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 소통

과신할 필요도 없지만 불신할 필요도 없지 않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근데 난 항상 과신과 불신 사이에서 갈팡질팡. 이렇게 산다. 뭔가 특별할 것도 없는 진부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갈팡질팡. 내가 무얼 하려는지 잊곤 갈피를 못 잡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찾는다. 방향을 찾는 과정은 언제나 우발적이거나 우연.

[다크 나이트] 보러 영화관에 가고 싶다. 갈 시간이 없다. 아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여유가 없다. 그냥 어느 날 밤, 훌쩍 영화관에 가면 그만인데.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혹은 지금 이 시기에 영화관에 간다는 것에 일종의 죄의식이라도 느끼는 걸까? 어떤 비난이 두려운 걸까? 근데 무슨 죄의식? 무슨 비난? 아님, 한 번 극장에 가면 앞으로도 계속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 하리란 걸 알기에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극장에 안 간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 극장이란 공간은 중독. 한 번 가면 계속 가고 싶다. 그래서 억지로 참는 걸까?

예전 같으면, 극장에 갈 법한 영화가 몇 있었는데 다 관뒀다. 회피했다. 회피하는 방식으로, 망각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던 오늘 아침, 오늘 밤엔 극장에 가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난 지금, 가서 뭐하나. … 그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래도 모나미153 볼펜을 한 통 샀다. 심만 파는 것도 한 통 샀다. 이걸 다 쓸 일은 없겠지만, 글을 쓰기엔, 꽤나 긴 글을 쓰기엔 만년필보다 모나미153 볼펜이 좋다. 편하고 부담이 없다. 한땐 모나미153 볼펜만 사용했다. 이렇게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

아침부터 신경을 썼더니 또 편두통 혹은 신경성 두통이다.

+
불안정한 삶, 불확실성, 불연속, 비일관성.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안정적이고 확실함이 있고 일관된 논리를 구사한다는 것. 좀 모순이라 느꼈다.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일치된 논리와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불일치를 설득하기 위해 논리를 구사해야 한다. 뭔가 모순이라고 느꼈다. 근데 이 둘 사이의 충돌-한 쪽은 자기의 모순 없는 표현인데 한 쪽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충돌, 간극, 균열. 이런 것이 소통 아닐는지. 얘기가 통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소통, 아닐까? 사실은 각자 자기의 얘기만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거.

근데, 내가 찾는 언어는 어느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까?

으아악.

복학신청 기간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논문학기 등록을 하려면 복학신청을 해야 한다. 근데 그 기간이 언제지? 이미 지났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으로 확인하니, 이미 지났다. 확인하는 순간, 살짝 공황상태에 빠졌다. 내가 이런 적이 있던가. 이런 일처리에서 날짜가 늦은 적이 있던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요즘 뭐하고 사나 싶었다.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정말.

안절부절, 안절부절. 더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있지만, 정말 무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예전에 메모한 목차를 보는 순간, 난 방향 없이 달려왔구나, 싶었다. 지금 나는 과도한 욕심을 내고 있는 거야. 과도한 욕심을. 지금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괜한 욕심을 부리며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있다. 이젠 포기할 건 정말로 포기할 때라고. 도대체 뭐하고 사는 거야. 그나마 목차를 확인하면서 조금 안심했지만 그래도 속상했다.

내일은 아침부터 정신없겠다.

사실 어제, 살짝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모든 걸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었다. 뭐하고 사나 싶었다. 제대로 하는 것도 없이 소문만 내고 다닐 뿐이라고, 허풍뿐이라고 느꼈다. 그냥 다 관두고 어디 도망가서 숨고 싶었다. 근데, 안다. 도망가고 싶을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걸. 도망가고 싶고 모든 걸 관두고 싶을 때가 바로 막바지에 다다른 시기란 걸. 도망가고 싶다는 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게 아니다. 단 하나 남은 길에서 머뭇거리며 회피하고 싶은 거다. 간신히 추스르고 있다.

내일은 암튼 생전 안 해본 일처리를 해야 한다. ㅠ_ㅠ

일상적인, 퀴어한

제가 팔랑귀란 걸 너무 잘 알고 계시는 이웃들. -_-;;
만행의 결과입니다. ㅠ_ㅠ

퀴어 관련 잡지에 보낸 글이라, 퀴어란 단어를 좀 많이 썼어요. 사실 이 단어를 그렇게까지 즐기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발송한 파일에선 제목도 달라요. -_-;; 원고를 쓸 때 처음 정한 제목은 이 포스팅의 제목처럼 “일상적인, 퀴어한”이에요. 그리고 이 제목이 더 좋고요. 흐. 근데 아무래도 수습이 안 되는 글이라, 수습할 수 있는 제목으로 바꿨어요. ㅠ_ㅠ

아,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나요. ;;;;;;;;;;;;;

[#M_ 굳이 읽으시려면.. | 뒷감당은 알아서 하세요. 난 몰라요. ㅠ_ㅠ.. |

아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활동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만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레즈비언 트랜스”란 걸 알고 있었다. 그와 얘기를 나눈 곳은 학교였다.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종일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머물 뿐만 아니라, 꽤나 오랜 세월을 머물고 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원치 않아도 아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아는 이들 대부분은 내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만났다. “나 트랜스예요.”, “전 루인이에요.”라고 소개한 적 없는 이들이다. 만나기 싫어도 학교 안 어딘가에서 불시에 마주치는 이들이기도 하다.

