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과 불빛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4시 30분경이다. 다시, 숨이 가팠다. 아니다. 숨이 가픈 게 아니라 그냥 숨이 안 쉬어 질 때가 있다. 잠들려고 누우면, 숨을 안 쉬는 게 아니라, 숨이 가픈 게 아니라, 숨을 못 쉬는 게 아니라, 그냥 숨이 안 쉬어 진다. 분명 호흡을 하고 있고 숨을 쉬고 있다고 느꼈는데 ‘숨이 안 쉬어 진다’란 어색한 문장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상태에 빠진다. 그냥 ‘숨이 안 쉬어 진다.’ 의식을 못 하고 있다가 갑자기 어지러우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호흡을 밭는다. 이러길 반복하다 잠든다. 이런지 좀 됐다. 잠들 때만 이런 줄 알았는데 잠에서 깨어나도 마찬가지다.

두통이 있었다. 새벽, 눈을 뜨는데 머리가 아팠다. 호흡을 밭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였다. 보통은 다시 잠들기 마련인데 잠이 안 왔다. 식각한 흔적이 반사하는 빛들 사이로 오고가다보니 6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나왔는데 더 어둡다. 내일은 더 어두워지리라. 어두운 아침, 도로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마주쳤다. 순간 그 자리에 멈췄다. 그 불빛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차는 오고 있는데 나는 아무 판단도 못 하고 멍하니 불빛을 보고 있었다. 아, 그랬지. 이 불빛이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많은 동물들을 죽인다고 했지. 갑작스러운 빛은 판단을 중지시켜. 그냥 멍하니. 한동안 멍하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을 차리고 길을 마저 건넜다.

식각

식각하다, 란 단어가 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금속표면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행위다.

금속표면은 빛을 일정 형태로 반사하지만 식각한 부분은 전혀 다른 반사각을 형성한다. 따라서 동일한 빛을 비춰도 식각하지 않은 부분과 식각한 부분이 반사하는 빛의 모습은 다르다.

아울러 금속표면에 새기는 행위기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쉽게 지워지지 않기에 식각한 흔적을 지우면 식각한 부분뿐 아니라 식각하지 않은 부분들, 때로 표면 전체에 흔적을 남긴다.

마음에 식각한 흔적이 남았다. 아무렇지 않을 빛/언어도 다른 방식으로 비춰내는 흔적. 모든 좋은 것들도 부정적으로 반사하는 흔적. 식각하지 않은 부분으로 빛/언어를 비춰내려 해도 식각한 부분의 반사가 식각하지 않은 부분의 반사를 방해한다. 두 번째 식각이다. 지우는 건 불가능하고 이제 판을 깨는 것만 남았다.

발표회

어제는 논문 주제를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아, 예. 운영체계가 잘 갖추어진 학과라면 지난 8월에나 했을 법한 일을 종합심사를 위한 원고 제출 마감 일주일도 안 남기고 했습니다. 원래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첫 논문부터 발표회가 자리를 잡아야지 않겠느냐는 선생님들의 의견으로 시행했는데, 하필 제가 첫 번째였습니다. 흑흑. (조금 억울했지요. 흐흐.)

논문 주제 발표회는 학과마다 전통이 달라서 발표회가 없는 학과도 있고 있는 학과도 있어요. 저의 선생님(지도교수)이 속한 학과엔 없고, 여성학과 주임교수가 속한 학과엔 있어서, 주임교수의 제안에 따라 발표회를 하기로 했지요. 전 발표회를 하지 않고 넘어가길 바랐기에 많이 긴장했지요. 근데 저의 선생님도 많이 긴장하셨는지 어제 아침부터 전화를 주셨어요.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발표회가 4시인데, 저보고 점심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고요. 전 보통 점심 겸 저녁으로 오후 3~4시 사이에 먹거든요. 그래서 아마 점심은 안 먹고 들어갈 것 같다고 답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속이 비면 더 힘드니까 속이라도 든든해야 한다면서 점심도 사주셨어요. 후훗. 발표회가 끝나고 나선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오늘 아침에도 살아있는지 걱정하시며 전화를 주셨고요. (너무 자랑하고 있나? ;; 흐흐.) 이렇게 걱정하시면서도 논평은 날카롭게 하시니 고마울 따름이죠.

발표회는… 흑흑. 비약하면 이미 본문을 다 쓴 상태에서 논문을 엎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은 논평도 있었습니다. 끄응. 서론에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신문기사에 등장한 변태들(반음양, 성전환, 여장남자, 남장여자)의 역사를 적었는데 이 기사에 다른 선생님들이 꽂혀선 제가 기획한 본론을 서론으로 쓰고 이 기사를 본론으로 쓰라는 논평도 있었지요. ㅠ_ㅠ 물론 제가 본론 소개를 너무 간단하게 한 문제도 있었지만요. 근데 전 이 기사들을 학위논문으로 분석하기엔 현재 저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이 기사 분석은 논문보다는 잡지나 단행본에 들어갈 원고로 쓰고 싶은 욕심이 더 커요. 이번 논문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건, 너무 진부한 내용이라고 해도, 어떤 이론적 틀의 정리였거든요.

암튼 뭔가 어처구니없는 게 나올 예정입니다. 그러니 내년 1월 2일 이후론 제가 뭔 짓을 했는지 잊어주시면 너무 고마워요. 흐.

+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변태를 신문기사로 다룬 내용을 분석하는 글은, 사실 간단한 자료집 수준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예전에도 밝혔듯. 내년 1월에 쉬엄쉬엄 놀면서 할까 했죠. 근데 어제 반응으론 출판물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어요. [Run To 루인]을 통해 PDF로 인터넷 출판을 하건 다른 형태로 하건. 암튼 뭔가 재밌는 주제가 생긴 건 확실하네요. 히. (근데 신문기사 내용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막연한 내용이라 답답하겠어요. ;; 이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