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9일 대운하긴급벙개~ ‘시멘트가 희망이냐?’

시멘트가 희망이냐?

살만한 집은 어디로, 농사지을 땅은 어디로, 흐르던 물은 어디로, 아! 이 개발! 어쩌냐

4월9일, 총선, 수요일, 3시! 마로니에공원에서! 우리의 만남은~우연이 아니야~

대운하, 엄청난 개발. 즉! 미친개발. 요즘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죠? 생태파괴와 무지막지한 개발, 비정규직 양산, 자신의 땅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수몰지역이 생기고, 농사짓던 땅에서 쫓겨나려고 하는 등 많은 문제들이 튀어나오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아니, 하고 있을까요? 엄청나게 밀려드는 개발과 대운하, 4월9일 우리의 고민과 생각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벙개를 제안합니다~

“평화롭게 살았던 땅을, 집을, 물길을 왜 헤치려 할까?”
“개발은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대운하가 된다면 나에겐, 혹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올까?”

우리가 생각했던, 지금 당장 생각나는 개발과 대운하에 대한 생각들, 고민들, 미처 풀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노래로, 몸짓으로, 그 어떤 표현도 좋아요. 함께 풀어내며 가볍게 소통했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생각을 각자 자신의 생각과 연결시키며 함께 가지고 갈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4월9일은 단순하게 함께 노는 날~

꼭 대운하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아요.

평화와 개발주의는 어떻게 만나야 하지? 서로의 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지? 사소한 일상에서 생태적인 삶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까? 인권은 어쩌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오예

간식을 싸와서 함께 나눠먹고 함께 노래를 듣고, 그림을 그리며 즐겁고 편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자리, 좀 더 낭비하지 않는 만남으로, 다시 재활용할 수 있는 만남으로, 소비를 최소화하며 만나욤.

이 날의 프로그램은 3가지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운하와 그림일기, 배가 산으로 가면 무슨 일이 생기지? 그리고 그들이 개발이 아닌 모두의 개발로!!!

이 세 가지가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리고 뭔가 힘든 일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어요…) 기대는……하셔도 좋은데……..자세한건 그날 오시면 알게 되겠죠. 이 신비주의!!!

공연도 있어요. 공연하실 분도 이 날 오시면 알 수 있겠죠? 이 신비주의!!!

기대는 금물입니다! 아주, 아주, 아주~~편하게 오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추신

여러분들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립니다. 그 날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놀고 싶다! 혹은 놀자! 또는 놀게 있다~ 하시는 분들은 그 놀 것을 함께 해요잉(제발ㅠ) 뭔가 나도 하고 싶어! 하면 갖고 와서 함께 하는 거~즐겁게!!!

그럼~4월9일날 봐요.

전 사실 걱정이 많아요…
“제발 와줘요ㅠ이힝”

벌레가 나오는 꿈

가장 오래된 악몽은 아마도 3~4살 즈음에 꾼 꿈이다. 커다란 전세방에서 살던 시절. 그 방엔 벽을 대신하는 칸막이가 하나 있었고, 칸막이 너머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잘 수도 있고, 평소엔 창고처럼 사용할 수도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까지 전세로 빌렸는지, 아님 주인이 워낙 좋아 그냥 사용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은 가끔씩 혼자서 놀던 곳이었다. 보통 크기의 창문이 있고, 창을 열면 회색빛 담벼락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방은 항상 어두웠다. 하지만 이렇게 어둑한 느낌은 포근하거나 아스라한 느낌도 줬다. 그곳은 항상 저물녘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는 정도였고, 그곳이 좋았다. 그러니 그곳은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의 꿈속에선, 그곳에 세 명의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었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정적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악몽에서 괴물이나 귀신과 같은 형상이 등장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 악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건, 벌레였다. 아주 작은 벌레부터 무척 큰 벌레까지. 징그럽기 짝이 없는 벌레들이 꿈속에서 나를 좇아오면 나는 두려워 도망치곤 했다.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어쩔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잠에서 깨곤 했다. 그 느낌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생생한 느낌으로, 벌레가 나오는 징그러운 글을 한 편 썼다. 언젠가 이곳에도 쓴 거 같은데, 그 글을 쓴 이후로 벌레를 무서워했다. 그전까진 메뚜기나 여치와 같은 곤충을 줄곧 잡기도 했는데, 그 글을 쓴 이후 벌레와 곤충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악몽은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꾸었을까? 이것까진 기억이 잘 안 난다.

오랫동안 벌레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벌레가 나오는 악몽은 잊어갔다. 그저 벌레만 무서워하거나 징그러워할 뿐. 더 이상 벌레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았다.

어제 밤, 벌레가, 그것도 바퀴벌레가 나오는 꿈을 꿨다. 자고 있는 이불 바로 옆에서 벌레가 뽈뽈뽈 기어 다니는 모습을 어두운 방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벌레가 뒤집어 졌을 때 나는 끔찍해서 소리를 질렀고 당장 이 집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꿈을 꾸는 꿈이라 꿈에서 잠을 깬 건지 헷갈렸다. 눈을 뜨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옆에 벌레가 정말 있을 것만 같아서. 한동안 다시 잠들지 못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불을 켜고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눈을 감을 수 있었지만, 그 느낌만은 쉬 지울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꿈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가위 들고 달리기], 조동섭 옮김. 시공사

잠시 헷갈렸다. 이 소설의 내용이 그냥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냥 읽히는 재밌는 소설 정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무겁게 다가왔다. 가볍게 넘어갔을 때와 무겁게 다가왔을 때, 내용이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이래저래 활동을 하다보면, 개인 차원에서건 단체 차원에서건 인터뷰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장 최근에 지렁이 단체 차원에서 받은 인터뷰 요청은 “트랜스젠더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나 어쨌다나. 뭐, 이런 웃기지도 않은 기획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인터뷰가, “트랜스젠더로 살면 어떤 게 힘들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거나, “트랜스젠더는 이만큼 힘들다.”라는 답변을 기대하고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트랜스젠더라는 상황으로 경험하는 곤란함을 얘기하지 않는 건 아니다. 흔히 얘기하는 세상 사람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하는 인식들, 이렇게 둘로 분명하게 나뉜 공간들로 인해 경험하는 곤혹스러움과 갈등을 얘기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내가 의도한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트랜스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곤란함이 있다고 해서, 이 말이 이 만큼 힘들다, 트랜스로 살아가면 그 만큼 고통 받고 있다, 란 의도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트랜스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고민들이자, 부딪히는 어려움과 긴장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기자라면, “트랜스젠더들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어서 불쌍하다.”는 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경험하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얘기하기가 곤란한 건, “불쌍함”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옮긴이가 요약한 줄거리를 그대로 쓰면 “정신 질환을 앓는 시인 어머니와 그보다 더 미친 듯한 기이한 정신과 의사 가족과 함께 살면서 열세 살에 자기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어머니는 가을마다 정신병이 심해지고,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쥐가 찬장을 돌아다니는 정신과 의사의 집에서 살아간다. 학교는 그만뒀고, 13살이면 누구나 어른이기에 무슨 일을 해도 간섭하지 않기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이러한 경험은 힘들고 어려운 삶일까? 아님 내가, 이런 경험은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라고 믿고 있고, 이렇게 믿고 싶은 걸까?

작가는 자신의 지난 과거를 특별히 힘들고도 어려웠던 시절로 쓰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읽는 나는 이런 과거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용기”있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작가의 과거를 가볍게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나의 강박.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과는 별도로, 과거를 대면하는 작가의 용기가 대단했다. 그 과거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과거를 대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조도 무척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