 미래인데, 안정된 수입을 바라는 욕망은 보험을 구매하려는 욕망과 얼마나 다를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 시대는 현재를 불안이란 용어로, 미래를 꿈과 희망이란 허황된 용어로 포장하여 잘도 판매하는구나 싶다. 이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겠지.

통장에 잔고가 없어도 평생을 놀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 걸까?

책 처분을 고민하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입을 열고 나를 삼킨다. 일은 나를 씹어 삼키고 적당히 소화해선 배설한다. 그렇게 일에서 빠져 나온 나는 곧 다른 일에 먹힌다. 일테면 요즘 나는 매일 일정 세 개는 기본이고 일정이 너댓 개는 그냥 좀 바쁜 정도인 나날이다. 바쁜 게 문제가 아니다. 블로깅을 할 수 없어 아쉬운 게 문제다. 글을 쓸 수 없어 아쉽다. 글을 읽을 시간은 있어 다행이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까지 책을 사 모아서 뭐하나 싶었다. 이걸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어떤 책은 평생 다시 안 읽을 건데 …. 책을 처분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 중인 처분 경로는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헌책방에 팔거나 그냥 넘기는 것. 판다면 적은 금액이나마 생활비에 보탬이 되겠지만 숨책이라면 그냥 넘기고 싶다. 워낙 고마운 곳이라서. 두 번째는 이곳 [Run To 루인]에서 착불로 무상배분하는 것. 세 번째는 아카이브에 기증하는 것. 세 가지 경로를 고민하는 건 책의 성격에 따라 처분할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여성학이나 섹슈얼리티/성, 퀴어 관련 기록을 꾸준히 모았다. 근데 그 중엔 개인소장보단 공공 아카이브에서 소장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다. 일례로 내겐 데니스 로드맨이 쓴 두 종류의 자서전이 있다. 하나는 한글로 옮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문이다. 그가 게이인지 크로스드레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서전엔 퀴어와 관련해서 읽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더구나 한글로 옮긴 책은 현재 절판. 몇몇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폐쇄적인 건 유명하니 이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아니,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주제아카이브에서 소장하지 않는 한 기록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반드시 소장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른 예로, 『역사의 사기꾼들』이란 책은 의료과학기술에서 발생한 오류를 다루는데, 비이성애, 트랜스젠더, 간성과 관련 있는 내용이 조금씩 있다. 퀴어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책뿐만 아니라 조금씩 언급한 책도 여럿 모은 결과다. 근데 굳이 이 책을 내가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책을 소장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어떤 기록을 필요로 할 때, 그 기록에 신속하게 접근가기 위해서다. 도서관이 있다지만 도서관개관시간은 때때로 기록에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이 너무 불편해서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았다. 근데 모으다보니 소장해서 나쁠 건 없지만 굳이 내가 소장할 필요가 없는 기록들도 많더라. 어떤 기록은 독점하기보다는 공개하는 게 장기적으로 내게 도움이겠더라. 그 기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혼자 즐겁겠지만 충분히 활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는 모른다지만 내가 데니스 로드맨 자서전으로 글을 쓸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잠깐 언급하는 일은 있어도 그의 자서전을 분석할 일은 없을 터. 하지만 그 기록을 자료로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록을 공개하는 게 결국 내게도 도움이다. ‘나 자료 이 만큼 있다’는 자족감은 공허할 뿐이더라.

다른 한 편, 몇몇 소설들은 아마 평생 다시 안 읽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과연 『일식』을, 『애니멀 크래커스』를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혹은 『핫뮤직』 과월호를 굳이 내가 소장한다고 해서 다시 읽을 일이 있을까? 차라리 그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방식이 어떤 형태건 간에 유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더 이상 책을 둘 자리가 없어 이사를 고민해야 한다면 더욱더!

이렇게 작심했을 때 얼른 처분하면 좋겠지만, 나의 진로가 불투명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하다. 흐흐. ㅡ_ㅡ;; 진로에 따라 소장할 필요가 있는 책과 유통해도 무방한 책이 나뉘기 마련이니까. 더 큰 문제는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선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렇게 쓰면 책이 상당히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단행본만 얼추 사천 권도 안 된다. 책 자체가 많은 건 아닌데 방이 8평도 안 돼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다;;;;;;;;;;;;;;;;;;;;;;;;;;;;;;;;;

내년 초까지 2/3 수준으로 줄이는 걸 목표로 하자!

+
사실 더 줄이고 싶고 굳이 소장하지 않아도 좋을 자료들이 더 있긴 하다. 처분 방법이 고민이라 망설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확 줄여야지.

『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미국정신의학회(APA)의 1974년 회의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 세션에 참가한 한 의사는 mtf 트랜스섹슈얼이 유난히 예쁘고, 일반적인[비트랜스] 미인이 자신에게 유발하는 느낌을 환기한다면, 그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다움을 더 잘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사는 트랜스섹슈얼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젠더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의사 자신에게 성적인 흥미를 일으키는지로 판단한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118.
(번역은 대충 날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격언이 아니겠지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세요.” *뻔뻔*)


한동안 분주했고, 별도의 읽을거리가 있어 『젠더』를 못 읽었다. 원래는 『젠더』를 6월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다. 어쨌든 어제부터 약간의 시간이 생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다. 2006년 여름이었나. 여이연에서 트랜스젠더 강좌를 열었는데 담당 강사가 위의 일화를 소개했다. 무척 인상 깊어 어디선가 몇 번 언급했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인용하길 관뒀다. 근데 『젠더』에 나오는 일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 늦은 밤 지하철에서 이 구절을 읽고 꽤나 흥분했다. 흐흐.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78년이란 점, 그러니 1970년대 중후반에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엔 트랜스젠더를 진단할 공적 진료규범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을 성동일성장애(GID: gender identity disorder)란 항목으로 의료진단범주에 포함한 건 1980년이니 그전까진 설만 분분했다. 이런 시기에 몇 명의 의사들이 위와 같은 얘길 했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찾아왔을 때, 진짜 트랜스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환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로 판단한다고.

의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 유별난 기준은 아니다.

작년 ftm 관련 다큐를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독 및 출연자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을 때, 몇 명의 관객들은 출연자를 보며 “쟤는 좀 남자 같네.”라고 속삭였다. 난 이 속삭임과 『젠더』에서 전하는 의사들의 발언에서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이란 수식어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어떤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일상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위에 인용한 의사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매혹을 기준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길이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걷는 방식이나 목소리 톤을 기준으로 삼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만 듣고선 상대를 “여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여성의 목소리”라고 판단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위의 의사들이 성적 매력, 유혹으로 판단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물고 나 역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런 구분을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으로 구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 말을 덧붙이는 건, 예전 어느 강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의사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 강의실은 술렁이며 의사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건 의사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술렁임, 의사를 향한 비난/비판은 용인할 만한 행동과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구분하고 있단 점에서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음, 불쾌한 건 아니라도 유쾌한 건 아닌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내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많은 이들이 나를 “남성”으로 판단했다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걸 ‘알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다. 혹은 나의 이름은 알고 오프라인의 모습은 모르다가 오프라인에서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루인”이라는 얘길 할 때면 종종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내 몸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로 드러나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놀람은 온라인이나 글로만 알던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도 빈번하잖아. 그저, 이런 놀람과 의사의 발언을 구분하고 놀람은 괜찮지만 의사의 발언은 나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어제 지하철에서 『젠더』를 읽다가 이런 저런 고민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두드러진 고민 중 하나가, 20~30년 뒤의 내 모습이라 좀 심란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