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역사

17세기에 쓴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엔 국가를 인공인간 혹은 기계적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영혼은 주권자/통치자고 관절은 행정 관리고, 뭐 이런 식의 비유. 나는 이 비유가 재밌고 신선했다. 하지만 영문학이 전공인 나의 선생님께서 말하길 17, 18세기엔 인간과 기계를 홉스처럼 비유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인간과 기계 간의 비유가 18, 19세기엔 기계를 유기체로 비유하기 시작한다고. 유기체로서의 기계를 가장 잘 묘사한 책 중 하나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일 듯. 선생님의 전공이 영국 낭만주의 문학이라 여기까지 언급하셨다. 근데 나는 장르소설에 관심이 있는 인간이라 다음 말을 덧붙였다: “아, 그래서 19세기 후반부터 쥘 베른을 비롯한 SF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네요.”

나의 덧붙임은 나 자신이 이제야 깨달은 바이기도 하다. 확실히, 사회적인 배경과 역사에 무관하게 탄생하는 새로운 장르는 없다. 아울러 공부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더 많은 깨달음과 앎을 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르소설 초기까지의 상황과 관련한 문헌을 찾아 읽어도 재밌을 거 같다.

1800년대면 포(Edgar Allan Poe)가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시기면서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시기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합리적으로, 추론과 논리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고 믿던 시기. 추리소설이나 SF와 같은 장르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합리성, 이성, 과학적 사고는 사실 현실의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상황에서 도피하려는 욕망이거나 더욱더 건조하게 직시하려는 욕망의 표현이지 않을까. 과학적 사고로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장르소설이 등장한 건 아닐는지. 포의 시와 소설에서 공통으로 읽을 수 있는 합리와 비합리의 공존은 이를 반영하는 건 아닐는지. 공부가 부족하여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
논문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있는데, 큰일이다. 문제점이 너무 많이 보여서 이젠 감당이 안 된다. -_-;;

환상: 지토를 따라

마녀에겐 새 빗자루를 선물해. 고양이에겐 맛있는 참외를, 지토에겐 차갑고 새콤한 레몬을.

나는 마녀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어. 마녀는 내가 걸을 수 있는 하늘의 길을 만들어. 그 길엔 입술만 남은 고양이의 웃음소리가 맴돌고 있겠지. 웃음소리를 따라가. 나는 웃음소리를 따라가며 사라진 몸의 흔적을 찾아. 고양이의 웃음소리. 늦은 밤 들리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어느 낮 가만히 귀 기울일 때 들리는 작지만 분명한 웃음소리.

지토는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가고 나는 지토를 따라가. 하늘에 잠시 잠깐 생긴 길을 걸으며 나는 지토를 따라가. 지토는 서둘러 어딘가로 가며,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해. 가는 길마다 귓가에 맴도는 고양이 웃음소리. 울음이 아닌 웃음소리. 고양이 웃음소리는 귓가에 맴도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확실하지 않아. 귓가에서만 들리는 소리. 출처가 없어 찾아갈 순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소리. 그리고 나는 지토를 따라가. 입술 모양만 잠시 나타나 웃음소리를 흘리곤, 입술모양은 곧 사라지지만 웃음소리는 남아서 떠도는 길을 걸으며 지토를 따라가.

하늘에 잠시 잠깐 생긴 노란 길. 발을 내딛으면 길이 생기고 발을 떼면 길이 사라지는. 마녀는 저 멀리 어딘가로 가버렸어. 나만 남아 있는 이 길. 모든 게 뒤죽박죽인 기억 속에서도 나는 지토를 따라가.

시간을 살아가기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장기”란 결국 우리가 죽고 난 이후를 말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맞다. “장기적인 관점”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미래는 언제나 예측을 불허한다. 예측한 방식으로 미래가 온다면 그건 미래가 아니지. 불안을 유발해야만 미래지.

그렇지만 긴 시간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재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는 조금 덜 속상할 텐데. 하지만 현재 조급하기에 살아가는 거다. 일생을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기에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는 거다. 그 뿐이다.

어제는 즐거웠고, 오늘은 흐르고 있고, 내일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즐거운 어제는 현재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현재와 미래의 고통을 유발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제가 즐거웠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