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불완전성

레베카 골드스타인 [불완전성: 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고중숙 옮김, 서울: 승산, 2007

01

괴델의 정리라 함은 일반적으로 다음 사실을 뜻한다.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에나 결정불능의 식, 곧 그 자체는 물론 그 부정도 증명할 수 없는 식이 존재한다. (이 명제를 때로 괴델의 제1정리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따름정리가 나온다. (때로 이 따름정리는 괴델의 정리라고 부르며, 괴델의 제2정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26쪽)

이것은 한 철학사전에서 괴델의 정리를 설명한 글을 저자가 인용한 구절이다. 더 간단하고도 무식하게 말하면, 모순이 없는 체계 내에선 참일 때에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들이 있고, 어떤 체계는 그 자체의 체계를 통해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얘기다. 슬쩍 바꿔 말하면, 특정한 인식이나 통념으로는 그 통념이 올바른지, 적절한지, 문제가 없는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를 나는 어떤 식으로 해석했냐면

우리의 형식적인 사고체계에도 불완전성이 필연적이란 사실은 어떤 체계가 안주할 확고부동한 근거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확실하여 어떤 개정 가능성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진리들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만들어진 것들이다. 실제로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 자체도 사회적으로 구축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기능은 진리에 근거해 있지 않다. 오히려 진리라는 관념 전체가 우리의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중략…) 이런 점에서 인식론은 권력의 사회학에 지나지 않는다. 괴델 논리의 포스트모던적 버전은 대략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28쪽)

직접 쓰지 않고 이렇게 인용한 건, 나 역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거의 이런 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 괴델은 저자가 정의하는 방식으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델은 저 너머 어딘가에 수학자들이 발견해야 할 진리가 있고, 세상은 절대적인 논리로 구축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신념의 연장에서 불완전성 정리가 등장한다. 불완전성 정리를 이 책의 저자 방식으로 간략하게 해제하면

만일 어떤 계가 무모순이면 그 안에서 표현이 가능한 참이면서 증명불능인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불완전성정리이다. (…중략…) 어떤 형식체계는 무모순이거나 불완전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중략…) 산술을 품을 정도로 풍부한 체계는 무모순이면서 완전할 수 없다. (185)

괴델의 논리가 등장하기 직전 시대는, 수학은 직관 없이 오직 형식적 논리를 통해 완전한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증명할 수 없는 건 없다고 믿었다. 괴델의 증명은 바로 이런 믿음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든 증명이다. 그렇다고 괴델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고 주장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괴델은 모든 것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근거가 있다고 믿었다.

02
괴델을 처음 만난 게 고등학생 시절이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 처음으로 괴델에게 빠졌고, 아마 한국에서 출간한 괴델 관련 서적은 다 사서 읽은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괴델은, 어렵다. ㅠ_ㅠ 그럼에도 매력적인 건, 비록 괴델의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상상력을 펼친다고 해도, 많은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토록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괴델의 삶과 증명을 꽤나 알기 쉽게 풀어놓고 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어렵다. ㅠ_ㅠ)

물론, 그의 삶이 매력적인 만큼이나 화나는 상황들도 많지만.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단체 이름을 바꿨어요.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Korean Transgender Activist Group)로. 지난 2월 9일 총회에서 결의하고 2월 11일 세무서 등록도 마쳤어요. 아울러 단체 성격도 바뀌었어요. 기존의 애매하던 회원단체에서 활동가 단체로요. 🙂

빚잔치, 대운하 건설

다른 목적으로 썼다가, 아무래도 그 공간에 적절하지 않아 폐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 자체가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남겨둔다는 의미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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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누군가와 전화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고향처럼 지내던 동네(모계혈족과 부계혈족 모두가 이 동네 언저리에 살았고, 살고 있다)가 경부대운하를 건설하면 파헤쳐질 수 있다는 말. 이 말을 듣는 순간, 다소 막연한 질감이었고, 환경파괴를 반대한다는 다소 막연한 논리로 반대했던 대운하건설이 아주 구체적인 질감과 장소로 다가왔다.

대선 당시 2MB를 반대한 이유가, 747과 같은 성장 중심의 공약, LGBTQ, 장애인, 노동자 등을 향한 혐오 발화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운하건설 때문이기도 했다. 나의 채식이 반드시 환경과 관련 있는 건 아니지만 무관한 것만은 아니고, 내가 처음으로 CMS 후원회원으로 가입한 곳은 환경단체였다. 이런 개인적인 맥락에서 LGBTQ 이슈들만큼이나, 환경 이슈 역시 내겐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른 활동을 다 접고 대운하건설반대운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

