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갑자기 연락을 받고, 숨책에서 잠깐 알바를 했다. 알바를 겸해서 놀러 간 덕분에 평소에 찾던 책들도 몇 구했다. 가장 큰 수확이라면 [폐쇄자]를 구한 것. 오래 전부터 소장하고 싶었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기에 무척 기뻤다. 더구나 숨책은 만화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도 아니기에 기쁨이 더 컸달까. 흐. [보트 위의 세 남자]도 획득(득템! 흐흐 ;;). 이건 [카모메 식당]에 나온 소설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닌가? 헷갈린다. 암튼 지다님 서평에 따르면 재미있을 거 같다. 흐. 그 외에도 몇 권의 책을 더 샀는데 언제 읽으려나.
아참, 숨책에서 책 산 거 자랑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고.
어제 “숨”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정말 멋진 말을 들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Dis-play is (only) display.”(문법은 무시하는 센스! ㅠ_ㅠ) 정도가 되려나.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놀지 않으면 전시/과시만 한다.”란 의미. 책만 읽고 놀지도 않고 활동도 않을 때, 자신의 지식 과시만 하게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아니, “논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고민할 수 있는 계기여서 위로를 받았다는 게 더 정확하리라. 아무려나, “놀지 않으면 DISplay한다.”는 말이 참 좋았다.
[앨리스는 ~하지 않는다]Alice Doesn’t의 서문을 읽을 필요가 있었다. 책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럴 여건은 아니니, 일단 서문 정도만 읽으려고. 근데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를 읽지 않으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ㅠ_ㅠ
그래서 일전에 마틴 가드너의 주석이 달린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었다. 근데, 오오, 진작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재밌다. 재기발랄한 말장난(언어유희라고도 말하는;;)과 치밀한 구성. 루이스 캐롤을 좋아하고 때로 열광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말이지 한 구절, 한 구절을 모두 분석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가드너 역시, 상당한 양의 주석을 달았는데, 이런 주석은 읽지 않아도 무방하고 읽어도 재밌다. 대체로 이런 주석은 내용을 상상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어 피하는 것이 좋기에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다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주석은 너무 재밌다.
일테면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간 후,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어머나, 점점 더 뒤죽박죽이야! 내가 정말 유식한지 알아봐야 되겠어. 어디 보자. 4 곱하기 5는 12이고, 4 곱하기 6은 13, 그리고 4 곱하기 7은…. 안 돼! 이런 식으로 가면 20까지는 절대 도달하지 못할 거야!”(55쪽)란 말을 한다. 이런 계산 자체도 재밌지만, 주석을 보면 더 재밌다.
왜 앨리스가 20까지 도달할 수가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곱셈표는 12까지 나온다. 그러므로 만약 앨리스식의 엉터리 곱셈을 계속하다 보면, 4×5는 12, 4×6은 13, 4×7은 14, …가 되고, 4×12(앨리스가 외울 수 있는 최고의 숫자)는 19가 되어서 결국 20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된다.
A. L. 테일러는 [하얀 기사]라는 책에서 흥미롭긴 하지만 훨씬 복잡한 이론을 전재하고 있다. 18진법을 사용하는 숫자 체계에서는 4×5가 실제로 12이며, 21진법을 사용하는 숫자 체계에서는 4×6이 13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계속 진행해 보면, 언제나 기준 숫자는 3씩 늘어나고, 곱한 값은 1씩 늘어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곱한 값이 20에 도달하게 되면 처음으로 이 법칙이 깨지게 된다. 4×13은 20이 아니라(42진법을 적용했을 때) 1이 되기 때문이다. (55쪽)
루이스 캐롤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기도 하단 점에서 이 역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독해는 언제나 흥미롭다. 흐흐.
또 다른 재미라면, Alice Doesn’t의 서문에 실린 내용과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지만, 스나크가 나오는 구절들. 최근에 [스나크 사냥]을 읽어서인지, [앨리스]에서 이미 스나크가 등장하고 있다는 게 반갑고 재밌었다. 특히나 스나크snark가 shark의 h를 n으로 식자공들이 잘못 조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석은, 무척이나 재밌었다. 왠지 그럴 듯 하고. 흐흐.
책의 머리말에 나오는 구절.
그나저나, 혹시 “wed. Oct. 29, 1975 Alice doesn’t!”가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 분, 무슨 이유에서 이런 구절이 들어간 피켓을 데모에서 들었는지 알려주세요~, 라고 쓰려는데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찾았다. [Alice doesn’t live here anymore]라는 영화에서 따온 구절인 듯. 1975년 10월 29일, 여성을 착취하는 사회 구조와 노동시장에 파업을 하자고 NOW(전미여성기구)에서 제안하는데, 이 제안의 이름이 “Alice doesn’t”이다. 집 안팎에서 일을 하지 않고, 음식을 사려고 돈을 지불하지 않으며, 대중문화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미지를 지지하지 않고, 등등. 이런 일을 하기 위한 행사이름이 “Alice doesn’t”이다. (자세한 건 여기로.) 물론 책 내용은 이 행사와 직접 관련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아예 무관한 내용은 아니다.
어쨌거나 단체를 지속한다는 건 잘 한 선택이겠지? 그렇게 믿고 있어. 그래야 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좀 더 집중해서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어.
한 단체의 구성원들이 욕심을 내는 것과는 별도로, 실제 그 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그 해 할 사업을 정하고 그 사업과 관련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해도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어떤 이슈와 관련한 단체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트랜스젠더와 직접 관련 있는 단체가 하나뿐이라는 건, 혹은 단체 이름에 트랜스젠더를 걸고 있는 단체가 하나뿐이란 건 정말 말도 안 된다.
다른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운동은 무수하고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제기할 수 있는 이슈 역시 무수하다. 이건 말하나 마나인 상식. 그리고 활동가들마다 각자 좀 더 집중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활동가들이 적다는 점에서, 실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싶기 마련.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단체 이름에 반드시 트랜스젠더란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그런 운동이다. 정확하게는 젠더 표현과 관련한 운동.
내가 누구이건, 내가 트랜스젠더건 레즈비언이건 게이건 이성애자건, 나이가 몇 살이고 출신지역이나 국가가 어디건 상관없이 나의 젠더 표현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을 만드는 일. 주민등록번호가 1번이어도 치마를 입건 뭐를 입건,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건 상관없는 환경, 주민등록번호가 2번이어도 수염이 나고 바지를 입고 “남성처럼 보여도” 상관없는 환경, “여성”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활동. 그리하여 굳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지 않아도, 주민등록번호상의 성별과 자신이 표현하고 자신을 설명하는 성별과 “일치”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환경을 만드는 일. (GenderPAC과 비슷할 수도;;) 나는 이것이 트랜스젠더 운동의 주요 방향 중 하나라고 보는 한편,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하지 않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동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운동이라고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