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2008.08.20. 12:20, 아트레온 9관 11층 E-7

01
영화 보자고 불러줘서 고마워요!
아울러 논문 이야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

02
::스포일러 있을 가능성 농후::

영화는 재밌었다.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대립각. 이성이 만들어낸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각. 등등. 이런 틀을 일거에 허물려는 텍스트라니. 합리적인 판단,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들 모두 합리주의와 이성이 만들어낸 틀이다. 이런 틀이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그렇지 않은 것들이 필요하다. 이분법은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극단적인 선/정의란 것과 극단적인 악이란 것. 극도로 정제한 이성과 예측 불가능한 비이성.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고뇌하는 태도와 고뇌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 이런 대립각이 극명하다. 그리고 이들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서로 닮은꼴이란 걸 이 영화는 잘 표현한다. 그래서 난, 배트맨이나 조커가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 검사 하비 덴트가 흥미로웠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 조커가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임을 분명히 한다. 하비 덴트가 없어도 배트맨과 조커는 짝패인 걸 쉽게 알 수 있다. 조커의 말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커는 배트맨을 죽일 수 없고 배트맨은 조커를 죽일 수 없다. 서로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조커는 배트맨이 없으면 심심하고, 배트맨은 조커가 없으면 자신의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대립각이 필요하다. 배트맨이란 영웅을 위해, 브루스 웨인(배트맨)은 대립각을 지목해야 한다. 조커와 하비 덴트는 그래서 필수다. 자신의 정의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조커를(배트맨의 모습에서 미국행정부가 떠오른다), 자신이야 말로 진짜 영웅임을 웅변하기 위한 존재로 하비 덴트를.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영웅으로 만들고 자신이 살인했다고 말하도록 함으로써, “진짜 영웅”이 된다. 배트맨이 원하는 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진정성을 획득한다. 어차피 배트맨을 평가하는 이는, 고담시의 시민들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관객/독자들이니까. 배트맨이 고담시민들에게서 욕을 먹을수록, “진실”이 드러나지 않을수록 배트맨은 영웅이 된다. (이런 구성은 너무 태만한 거 아냐? 흐)

광기어린 연기를 보여준 조커나 목소리 변조하는 영웅 배트맨보다, 하비 덴트가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하비 덴트의 위치는 두 주인공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둘의 관계가 사실은 별개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후반부. 하비 덴트가 고든의 가족을 납치한 상황. 고든이 가족을 찾으러 온다. 하비 덴트는 고든을 위협하고 협박한다. 레이첼을 왜 납치했느냐고, 자신은 다 잃었다고 울분을 토한다. 배트맨과 달리 변신하지 않고,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로 고담시민의 영웅이 되려던 하비는 이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는 것 같다. 이때 하비의 얼굴은 반만 나온다. 화상을 입은 부분이 아니라 화상을 입지 않는 부분. 하비는 화상을 입고 레이첼을 잃은 후, 복수를 다짐한다. 그렇다면 화상 입은 얼굴이 복수의 모습, 화상을 입지 않은 얼굴이 선한 영웅의 모습일 테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언제나 먼저 등장하는 부분, 복수를 다짐하고 살인할 때도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나오는 부분은 화상을 입지 않은 부분이다. 화상을 입은 부분은, 이런 변화를 극명히 보여 줄 때,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각인시킬 때 주로 나온다. 한 얼굴의 두 모습이 아니라 같은 얼굴의 같은 모습이다. 선한 얼굴, 선함, 정의와 악한 얼굴, 악함, 부정의는 별개가 아니다. 언제나 동시에 존재하지만 별개라고 생각하기에, 돌연 낯설고 기괴하게 보일 뿐이다. 하비 덴트의 얼굴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서 오른쪽은 화상을 입지 않았고 왼쪽은 화상을 입었다. 이 분명한 대립으로 보이는 얼굴 모습이 기괴하기도 했다. 이질적인 얼굴이 공존해서가 아니라, 너무 분명하게 나눠서. 차라리 피카소식의 얼굴을 그리지. -_-;;
(얼굴을 비춰주는 위치도 흥미롭다. 고든과 같은 경찰이 하비 덴트 문병 갈 땐, 화상을 입지 않은 얼굴 쪽에 선다. 반면 조커가 하비 덴트에게 가서 얘기할 땐, 화상을 입은 쪽에 선다. –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 항상 이런 건 아닐 수도 있음.;;)

