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다방과 니나 신보

오랜 만에 음악다방에 가서, 답글도 달고-_-;;(거의 한 달 동안 답글을 안 달고 있었다는 ;;;;) 새로 음악도 올렸다. 우헤헤. 다시 활발한 다방이 되기를 바라면서.

지난 주에 개인주문해서 받은 니나 나스타샤(Nina Nastasia)의 새 앨범, [You Follow Me]를 들으면서, 흑흑.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만족을 줘서, 듣는 입장에선 행복하다. 요즘 매일 이 앨범만 듣다시피 하고 있다. 조만간에 다방에… 흐흐.

아무튼 이 글의 핵심은 니나 신보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거. 히힛.

온다 리쿠, [구형의 계절]: 젠더는 소문이다

읽은 걸로는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소설이자, 온다 리쿠의 작품 출판 순서상으론 두 번째 소설인 [구형의 계절]은, 첫 번째 소설인 [여섯 번째 사요코]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하면서 환상소설의 형식으로 전개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청춘성장소설 정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읽은 세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10대며 학교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근데 다른 작품들 상당수도 그렇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세 작품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이런 선택은 꽤나 적확하다고 느꼈다.

“현실”과 “환상”이란 모호한 경계를 타고 있는 작품들은, “현실”이 “환상”보다 더 “환상”적이고,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임을 (조금은 서툴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선 어떤 “현실”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이런 선택이 성공적인 것도 아니고, 남겨진 “현실” 공간은 더 “환상”적인 곳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실”이라고, 돌아와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곳이 “환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시기로 불리는 청소년기 혹은 10대 시기와 잘 어울린다. 10대만이 질풍노도의 시기이고, 20대가 되면 안정을 찾는다거나, 10대가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사회가 이런 식으로 10대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소설의 이야기 및 형식과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번역자는 이 소설을 장르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장르구분과 그런 경계를 무시하거나 흐리는 작품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고.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 장르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누가, 어떤 작품이 그렇지 않겠냐 만은.)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10대 성장물이거나, 추리소설형식과 환상소설형식 등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문과 젠더에 관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요 소재는 소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이렇게 전해들은 소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되는 소문과, 소문을 믿으며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과, 소문(이럴 때 소문은 소원/바람이기도 하다)이 정말 이루어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소문을 전파하는 사람들(출처 혹은 내막을 밝히는 부분에선 아쉬웠지만, 이 역시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끼진 않았다). 이 소설을 소문이라는 측면에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소문을 전파하는 혹은 수용하는 방식이 성별(“남성”과 “여성”)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를 또한 분명하게 얘기한다. 일테면, (소설을 읽어야만 내용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겠지만 :P) “5월 17일에 오는 사람”을 “남학생”들은 침략자, 그래서 몰살하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데리러 오는 사람으로 수용하고 전파한다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분석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온다 리쿠는 이런 식의 말들을 고스란히 차용해서 소설을 진행하지만, 바로 이런 식의 설명에 따라 성별이 모호해지는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이런 언설 자체에 균열이 발생한다. 주인공 격(이 소설에서 분명한 주인공은 없지만)인 미노리가 그렇다. 여학교를 다니는 미노리는, “남학생”과 대화를 하는 상황에선 “여학생”이라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학생”들과 있을 때면 “여학생들은 저렇다니까”란 식으로 자신을 “여학생”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미노리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읽기에 따라선 “여학생/여성”이나 “남학생/남성”이란 식의 구분으로 자신을 얘기하지 않음을(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 없음) 의미한다. 동시에, “여학생은 이러이러하고 남학생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말들은 규범적인/관념적인 말일 뿐이란 걸 의미한다. 미노리가 가장 친한 친구와 싸우는 장면에서, 같은 반 친구들은 놀라며 말리는 척 하다간, 교실 문을 닫고 싸움이 중단되지 않길 바라고 누가 이길지 내기 하는데, 이는 성별에 따른 편견에 기대어 소설을 진행하는 동시에 균열을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말들이 만들어낸 성별역할 혹은 성별에 따른 어떤 성격은, 이 소설의 주요 소재인 소문과 겹치면서, 사실상 “여성은 이러이러하고 남성은 저러저러하다”란 식의 언설들이, 소문처럼 출처도 없고 원본도 없으며, 반복해서 말하는(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 믿음임을 얘기한다. 소문이란 게, 원본이나 원형, 출처를 찾기가 힘들고 사실상 그런 것이 없듯, 그저 돌고 도는 말을 통해 진실인 것처럼 여기듯, 젠더 역시 이러하다. 그래서 (최근에 읽은 한 논문의 논리를 슬쩍 빌리자면) “소문은 젠더와 같다/젠더는 소문과 같다”란 비유는, “젠더는 소문이다”란 직유법으로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루인의 많은 독후감이 그러하듯, 이런 감상 역시, 엄청난 “오독”일 수도 있지만-_-;;,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젠더는 소문이다”란 문장이 떠오른 건 사실.

