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관계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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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사한 예로, 종이나 칼날에 우연히 손가락 끝부분이 베인 경험은 빈번할 거 같다. 종이건 칼날이건, 실수건 실수를 가장한 의도적인 행동이건 간에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 위의 베인 흔적. 『컷』. ‘베다, 상처를 내다, 자르다’와 같은 행동의 결과. 이 행동의 결과가 베인 흔적일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하진 않는다. 손에, 팔에 생긴 베인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서 색깔이 연해지고 새살이 돋으며 아문다. 세월 속에서 흔적은 희미해지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힐 만큼 희미해진다. 물론 어떤 흔적은 죽을 때까지 남기도 하지만, 그 흔적이 평생 동일한 형태를 띠는 건 아니다. 어떤 형태로건 아무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 손가락을 베는 행위의 결과는 절단이나 단절이 아니다. 컷, 자르는 행위는 새로운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지, 모든 상황을 철회하고 단절하여 막무가내로 끝내는 행위가 아니다. 컷. 관계란 억지로 이어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어떤 중단의 순간을 맞이할 때야 비로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그래서 자르는 행위는 관계의 파국을 의미하는 듯해도,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발화)행위다.

소설 『컷』에서 의미하는 컷, 자르는 행위는 바로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기존의 관계 속에선 더 이상 생존 자체를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컷, 자르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다른 여러 영화나 소설들에선 이런 컷, 자르는 행위를 정신병과 같은 질병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컷』은 이 행위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난 이 소설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고, 두고두고 떠올릴 수밖에 없다.

+
소설에 등장하는 요양원을 퀴어 공동체, 퀴어 공간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이런 독해는 여기서 쓰지 않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독해가 새롭겠지만 내겐 좀 진부해서. -_-;;

++
최근 일주일 간 정신없이 바빴다. 할 일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는 아니고, 내일 어떤 행사가 있는데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너무 긴장해서 정신이 없었다. 흐. 다, 엄살이다. 흐흐.

『컷』

패트리샤 맥코믹. 『컷』Cut. 전하림 옮김. 서울: 보물창고(메타포), 2008.

그런 책이 있다. 제목을 읽는 순간, ‘이 책은 내 책이야’라는 어떤 예감이 드는. 하지만 읽기는 쉽지 않아 계속해서 망설이는. 언제든 읽을 수 있는 곳에 책이 있지만, 결코 책을 꺼내지 않는. 읽으면 단박에 좋아할 걸 알면서도 계속 망설이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은 책. 『컷』이 그랬다. 난 이 책의 제목을 읽자마자 구매했지만 읽기까진 무려 8개월이 걸렸다.

한편으론 걱정했다.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 너무 달라서 실망할까봐.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의 크기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일까봐. 이런 저런 감정들 속에서 지내다 지난 설연휴를 빌미로 이 책을 읽었다. 그래… 읽기를 잘했어. 정말 잘했어.

물론 어떤 사람에게 이 책의 진행과 결론은 다소 식상할 수도 있다. 드라마 혹은 이야기의 감동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 혹은 필수 요소에 어느 정도 충실하게 따르며 소설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익숙함이 안도와 위로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진부하기만 한 건 아니다. 관점의 변화가 익숙한 형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을 『컷』은 증명한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Cut. 구글사전에 따르면 “베다. 상처를 내다. 자르다.”와 같은 뜻이 가장 먼저 나온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손과 팔에 자상을 내고 그로 인해 요양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 요양원엔 거식, 폭식, 약물 중독과 같은 이유로 온 사람들이 모여 있고. 이 공간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작가는 연민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닌 소통이란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핵심은 치료가 아니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이다. 모든 상처는 한 개인에 국한하지 않고 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틀 속에 발생한다는 걸, 이런 거창한 설명 없이 이야기 속에 녹여내고 있다.

좋아한 부분은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피어싱 하는 거랑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어. 젠장! 다른 사람들은 혀도 뚫고, 입술도 뚫고, 귀도 뚫는 마당에 내 몸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난리인 거야?”
그 애가 애들을 쭉 훑어본다. 모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이건 내 몸을 장식하는 거야. 문신처럼 말이야.”
[…중략…]
“모두 왜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정말 모르겠어. 이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 아닐까?”
나는 소매 끝자락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멀리 개가 미친 듯이 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아만다인지 만다인지는 그 애가 잡지에서 보았다는 기사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듣기 시작한다.
“그거 알아? 옛날에는 사람들이 아프면 일부러 피를 내곤 했대. 그러면 엔도르핀이 생성된다는 거지.”
그 애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갑자기 들리는 클레어 선생님의 말소리에 방 안에 있는 애들의 고개가 일제히 선생님을 향한다.
“그런 행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
클레어 선생님이 묻는다.
“그렇고말고요.”
아만다인지 만다인지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며 대답한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어요. 정말 끝내 줘요. 그 전에 기분이 아무리 엉망이었더라도 그 순간에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죠. 갑자기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또 그렇게 하고 싶니?”
클레어 선생님이 묻는다.
내 손가락 감각이 무디어진다. 소매 끝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다.
“네. 그래요. 그런데 그게 왜요?”
(67-68쪽)

내가 하고 싶은 말, 나의 어떤 행동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읽는 내내 아팠다.

돌아오는 길

01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사람이 있다. 아니, 내가 잊으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즈음, 알고 지낸 사람이란 사실 자체를 잊을 즈음, 이름마저 낯설 즈음 연락이 오는 사람. 그래서 연락이 오면 내가 자못 당황하는 사람.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답문자를 하기란 참 어렵다. 예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거의 다 잊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이음새가 너무 헐거워 무난한 답만이 오가고, 무난한 연락 속에서 이음새는 더 삐걱거린다. 언제 잊어도, 언제 잊혀도 당혹스럽지 않은 관계. 친밀한 인사에도 어색함만 감돈다.
(20090125 메모)

02
폭풍의 전야처럼 서로 무난한 말만 주고받다가 기어이 속이 뒤집힌다. 속이 뒤집히는 관계, 적어도 내겐 이게 혈연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는 가족이다.

03
작년 가을 즈음 기존의 전자사전이 고장 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결국 새로 사기로 했다. 사고 나면 결국 영어사전 정도만 사용할 뿐 다른 기능을 사용하지 않지만, 다양한 제품들을 비교하다보면 이런저런 기능에 홀린다. “그래,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을 거고, 저런 기능도 언젠간 사용할 거야…”라면서. 누구나 알지만, 언젠가 사용한다는 말은 결국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전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SD 메모리 카드를 인식할 수 있고(MP3 플레이어 겸용으로 사용하려고;;), 사전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결정했다. 이제 자금만 모으면 된다. 후후. (뭔가 선후 관계가 바뀐 느낌. 흐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