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다

오랜 만에 시를 읽는다. 오래 전에 좋아한, 여전히 어떤 울림이 있길 기대하는 시를 읽는다. 하지만 어떤 시는 너무 재미가 없다. 예전엔 정말 좋아했는데, 10년 정도 지나 다시 읽으니 너무 뻔해서 별로다. 만약 다시 10년이 지난 후에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진이정을 읽는다. 1999년에 처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읽는다. 좋다.

그립다는 움직씨를 지장경에서 발견하곤 난 울었다.
먼지 쌓인 경전에도 그리움이 살아 꿈틀댔던 것이다
전생의 지장보살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 보살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워한 만큼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비유일까
(진이정, 「엘 살롱 드 멕시코」 중에서)

그립다는 말. 맞다. 그립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리움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감정 중 하나고, 그래서 그리움은 어떤 대상을 향해 가는 움직임이다.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리운 거다. 대상을 고정하고 싶은데 고정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운 거다. 그리움은 바라는 모습을 향한 향수인 동시에 계속해서 변해가는 찰나다.계속 변하는 대상을 따라 같이 변해가는, 대상과 상관없이도 변해가는 찰나다.

망자를 천도하는 데는 그렇지, 눈물이 빠져서는 영험 없는 굿이 되었겠지, 슬픔의 물보라만이 존재의 열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아기무당의 무구한 눈 물보라가 내게 가르쳐주었다네, 그리곤 이내 그 물기 굿판을 판쳤네, 애욕의 환희를 맛본 적이 없는 비통한 혀로, 아니 사탕이나 빨던 입으로 쓰디쓴 만수받이, 눈물 적시던 바로 그 눈동자, 이내 눈웃음 치며, 서러움으로 희여진 백돼지 가리켰네, 백돼지의 주검 위에 올라탄 채 어리광을 시작한 걸세, 마치 폭소의 다라니를 설하는 광경 같았지, 그래 그만 모두 웃음보가 터져버렸네, 무신도 속의 울긋불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일제히 배꼽 잡으셨네, 삼지창이 어울리지 않는 최영 장군마저 어색하게 웃고 계셨네, 그 그런데 말이야, 나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네, 잃어버린 사랑이 그 와중에 나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일세, 굿청에 둘러진 온갖 만다라들이 나를 향해 깔깔대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일세, 게다 내 방 한 구석에 숨겨진 그대의 흑백사진조차 그 틈에 날 희롱하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참을 수 없었다네, 눈물 핥던 혀를 날름대며 어찌 간사히 표변할 수 있었겠나, 태장계 만다라 같은 그대의 얼굴이 분명 날 향해 홍소 터뜨리고 있었음에도, 나의 눈물은 한 올의 신통도 없이 굿판을 흐르고만 있었다네, 내 서러움의 창고 안엔 눈물과 한숨의 종교 하나 오롯이 촛불을 켜고 있었단 말이라네, 신들의 족보에도 없는 종교일 걸세, 온 천지가 다 배꼽을 잡는 순간, 나 슬쩍 거기를 순례하고 온 것일세,
(진이정, 「환상, 굿, 이야기」 중에서)

허수경도 읽는다. 여전히 아프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하얀 어둠을 맞이한다.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두통의 길이여

(…중략…)

내 마음의 결이 쓸려가요 대패밥 먹듯 깔깔하게 곳간마다 손가락, 지문, 소용돌이, 혼자 대낮의 공원

햇살은 기어코 내 마음을 쓰러뜨리네
(허수경, 「흰 꿈 한 꿈」 중에서)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허수경, 「봄날은 간다」 중에서)

그저 나의 부끄러운 문장을 수습하려고 시집을 다시 꺼냈다. 시를 다시 읽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문장 훈련은 뒷전이고 여전히 아픈 시들만 반복해서 읽는다. 반복해서 되뇐다. 킥킥, 웃으며 되뇐다. 킥킥….

일, 다른

나는 또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 음악 속으로 도망쳐 숨어 있기엔 내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언제나 나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조금 봐주는 날은 있어도 결국은 끌고 간다. 나는 기꺼이 끌려간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나는 할 일을 해야 한다. 꺽꺽대며 가픈 호흡을 밭으면서도 나는 끌려가길 자처한다. 끌려가다보면 다른 길이 나온다. 지금 경도된 상황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다른 길. 다른 세상. 식각한 곳이 만드는 반사각의 조명도가 약해지는 곳.

나와 [Run To 루인]과 조각과

뭔가 자꾸만 쓰고 싶은데 쓸 내용이 없을 땐 뭐라도 쓰고 지우길 반복한다. 하루 종일 이 상태다. 뭔가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블로깅을 할 땐 키보드로 바로 쓰는 습관이라 모든 글은 사라지고 없다. 다행이다. 만약 혼자 읽는 일기장이었다면 상당히 많은 글을 썼겠지. 일기장이었다면 아무 글이나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썼을 테다. 이곳에 쓰는 두서없는 글은 그나마(!) 정리를 한 글이다. 믿거나 말거나-_-; 나는 이곳, [Run To 루인]이 일기장이길 바라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이제 이곳은 일기장이라기 보단 그냥 어떤 공간이다. 일기장이기도 하지만 일기장일 수 없는 어떤 공간. 일기장이긴 한데 일기장이 아니기도 한. 어떤 공간. 그래서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난 항상 사무실에 있기에, 사무실에 들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나는 누가 들렀다 가는지 모른다 해도. 그들이 내가 있는지 여부에 신경을 쓰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해도. ‘나’라는 어떤 사람이 사무실 한 구석에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일상은 완전히 노출되지만, 이런 노출이 나와 관련해서 알려주는 건 그렇게 많지 않다. 많은 것을 알려주면서도 알려 주는 것이 별로 없는 상태. 이런 내 생활 방식은 [Run To 루인]과 닮았다. 나의 블로그는 나의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또한 나의 일부만을 알려준다.

나의 오프라인과 나의 온라인. 이 둘을 다 안다고 나를 아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나의 모습을 잘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모습이 낯설다. 종종 나의 블로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낯설고, 내가 사무실에 있는 모습을 말해주는 사람들의 언어 속에 있는 내가 낯설다. 그 둘을 합한다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삶을 살고 있다. 이제 나의 블로그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이 아니며, 사무실에 머무는 나도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그런 어떤 기억들의 조합, 흔적들의 조합일 뿐이다.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뉜 조각 맞추기인지 모르는 상태인데다 각각의 조각들도 어느 하나 딱 들어맞는 게 없는 조각 맞추기. 근데, 고작 몇 개의 조각만으로 타인과 자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을 뿐, 이런 게 너무 당연하다.

백만 년 만에 음악다방에 새 글도 하나 쓰고 음악도 올리고 댓글도 달았다. 참 민망하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말, 쓰고 지우길 반복했던 말의 일부, 조각 하나는 다방에 있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