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가위 들고 달리기], 조동섭 옮김. 시공사

잠시 헷갈렸다. 이 소설의 내용이 그냥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냥 읽히는 재밌는 소설 정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무겁게 다가왔다. 가볍게 넘어갔을 때와 무겁게 다가왔을 때, 내용이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이래저래 활동을 하다보면, 개인 차원에서건 단체 차원에서건 인터뷰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장 최근에 지렁이 단체 차원에서 받은 인터뷰 요청은 “트랜스젠더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나 어쨌다나. 뭐, 이런 웃기지도 않은 기획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인터뷰가, “트랜스젠더로 살면 어떤 게 힘들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거나, “트랜스젠더는 이만큼 힘들다.”라는 답변을 기대하고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물론 이런 질문에 트랜스젠더라는 상황으로 경험하는 곤란함을 얘기하지 않는 건 아니다. 흔히 얘기하는 세상 사람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하는 인식들, 이렇게 둘로 분명하게 나뉜 공간들로 인해 경험하는 곤혹스러움과 갈등을 얘기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내가 의도한대로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트랜스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곤란함이 있다고 해서, 이 말이 이 만큼 힘들다, 트랜스로 살아가면 그 만큼 고통 받고 있다, 란 의도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트랜스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고민들이자, 부딪히는 어려움과 긴장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기자라면, “트랜스젠더들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고 있어서 불쌍하다.”는 투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살면서 경험하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얘기하기가 곤란한 건, “불쌍함”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옮긴이가 요약한 줄거리를 그대로 쓰면 “정신 질환을 앓는 시인 어머니와 그보다 더 미친 듯한 기이한 정신과 의사 가족과 함께 살면서 열세 살에 자기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어머니는 가을마다 정신병이 심해지고,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쥐가 찬장을 돌아다니는 정신과 의사의 집에서 살아간다. 학교는 그만뒀고, 13살이면 누구나 어른이기에 무슨 일을 해도 간섭하지 않기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이러한 경험은 힘들고 어려운 삶일까? 아님 내가, 이런 경험은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라고 믿고 있고, 이렇게 믿고 싶은 걸까?

작가는 자신의 지난 과거를 특별히 힘들고도 어려웠던 시절로 쓰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읽는 나는 이런 과거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용기”있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작가의 과거를 가볍게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나의 강박.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과는 별도로, 과거를 대면하는 작가의 용기가 대단했다. 그 과거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과거를 대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조도 무척 좋았고.

10 thoughts on “[가위 들고 달리기]

  1. 버겁지 않은 인간의 삶이 어디 있나요 뭐.
    작가는 누구나 자기 과거와 경험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라고 하던데.. 어떤 어조일지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어요. (아 언제….!!)

    1. 그러게요. 삶이 좀 덜 버거우면 좋을 텐데요..
      조만간에 책을 읽을 시간이 나길 바랄게요! 헤헤

  2. 엄살쟁이인 저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과거 뿐이에요. 문제는 미래가 더 무섭다는 것. (잠이나 자자 -_-)

  3. 타인이 바라보기에는 ‘특정한 상황’이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 보이는 데 정작, 자신에게 있어서는 ‘타인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여기는 것’에 의해 힘들어요.
    왠지.. 어떤 기억이 떠오르네요.

  4. 저번에 예슬혜진이 장례식 때, 기자들이 같은 반 애들한테 너는 왜 안 우냐고, 안 슬프냐고 다그쳤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요.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남의 기분까지 끼워맞추려 하는 거 같아요. 기자들은 그게 특히 심한 거 같고요. -_-

    1. 기자들은 참… 어떻게든 그림을 만들려고 애쓰는 걸 볼 때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날 때가 있어여. 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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