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단상

이사를 갈까, 잠시 고민했다. 주인집에서 계속 살 것이냐 이사를 갈 것이냐고 물어보는 폼이 이사를 종용하는 느낌이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며 학교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2시간은 더 걸리는 곳이 떠올랐다. 몇 달 전부터 방 한 칸 줄 테니 들어와서 살려면 살라는 제안을 받은 터라, 진지하게 고민했다. 집주인이 저런 식으로 눈치를 주면 이런 고민을 아니 할 수 없다.

학교에서 2시간 거리라.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어차피 내년부턴 수업을 들을 일도 없고 행정조교업무를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학교에 매일 나올 필요가 없다. 학교에 매일 나올 필요가 없다는 건 그냥 집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조용히 책만 읽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 진다는 걸 의미한다. 지하철만 얼추 1시간 30분 정도를 타야 하는 거리인데, 지하철을 타고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도 별로 없다. 더구나! 버스를 어느 정도 타야하는 거리를, 자전거를 배워서 타고 다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이런 여러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망설인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우선은, 들어와서 살려면 들어오라고 했던 그 사람은 내 몸 하나만 달랑 들어가는 것을 상상했지, 내게 딸려 있는 여러 짐들은 잊고 있었다. 짐이 좀 많은 걸 깨달은 그 사람은, 곧 다시 생각하자고 했다. 흐흐. 마찬가지로, 벌써 몇 년을 혼자 살아온 루인의 입장에서도 다른 사람과 사는 것이 편할 리 없다. 더구나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선 혼자 살아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사를 망설인 이유는 활동 때문이다. 올 연말부터 시작해서 내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활동 계획들, 하기로 한 활동들, 이런 저런 계획들이 있는데, 이동하는 시간만 2시간인 곳으로 이사를 하면 참 많이 버겁겠다 싶었다. 지금 사는 곳에선 새벽까지 회의를 해도 택시비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진 않고(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동하기도 용이한데, 이사를 한다면, 이동하는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고 시간 제약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 그냥 계속 사는 게 좋을지 근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게 좋을 지. 일단은 30일을 넘기고 고민하자. -_-;;;

후일담

불러만 주시면 어디든 간다는 루인의 태도에 따라, 얼추 한 달 전에 청탁 받은 강연회(QUEER UNIVERSITY)에 어제 갔다 왔다. 간단한 느낌이라면, 서울대는 접근하기가 참 힘들구나(교통편의 측면에서)와 강연회 자리 자체는 무척 즐거웠다, 랄까.

첨엔 연세대에서 한다고 했다가 갑작스레 서울대로 바뀌었다고 했다. 서울대엔 생전 처음 가는데, 교통편을 한 번에 두 종류 이상 이용할 일이 없었던 루인으로선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야지만 갈 수 있는 학교란 사실 자체에 놀랐다. 더구나 말로만 듣던 학내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학교를 직접 접하다니, 오오 놀라워라. 얼추 10분 안에 어떤 강의실로도 이동이 가능하다고 얘기하는(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나온 말) 학교를 다니고 있는 루인으로선, 버스정류장이 있는 학교에 가보니 신기했다. 행사가 있는 바로 그 건물 앞에서 그 건물이 어디있냐고 묻는 일은 이번에도 여전했고. 흐흐흐.

어떤 얘기를 할지, 청탁을 받은 이후로 내내 고민을 했지만, 수위를 맞추고 내용을 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날, ㅊㅇ님께 조언을 구했고, 덕분에 강연준비를 하는 일이 좀 수월했다. (고마워요!!!) 그래서 적당히 수위를 맞추고 출발하기 몇 시간 전에 별도의 강의록을 만들었는데(배포용은 아니었고), 아뿔싸, 정작 행사 장소에 가니, “망했다”라는 느낌이 들더라는. 이미 트랜스젠더 운동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거의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동아리에서 트랜스젠더가 있는 이들도 있고. 이럴 때 어떤 식으로 수위를 맞출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전혀 모를 수도 있는 이들과, 이미 어느 정도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 모두가 지루하지 않는 방식을 고심하다가) 그냥 멋대로 했다ㅡ_ㅡ;;; 흐흐. 단, 예전에 제대로 망했던 강의가 끝나고 초대한 선생님의 지적을 유의하며, 구체적인 고민들을 중심으로 풀어갔다.

자리가 즐거웠던 건, 다행히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적지 않은 고민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의에 갈 때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건데, 어젠 계속해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다만, 개인적으론 무척 즐거웠는데, 그곳에 참가한 분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자리가 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은 있다. 비가 오고 접근성이 수월한 곳도 아닌 곳에서 하는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가 아니고 뭔가 고민을 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건 중요하니까. 강의를 듣는 내내, ‘시간 낭비다’란 느낌을 준다면 만행이지.

아울러, 서울대로 가는 지하철에서 리타 펠스키의 글(“Fin de siècle, Fin de sexe: Transsexuality, Postmodernism, and the Death of History”)을 읽었는데,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도 언젠가 오겠지, 하는 욕심이 생겼다. 열심히 준비해야지.

+당연히 무료강연회일 줄 알았는데, 강연료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책임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USB메모리(2G) 용량이 부족하여;;; 어제 새로운 제품(4G)을 하나 샀다. 그리고 암호화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자료를 모두 옮겼다. 기존의 USB에 있던 자료들은 (직접 쓴 글을 제외하고)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오늘, 새로 산 USB를 포트에 꽂는데, 저장한 파일들이 다 깨져있는 것이다…!!!!!!!!!

하지만 판매처 홈페이지엔 붉고도 두꺼운 글씨체로 적어뒀다. “데이터 손상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전화를 했지만, 일단 제품을 보내주면 확인해본다는 말과 함께, “데이터 손상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란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 자료들이 어떤 자료냐면,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모아둔 논문과 이미지들. 관심이 있는 영역이라 모은 것도 있지만, 이 자료들의 상당수는 석사학위논문에 사용하려고 오랜 시간을 들여 모은 것들이다. 그러니 석사논문에 사용할 자료들이 죄다 날아갔다는 의미.

어허허허허허. 웃음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