고향처럼 여기는 그 동네가, 현재 신공단조성 예정지인 동시에 경부대운하 건설에 따른 개발예정지란 말을 듣고 상당히 먹먹했고, 분노의 질감은 더욱더 두터워졌다. 헌데 이 말을 전해준 사람, 그 사람이 전해준 그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대운하건설 반대가 아니라 찬성이자 환영이었다. 그 사람은 ㅎㄴㄹ당 지지자이자, 이번 대선에서 2MB를 찍었지만, 이 사람의 이런 정치적 성향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맥락들이 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부산은, 지리적으로 강서지역과 강동지역의 상황이 너무 달라, 다른 도시인가 싶을 정도다. 강동지역이 도시라는 공간으로서의 특징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공장이 밀집해 있기도 하다면, 강서 지역은 시골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하고 농사를 짓는 땅이 대부분이다(물론 이건 몇 년 전의 지식이라, 현재는 상당히 변했을 수도 있다). 강서지역은 오랫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있기도 했다. 최근에야 사는 집 건물들을 개보수하거나 기존의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가능했고. 그래서 몇 년 전에도 “뒷간”이라 불리는 이미지에 적합한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도 있었다.

다른 한 편,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나이는 대체로 50~60대 즈음인데, 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았던 건 아니다. 이들의 부모세대들이 거의 다 죽은 현시점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얼추 10년 전 즈음, 쓰레기매립지가 들어서면서 보상금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그 동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쓰레기매립장이 바로 옆인데 그곳에 살기 시작했다고? 뭔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그 동네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을 땐 격렬한 반대가 있었고, 그래서 공공건물에 방화를 할 정도로 시위의 수위가 상당했다. 반대 이유는 쓰레기매립장이 “혐오시설”이란 점, 환경파괴란 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는 산에 조상들의 묘가 있는 있다는 점 등이었다. 하지만 정작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선 이후엔 분위가 바뀌었다. 쓰레기매립장은 있지만, 우선 냄새가 심하게 나진 않았고, 매립장 건립에 따른 각종 개발들과 함께 매달 나오는 보상금이 적지 않았다. 얼추 10년 전이면 IMF가 터졌을 때란 점 역시, 상당히 중요하다. IMF로 부산의 도심지에서 일하던 사람들 상당수가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해야 했고, 얼추 40대 즈음의 나이였기에 새로 취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 이상 매달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생활비가 없는 상황, 아울러 많은 이들이 적잖은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매달 꾸준히 나오는 보상금은 매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신공단조성이란 소식, 경부대운하건설이란 소식은 일종의 ‘희소식’인 셈이다. 쓰레기매립장을 반대하던 이유 중 하나인 조상들의 묘는, 화장장으로 이장하면 된다는 반응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화장이 더 이상 “불효”나 “못 할 짓”이 아니란 인식, 화장장에 모시면 훨씬 편하다는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는 현재 분위기와 맞물린다. 이제 사람들의 반응은 기존의 집을 좀 더 값나가게 개보수하고,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보상금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기에, 경부대운하가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하며 싫어하지 않는 반응에 갑갑하면서도 어떤 식의 개입도 하기가 힘들었다. 당장 올 연말부터 집이 뜯겨 나갈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아쉬움이 표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딱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 분위기를 감지하며 기분은 정말 복잡했다. IMF 이후 빚잔치와 실직이 일상인 상황에서, 이런 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러울 수 있고, 이것을 단순히 ‘돈이면 다 된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경부대운하건설이 환경파괴이기에 반대해야지 않겠느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운하건설이 장기적으로 이들의 삶에, ‘우리’들의 삶에 상당히 악영향을 끼칠 거란 건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당장 빚잔치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환경보호라는 논리는 공염불로 느껴질 수도 있다. 행여나 이들이 반대시위를 한다고 해도, 그 이면엔 반대 시위를 통해 보상금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고.

물론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찬성한다는 건 아니다. 그 동네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만나 의견을 물은 건 아니니까. 아울러 그 동네에서도 찬반논쟁이 뜨거운데, 내게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찬성하는 사람이라 내가 이렇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건 찬성을 하는 이들을 간단하게 ‘돈독에 올랐고 환경보호와 관련한 의식이 없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과 같은 반응은 과연 그 동네에서만의 일일까? 대운하를 건설할 예정인 지역의 상당 부분에서 그 동네와 같은 반응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이 대운하건설을 반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선 어떤 논리가 가능할까? 나는 대운하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에 어떤 형태로건 참여하겠지만, 그 동네에 사는 이들을 어떤 식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당위로 움직이는 건 독재만큼이나 위험하다. 아울러 환경보호가 모든 사람들에게 당위이지도 않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느니, 조상의 묘를 보존해야 한다는 식의 지극이 보수적인 논리 말고, 상당한 빚을 지고 살아가며 보상금이 아니면 생계비가 막막한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논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운동가들, 활동가들의 논리 말고,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운하건설반대 시위를 주도할 수 있는 논리나 모델은 어떤 것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