또 다른 장면은 거의 끝부분. 하비 덴트가 떨어진 장면. 난 그 장면을 보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떠올랐다. 왼쪽 얼굴을 위로 향하고, 팔을 약간 접은 체 펼치고 있는 모습. 죽은 인물은 배트맨도 조커도 아니라 하비 덴트이고, 죽은 모습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같다. 이분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조커와 배트맨은 죽어선 안 된다. 대신 이 둘이 사실은 별개가 아니라 공존하는 것임을 드러낸 하비 덴트가 죽을 뿐. 마치 모든 죄를 대신한다는 듯. 배트맨은 하비 덴트가 죽어서도 영웅이길 바랐기에 자신의 진실을 만든다. 그리고 하비 덴트는 영웅으로 추모된다. 고담시민은 여전히 증오나 악보다는 선을 원하는, 선한 마음이 남아있는 인물이 된다. 하비 덴트의 죽음은 모순이라고 불리는 것의 공존(이성/비이성, 선/악 등등)을 덮어버림으로써, 이분법의 틀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어쩌면 하비 덴트는 배트맨의 시나리오와는 별개로, ‘영웅’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대로는 환영받을 수 없지만, 선악이란 언제나 공존한다는 걸 드러낸 ‘영웅’. 비이성과 광기는 잠재된 내면의 폭발이 아니라, 사실은 거울에 비친 이성의 모습이란 걸 드러낸 ‘영웅’. 하지만 이런 공존이 (누구나 알지만)폭로되면 안 되며, 결국 고담시민은 선을 원한다는 환상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영웅’.

근데, 캐릭터로서 하비 덴트는 흥미롭지만, 그 배우는 쫌…. -_-;; 하비 덴트를 연기한 배우는 내가 상당히 싫어하는 스타일이고, 그 보다 더 싫어하는 스타일은 배트맨을 연기한 배우.

03
고통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조커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조커의 대사는 하나하나가 철학이다.

+
제목이 [다크 나이트]라서 “어두운 밤”인 줄 알았다. 근데 “어둠의 기사/밤의 기사”데? -_-; 큭.

산책

조금 심란하여 건물 주변을 산책했다. 그래봐야 아주 잠깐, 그저 한 바퀴 도는 정도. 나의 여행이 새벽에 떠나 오전에 돌아오는 것이듯, 산책 역시 노래 한 곡을 듣는 정도다. 그래도 바람이 선선하니 좋다. 쌀쌀하지 않으면서 덥지도 않은. 밤에 더 이상 선풍기를 켜지 않고 잠들 수 있는 걸 보면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내가 머무는 연구실이 있는 건물 앞은, 얼추 2년간 진행한 공사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새로 공사한 곳은 공사한 티가 팍팍 난다. 냄새가 다르다. 머리 아픈 냄새. 페인트를 칠한 냄새가 아니어도, 머리 아픈 냄새가 난다.

예전에 비해 걷기는 편하다. 예전엔 산책을 하기에 좋았던 것 같진 않다. 앉거나 누워 있기에 좋았다. 근데 이젠 산책하기에 좋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래, 공원으로 바뀌었다. 나무 적당히 있고 벽돌 포장 잘 되어 있고 벤치도 있고. 산책로를 만들었다. 비장애인이 걷기에 좋은. 자전거나 휠체어를 타기엔 불편한. 그곳을 잠시 산책했다. 비가 올 것 같더니 구름만 조금 있는 맑은 하늘. 저물녘의 선선한 바람.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삭막하다.

그리고… 오늘 석박사 졸업식을 하더라.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은 됐을 법한 아이가 있는 졸업생도 있었다. 예전엔 남 얘기였는데 이젠 남의 일 같지 않다. 물론 나의 일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그 모습이 내 미래의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겠구나 싶어 잠시 쳐다봤다. 아이가 있는 건 빼고. 흐흐. 모르지, 뭐. 입양을 할지. 근데 변태도 입양할 수 있나? 흐. 농담이다. 난 앞으로도 계속해서 혼자 살 거다. 이런 생활이 몸에 익었다.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근거 없는 희망과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는 생활. 서두르지 말아야지. 시간 제약이 있다고 해서 서두를 이유는 없다. 서두르면 넘어진다. 그런데도 조급한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영혼 없는 존재”

몇 달 전, 공무원시험이라도 볼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지 않게 했다. 내겐 ‘공무원시험을 준비해볼까?’ 하는 고민이라도 했다는 게 중요했다. 먹고 살기 막막함. 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은데 먹고 사는 게 너무 불안정하니 이런 고민도 했다.

