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격자

[추격자] 2008.02.29.금 20:30 아트레온 1관 지하 3층 J-17

01
공포를 조성하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건, 아마도 이유 없음일 테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을 때, 그래서 다음 행동을 파악할 수 없고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 없을 때, 가장 무서울 테다. 근대가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얘기하며, 살인과 같은 행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재밌는 건, 살인범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알기를 바라는 건,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하는 이유 혹은 목적이다. 어떤 근거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즉 살인과 같은 행동을 합리적인 판단과 목적에 근거한 행동으로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살인은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간주된다. 이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는 합리성이나 이성이 허구라는 걸 알려주는 지표가 아닐는지. 그러니 이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합리성과 이성에의 강박이 빚어낸 효과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진술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은 안 나온다. 진술서를 작성한 형사는 범행동기를 비워두고, 상관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채우라고 답한다. 심리학자(?) 혹은 정신분석학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범인의 심리를 자극하지만, 이것이 “범행동기”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애당초 범행동기 혹은 이유나 목적은 사후에 만들어 낸 것이지, 사건 이전부터 존재했던 건 아니다.

02
작년에 읽은 영화, [디센트]는 두고두고 무서울 영화지만, 그 영화가 내가 살아가는 구체적이 장소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드물다. 이 영화는 동굴이라는 밀폐된 장소의 특징을 한껏 살리고 있는데, 나의 성격상 동굴이나 등반을 할 가능성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여 동굴탐사를 한다거나 산행을 하는 과정에 동굴 입구를 만난다면, 영화 [디센트]가 떠오를 가능성은 크다.

[추격자]를 읽을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첨엔 잘 만든 영화 정도의 정보만 있었는데, 유영철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이 영화를 읽을 가능성은 없겠구나, 했다.

영화와는 달리, 이 사건이 실제 발생한 공간엔 노고산동도 있다. 노고산동이면 이전에 살았던 집과도, 지금 살고 있는 집과도 가까운 동네. 상당히 자주 지나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어쩌자고 영화에선 사건에서 직접 언급하지 않는 동네를 배경으로 삼는데 그곳이 망원동이다. 오오, 망원동은 지렁이 활동가들 몇 명이 살고 있는 동네 언저리며 지렁이 회의를 하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엔 나오는 마을버스 9번은 망원동에 갈 때마다 이용하고. 물론 이런 일치가 사건을, 공간을 이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살고 있는 모든 공간이 범죄나 폭력이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사건의 공간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두려움을 느끼는 건 특정한 폭력만을 부각하고 다른 폭력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일치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이 영화를 읽은 영화관, 아트레온 역시 노고산동 근처다. 아마, 아트레온 앞의 대로를 건너면 노고산동이라지.)

영화와 사건 속의 공간들은 나와 무관한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바로 그 공간에서 발생한 일이란 점에서, 이 영화를 읽으러 극장에 갈까 말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했다.

03
이 영화의 감독은, 어떤 식으로 촬영할 때 공포를 조성할 수 있는지를 참 잘 안다고 느꼈다. 동시에 공포와 폭력을 어떻게 하면 미학으로 꾸밀 수 있는지도. 그래서 고민이었다. 한 편의 영화로는 무척 잘 만들었지만, 이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피해경험자들을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를 피하려는 노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한 편, 검사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풀어주는 장면은, 좀 진부했다. 이런 상황 자체가 상당히 논쟁적일뿐더러, 좀 다른 이유로 풀어주거나 실제 사건처럼 탈출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은지(김유정 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비 오는 차 안에서 우는 장면.

하지만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잔상이 강하게 남아서 잠들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어서. 일테면 죽은 자의 얼굴.

덤덤함: 인권위 사업

사업계획서를 쓰는 데 너무 많은 도움을 준 ㅅㅅ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해요. 그리고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언제 발표 하는지, 발표 결과는 어떤지 신경써준 많은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해요.

올 해 지렁이 사업을 계획하며 인권위에 사업을 하나 내기로 했다. 애초 목적은 쉼터 사업의 일환이었고, 구체적인 안건을 짜다며 교육 자료집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수정했다. 아직 외부 기금을 받는 사업을 한 적이 없어 다른 단체/개인 활동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마감 직전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가 결과가 나왔다. 선정 되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덤덤했고, 그러려니 했다. 언제 우리가 돈이 없어서 사업을 못 했나? 인권위만 돈줄이냐? 훗.

결과를 전해 듣고 안도하기도 했고, 좀 더 제약 없이 사업을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사업계획서를 쓰는 과정 자체가 무척 중요한 경험이었고, 올해 사업을 진행하면서 더 많은 고민과 좀 더 세심하고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면, 그때 사업계획서를 내는 편이 더 좋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올해 인권위 사업으로 선정되어 그 인권위가 요구하는 속도에 얽매여 움직이기 보다는, 그런 제약 없이 지렁이가 원하는 속도에 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경험도 필요하단 점에서 잘 됐단 느낌도 들었다. 발족이후 단독 사업을 진행한 일이 별로 없으니 이 기회에 중요한 경험을 쌓을 수 있으리라.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왔다.

다만, 주변의 많은 분들에겐 미안하고도 고맙다.

Cat Power [Jukebox]

총 8장의 앨범을 냈다. 그 중에 마타도어(Matador)에서 낸 앨범은 6장. 재밌는 건 마타도어에서 낸 앨범은, 첫 두 장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들로 이루어졌고, 세 번째 앨범은 커버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을 두 장 냈고, 여섯 번째 앨범은 커버 곡들로 채운 앨범이다. 마타도어에서 낸 여섯 번째 앨범이 이번에 발매한 [Jukebox]다.

사실, 첫 번째 커버 앨범인 [The Covers Record]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앨범은 아니었다. 원곡과 비교해서의 문제가 아니라, 이 앨범을 캣 파워가 직접 작곡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이라고 가정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 만큼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이 빼어나단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발매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은 우려했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새 앨범이 발매 된다는 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국내에도 수입되어서 판매하고 있는데 어찌 매장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을까(개인주문을 할까 하다가 소량이라도 수입될 거 같아 기다렸다). 행여나 가게에 가는 길에 다 팔려서 품절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다행히도 재고가 남아 있었다. 오늘 확인하니 품절로 바뀌어 있네. 내가 산 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앨범이었거나 한두 장 남은 앨범이었거나, 그랬던 거 같아. 후후.

설레는 기분으로 재생을 했는데, 아아, 이건 감동이야. 첫 곡 “New York”부터 약간의 전율이. ㅠㅠ 이전의 커버 앨범인 [The Covers Record]가 개개의 곡들이 들려주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한 장의 앨범으로 듣기엔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앨범은 정말 기획을 잘 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한 장의 앨범이라는 맥락에서 각각의 곡들을 편곡한 느낌이고. 이 느낌은 1940년대 녹음한 소울 혹은 재즈 음원을 몇 번의 작업을 통해 음원을 깔끔하게 살려낸 것만 같달까. 이런 느낌으로 녹음을 편곡하고 녹음한 거 같아. 그래서 무엇보다도 좋아.

아울러 이전 앨범에서 들려준 성격을 이 앨범에서도 이어 받고 있는 느낌이야. 자기 앨범의 연속이면서 커버 앨범이라는 성격도 같이 살리고 있는 느낌.

아, 또 한 동안 묘력만 들을 거 같아.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