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미녀는 괴로워, 트랜스젠더

01
필수 한 과목에 선택 두 과목(인문학+사회학)으로, 총 세 과목의 종시과목 중, 인문학으로 선택한 과목은 당연히 루인의 지도교수에게서 들은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두 문제를 출제했는데, 하나는 페미니즘 문학 비평사를 개괄하는 것으로, 영미페미니즘 논의와 프랑스 페미니즘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별 작품을 분석하는 것. 두 번째 문제의 작품들은, 루인이 직접 선택하고 선생님께 승인받는(괜찮은지 안 괜찮은지의 여부) 걸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쟈넷 윈터슨의 [육체에 새겨지다]였다.

의도하지 않게 세 작품 모두 영국출신의 작가들이었고, 그 중 윈터슨은 다른 작품을 선생님 수업시간에 다룬 적이 있고, 울프는 직간접적으로 수업 내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가였고, 매리 셸리는, 뒤늦게 깨달았는데, 선생님의 전공인 낭만주의 작가였다. -_-;; 아무려나 각각의 작품에서 젠더수행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을 했고, [프랑켄슈타인]은 트랜스젠더 혹은 신체변형/외과수술을 통해 구성한 몸이란 주제로 접근했다.

02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의 전신성형을 집도한 의사, 이공학은 아내와 잠자리에 드는 걸 두려워하는 인물로 나온다. 아내 역시, 한나처럼, 이공학에게서 전신성형수술을 받았고, 바로 이런 이유, 즉 전신성형수술을 한 몸이란 이유로 이공학은 아내와 접촉하는 걸 무척 두려워한다. 성형수술의사이지만 성형한 몸-외과적으로 구성한 몸을 두려워하거나 끔찍하게 여기는 셈이다. 신체변형과 관련한 두려움은 역사적으로 오래되었지만, 특히나 근대에 들어 사회에 적합한 노동하는 몸을 만들면서 신체를 훼손하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되고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 신체훼손이나 자해는 정신병 진단목록에 올라 있고,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의 상당 부분도 이러한 신체변형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런 혐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꼭 수술을 해야 하나요?”, “왜 멀쩡한(건강한) 몸을 바꾸느냐”와 같은 말들에서 읽을 수 있다. 인터넷리플을 통해 드러나는 하리수를 향한 혐오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고.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물/괴물을 향한 공포와 혐오 역시 이러한 맥락에 있다고 느꼈다. 셸리가 이 소설을 쓴 시기는 근대합리성과 이성중심주의, 동시에 낭만주의가 공존하던 시기였고, 창조물/괴물은 여기저기서 모은 재료로 덕지덕지 “땜질”해서 만든/구성한 존재이다. 이렇게 외과적으로 구성한 몸이란 것,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몸이라는 인식이 창조물/괴물을 공포로 여기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을 “공포”소설로 부른다면, “공포”가 발생하는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창조물/괴물의 탄생 배경일 거라고.

03
종시를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깨닫고 감동한 구절은, 다름 아니라, 창조물/괴물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단 한 가지는 “행복”이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행복해지기 위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의 파트너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그저 행복해지길 바랐을 뿐이지만, 이런 바람이 창조물/괴물에겐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슬펐다.

04
선생님과 구술시험을 보다가 배운 것 하나.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면에서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시,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와 닮았다고 한다. 콜리지 시의 내용을 인용/차용하고 있기도 하단다. 그래서 현재 복사한 상태. 언젠간 읽겠지. 흐흐.

다시 블로깅을

참으로 호들갑스레 준비한 종합시험은 무사히 끝났어요. 세 과목 중 한 과목은 12월 초 즈음에 보기로 했으니 이번엔 두 과목을 봤어요. 첨엔 월요일에 끝나는 줄 알았는데, 레폿을 제출하는 과목은 레폿 제출 후 구술시험도 봐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는-_-;; 아무려나 당장 보기로 한 종시 두 과목이 끝나서 한숨 돌리고 있죠. 뭐, 종시는 합격하기보다 떨어지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만요. 크크크 ;;;

이제 시간이 생겼에음도 블로그에 글을 잘 안 쓰고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한동안 블로깅을 안 하다보니, 안 하는 습관에 탄력이 붙어서라는…ㅡ_ㅡ;; 흐흐. 하지만 쓰고 싶은 글들도 있고, 이곳을 떠날 수도 없으니 곧 다시 활발한 블로깅을!