특강을 나가 특강료를 받는 건 덜 부담스럽다. 주최하는 측 대부분이 돈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학교나 정당 같은 경우, 특강료에 허덕일 정도의 재정은 아니지 않나. 단체에서 불러도, 대부분은 정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불렀다. 프로젝트의 경우 이미 강사료가 책정되어 있어 부담이 덜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원고료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대부분이 자치언론이거나 재정이 열악한 곳이다. 어떤 경우엔 고료가 전혀 없기도 하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소액이나마 고료를 준다. 그리고 이런 고료를 받는 게 쉽지가 않다. 고료야 내가 부르는 게 아니라 청탁하는 곳에 주는 대로 받지만, 그래도 부담스럽다. 계좌번호를 알려주기까지 몇 번이고 고민한다. 그냥 후원할까? 하고. 이런 곳의 재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계좌번호를 보낸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ㅠ_ㅠ (물론 먹고 살아야 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이란 고민까지 해봤다.

하고많은 직종 중에서 왜 공무원이냐고?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 거 같다. 친척 중에 하위직이지만, 아무려나 공무원이 많다보니 공무원 하라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그때부터 결코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직종이 공무원이다. 공무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옛일이 떠오른 건, [시사인] 이번 호(49호)를 읽다가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구절을 봤기 때문이다. 기사는, 정권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소신도 버리고 현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을 지적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이춘발 KBS 이사는 정연주 사장 퇴임에 앞장서고 있다. 김장수는 “난 참여정부 장관이다.”며 현 정권의 국방부 장관 유임을 거절했지만,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이런 저런 인물들을 언급하며, 그 중 “영혼 없는 공무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말을 한다.

내가 공무원만은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이거였다.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이들은, 항상 당시의 정권을 지지했다. 노태우정권 땐, 선거에서 노태우를 찍었고 노태우를 지지하고. 김영삼정권 땐, 선거에서 김영삼을 찍었고 김영삼을 지지하고. 김대중정권 땐,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었고 김대중을 지지하고. 노무현정권 땐, 선거에서 노무현을 찍었고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명박정권인 지금 선거에서 이명박을 찍었다. 지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땐 이런 신분이, 이런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아니,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있는데 전혀 다른 성격의 정권을 지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공무원만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지금은 혐오스럽기보단 안쓰럽다. 공무원이란 자리가 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하자, 안쓰러웠다. 어떤 위치나 자리에 오르면, 그런 공간에 들어가면 그에 주어진 역할이 있다. 정치적 신념도 중요하지만 이런 위치, 주어진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위치에도 다른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고,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공무원노조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고, 현재 정권에서 일하지만 현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매 정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이를 비난/비판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는 조금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매 정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이들 중, 내가 아는 이들은 대체로 보수주의자이긴 했다.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했고, 기업 세습을 지지했고, 직급이 올라가면 하는 일 없어도 월급 많은 걸 당연하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조금 달리 접근해야 한다는 나의 말을, 나도 의심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개혁을 주장하는 데 넌 왜 “영혼이 없느냐?”고 묻는 건, 이걸 한 개인에게 책임 소재를 돌리는 건 문제가 있다. 물론 그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다르다는 건 분명히 하고.

아무려나 [시사인] 기사에 실린 한 구절, 공무원을 일컬어 “영혼 없는 존재”란 표현이 참 적절하구나 싶었다. 없을 수도 있고, 포기한 걸 수도 있다. 직장에 있을 때만 잠시 젖혀둔 걸 수도 있고. 아무려나 슬펐다. 공무원이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있기 마련. 그러니 자신이 누굴 찍건 직장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건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영혼이 없어야”만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라서. 공무원이란 직장을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잠시 젖혀둬야 한다는 의미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정말?) 공무원에겐, 현 정권을 지지하는 것 이외의 정치적 입장은 없다는 의미라서.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발설해선 안 된다는 의미라서. 애당초 이런 건 포기하란 의미라서.

+
그나저나, 내가 경험한 공무원 개인은 왜 그리도 거만한 걸까? 학교 교직원 중 일부는 왜 그리도 오만한 걸까? -_-;;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소리. 예전에 행정조교하던 시절과 행정기관을 이용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 그래도 오늘 학사문제 해결해준 분은 꽤나 친절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