내가 “루인”인 걸 아는 이와 학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예전에 알았던 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활동 전에 알았던 이다. 인사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긴장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외면이었고, 알은 체 하지 말라는 의사표현이었다.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넘어갔다. 조금 안도했다. ‘한 고비 넘겼구나….’ 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이런 반응은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준비한 행동이다. 나를 “루인”으로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동시에 마주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봐, 늘 염려했다. 그랬기에 실제 이런 상황이 닥치자,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 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었어도 외면하고픈 사람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그간의 염려와 준비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닐 테다. 염려하고 준비하고 항상 긴장 상태로 산다고 원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염려하고 준비한 그대로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그렇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실제, 그 순간엔 화들짝 놀랐고 당황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는 점에서, 염려가 빚은 반응인 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이런 외면 혹은 회피가 “아웃팅”을 걱정해서는 아니다. 어차피 나 아닌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행여 동행이 퀴어인 걸 상대가 안다고 해서, 함께 다니는 나 역시 퀴어로 여겨질 이유는 없다. 퀴어로 여긴다고 문제될 것도 없다. “아웃팅”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퀴어인 걸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동시에 마주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더 정확하게는, 균질하지 않은 나의 역사가 신경 쓰였다. 퀴어로 말하고 다니는 현재와 그렇지 않은 과거를 동시에 만나기가 조금 두려웠다.

아마 너무도 흔할 이런 감정엔 나의 생애사가 한 몫 한다. 나를 트랜스로, 퀴어로, 레즈비언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건 고작 몇 년 전이다.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안면이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내가 퀴어란 걸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이성애 남성”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추측이다. 나 자신은 이와 관련해서 말한 적 없다. “전 이성애 비트랜스 남성이에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들은 적 없다. (자의건 타의건) 밝히지 않으면 “당연히 이성애 비트랜스”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을 뿐이다. 밝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이성애-비트랜스이다. 비이성애/트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회다. 비이성애/트랜스는 밝혀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다. 밝힌다고, 말한다고 살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적어도 나 주변엔 그런 사람들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나는 비이성애-트랜스이다. 과거의 나는, 나를 비이성애-트랜스로 설명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음이 부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를 이성애-비트랜스(남성)로 전시했다는 것도 아니다. 타인에게 나의 모든 걸 얘기할 필요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는 나를 이성애-비트랜스로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무는 나, 그들이 현재 마주하는 나는 “여전히/당연히 이성애 비트랜스 남성”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해석하는 나와 지금 내가 설명하는 나,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 불일치가 만드는 틈. 틈이 일으키는 긴장. 긴장이 유발하는 무게. 이런 무게감을 느끼는 ‘찰나’, 나는 비이성애-트랜스인 동시에 이성애-비트랜스이다.
이런 ‘찰나’, 내 몸은 ‘모순’이 경합하는 장이 된다. 난 혼자거나 익명인 곳이 편하다. 익명일 수 있는 공간은 혼자인 공간과 같다. 그런 곳에서 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날 인식할 수 있다. 나의 외모가 “부치”보다는 “남성”에 더 가깝다는 것도 모른 척 할 수 있다. 아니, 내가 트랜스이건 뭐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도대체 내가 트랜스건, 퀴어건, 레즈비언이건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나의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나는 트랜스이기보단 비트랜스로 더 잘 읽히는 몸이다. mtf보다는 ftm으로 더 잘 통한다. 나를 레즈비언이기 보다는 게이로 여기는 이들이 더 많다. 내 몸은 내가 주장하는 방식과 다른 식으로 읽힌다. 그리하여 나의 몸은, 나는, 나를 알려고 하는 이들과 있을 때 분열한다. 내 몸의 ‘배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진다.

이 ‘찰나’를 겪기 싫었다. 그리고 외면했다. “그래서” 외면한 게 아니다. 내가 외면한 건, 이 ‘찰나’가 내가 사는 일상이란 점이다. 이 ‘찰나’-즉, 내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찰나’로 부르고 싶은 것이다. 내가 “루인”인 걸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 외면하고 있는 삶의 단면이 얼굴을 들이민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고개가 돌아간 그 방면에 외면하는 삶의 단면이 있다. 이건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다. 언제나 불균질하고 “모순”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상인, 뫼비우스 띠와 같은.

매일 경험하지만, 여전히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때로 불편하다. 이런 불편이 “내가/트랜스가 경험하는 어려움”이란 뜻은 아니다. 어려움일 수도 있다. 어려움으로 한정할 수 없을 뿐이다. “불쌍”히 여기는 걸 경계한다.

이런 ‘찰나’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해짐, 낯익음이 가능하기는 한가? 변하는 삶을 어떻게 박제할 수 있겠는가. 삶은 항상 익숙한 동시에 낯설다. 모순이라고 여기는 것의 공존. 모순이 아니란 뜻이다. 이를 모순이라고 부르기에 불편함이 발생한다. 이를 모순으로 부르고 싶은 욕망, ‘찰나’로 부르고 싶은 욕망이 내게 없다는 건 아니다. 모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모순으로 느낀다. 발화와 느낌 사이의 간극.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돌린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건 외면이 아니다. 내가 비이성애-트랜스인 동시에 이성애-비트랜스로 통하는 걸 인식하는 행위다. 망각하고 싶은 삶의 모습은 외면을 통해 직면할 수 있다. 이토록 퀴어하게 평이한 삶의 모습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를 피하며 조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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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이란 웹진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었어요. -_-;; 그땐 그 글이 별로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보니 나름 괜찮더라고요. ㅡ_ㅡ;; 푸핫. ㅠㅠ 하지만 이 글은 시간이 지날 수록 외면하고 싶을 거 같아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