퀴어, queer, LGBT

#1
며칠 전 오후에 있었던 일. 마침 지지(mp3p)를 듣지 않고 있던 중에, 사무실 밖에서 들려온 대화. (2명의 목소리였다.)
“퀴어문화축제네?”
“이미 지난 건데.”
“아쉬운데.”

#2
어제 저녁 6시 즈음 사무실 밖에서 들려온 말. (3~4명 정도 되는 듯.)
“퀴어? 기묘한, 괴상한, 그런 뜻 아닌가?”
“퀴어가 뭔지는 모르지만 알 것 같아.”
(웃음.)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
“퀴어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퀴어영화하면, 동성애자들이 나오는 영화잖아.”

예전 사무실의 위치는, 공부하거나 숨어 지내기엔 좋은 곳이었다.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와 사무실이나 연구실, 교수실이 있는 복도가 따로 있었고, 그래서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대학원생들이거나 연구원, 교수들이었다. 학부생이 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봐야 수업출결 문제로 수업조교를 찾아올 때가 전부였다. 그래서 사무실 문 앞에 붙인 두 장의 포스터와 무지개 깃발이 노출되는 빈도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이사한 사무실의 위치는 수업강의실이 있는 곳이다. 이 건물 역시 사무실, 연구실, 교수실이 있는 복도와 강의실이 있는 복도가 나눠져 있긴 하지만, 일부 연구실이나 교수실은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에 있고, 여성학과 연구실 및 사무실도 수업강의실이 있는 복도에 있다.

이 공간에 이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짐 정리가 아니라 문에 두 장의 포스터를 붙이는 것. 지난번과 비슷한 방식으로 포스터를 붙이고 무지개 깃발을 붙이며 좋아했지만, 내심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지난번엔 그래도 어느 정도 구석진 곳이었다면 이번엔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그래서 수업을 위해 복도를 돌아다니다보면 우연이라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기에, 소위 말하는 혐오폭력을 살짝 걱정했다. 물론 학교공간이란 점에서 사무실이나 사무실에 거주하는 이들을 향한 혐오범죄가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하는 황당한 믿음으로 ‘안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슬쩍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포스터를 붙이며 좋아했던 건, 스스로의 즐거움과 함께, 관련 고민을 하는 이들, 정체화하고 있는 이들이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이라도 이 포스터를 보면 슬쩍 웃음이 나거나 힘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다(혼자만의 망상일 가능성이 크지만 ;;;).

이런 걱정과 바람을,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 얘기했을 때 그는 “페미니스트는 모두 레즈비언이다”란 ‘무식’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다고 지적했다. 그제야 깨달은 이 지적으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을 페미니스트이자 이성애자로 얘기한 그 사람은, 종종 사람들이 자신에게 “페미니스트는 다 레즈비언 아니냐”고 얘기할 때마다 흥분하면서 그렇지 않음을 역설해야 하는 문제를 얘기하곤 했다. “페미니스트는 다 레즈비언이다”란 말 자체가 가지는 문제는 별도로 하고,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지나치게 “아님”을 강조하는 그 사람의 반응이 은근슬쩍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으로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 말이 사무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이 이렇다는 건 아닌데, 그는 “페미니스트는 모두 레즈비언이다”란 말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지낸지 여러 시간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어서 첨엔 사무실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포스터 자체를 안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은지, 루인의 지도교수인, 선생님이 말해주길,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포스터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어제 저녁, 퀴어를 곧 동성애로 간주하는 얘기를 들으며(방음이 안 되기 때문에 문 밖에서 조금만 크게 얘기해도 사무실에선 거의 다 들린다), 곧장 두 가지 반응이 떠올랐다. 한편으론,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선, “퀴어가 곧 동성애는 아니거든요. 때에 따라선 전혀 별개일 수도 있거든요!”라고 버럭하고 싶었고-_-;;;, 흐흐, 다른 한 편으론 사람들의 무반응엔 “This Is Queer”라는 구절의 “퀴어”란 말,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Sexual”이란 말 자체를 모를 수도 있겠구나, 였다.

그러고 보면 지렁이 활동을 시작하던 초기, 언론이든 다른 어느 곳이든 트랜스젠더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듣기에 따라선 아무런 고민 없이 작성한 것만 같은 질문)들이 반복될 때마다 살짝 짜증이 나곤 했다. 솔직히 이 정도의 질문은, 인터넷으로 기사검색만 해도 상당수의 질문자들이 요구하는 수준에선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니까. 특히나 언론의 경우엔, “이 만큼 힘들게 살고 있다”를 전시할 것을 요구하지, 질문 자체를 바꾸길 바라진 않는 경향이 있으니까(이건 기자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짜증”이 루인의 어리석음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언론에서 아무리 많은 기사가 나와도, 하리수가 아무리 유명해도, “하리수” 이상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트랜스젠더란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트랜스젠더란 말과 “하리수”를 연결시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동시에 LGBT나 퀴어가 존재하긴 하지만,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뿐,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 같이 머무는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포스터의 의미를 모를 수도 있고.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럼, “그 글”을 다시 수정해야 할까?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