손글씨, 만년필, 종이책

며칠 전 늦은 밤, 자잘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는 정리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어딘가에 있을 건데, 하는 기대와, 꼭 있어야 하는데, 하는 바람이 뒤섞인 행동이었다. 다행이도, 예상했던 곳에 있었다. 우헤헤. 좋아라~ 웃으면서 수도를 틀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 있을 흔적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올란도]를 읽다가, 올란도가 글을 쓰는 장면들에서 단어 하나가 걸렸다. 아아, 저렇게 글을 쓸 때가 있었는데, 하는 중얼거림과 기묘한 허영이 동시에 생겼다. 대충 1585년부터 1928년까지 살았던 올란도가 사용할 수 있는 글쓰기 도구는 하나, 만년필! [올란도]를 읽던 날 밤, 만년필을 찾았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 있는 잉크를 씻어냈다.

중학생 시절이었나. 김소운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수필집에서 만년필과 관련한 글을 읽었다. 내용은 짐작 가능한 그대로인데, 좋은 만년필을 쓰면 글이 더 잘 써지는 것 같다느니, 그래서 누가 더 좋은 만년필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곤 했다느니, 그럼에도 오래된 만년필에 익숙해서 좋아했다느니 하는 내용들. 그 글을 읽으며 든 첫 감상은, ‘만년필은 비싼 사치품인가 보다’ -_-;;였고, 그와 동시에 든 감상은 ‘만년필로 글을 써보고 싶다’란 허영심이었다.

만년필을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당시엔 만년필대와 펜촉을 따로 팔았고, 그들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으니까. 그 제품의 문제는 잉크에 펜촉을 담갔다가 사용해야 해서, 잉크가 새는 경우가 많았고, 잉크를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었다는 것. 그럼에도 허영심에 없는 돈을 모아서 샀는데, 흐흑.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만년필을 사용하면 정말 괜찮지만, 사흘만 지나도 자기가 쓴 글씨를 자기가 못 알아보는 그런 사람이 쓰면, 정말이지… ㅠ_ㅠ 물론 성깔 나쁜 루인이 자기 탓만 할 리는 없고;;; 펜촉의 질이 나쁘다느니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의 문제일 뿐이라느니 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만년필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조금만 잘 못 다뤄도 손이 금방 더러워진다는 것이었고, 볼펜과 달라 물에 젖으면 글씨가 모두 번져서 그렇잖아도 못 알아보는 글씨를 더 못 알아보게 된다는 것.

그렇게 만년필을 얼마간 사용하다가 곧 시들해져선, 다시 모나미153 볼펜을 애용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슨 이유인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선물로 꽤나 괜찮은 만년필을 받았다! (만년필 전문가들에게도 꽤나 괜찮은 만년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인에겐 너무도 멋진 만년필이었다.) 우헤헤. 그것도 잉크병에 펜촉을 담겼다가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잉크 카트리지만 갈아주면 되는, 그래서 잉크가 흐를 염려가 없는 그런 만년필! 이 허영심을 어쩌지 못하고,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용하기 시작해선 몇 년 간, 물에 젖어도 문제가 없을 그런 글은, 모두 만년필로 쓰기 시작했다(수업노트도 만년필로 썼다 -_-;;; 크크크). 그러다 또 얼마간의 불편함으로 쓰기를 중단하고 볼펜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시 허영심이 들면 만년필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새 만년필을 잊었고, 만년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

만년필을 찾고, 문구점에 가서 잉크 카트리지를 사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으아, 좋아. 흐흐. 괜히 자꾸만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어찌할 수 없어, 쓰지 않아도 되는 글을 끄적이기도 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게 가능한 건 펜글씨를 선호하기 때문일테다. 물론 이러다 또 시들해지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한시적으로나마 이런 허영심을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라고 우기고 있달까. 흐흐. ;;

하지만 만년필과 관련한 글을 써야지 했던 건, 며칠 전 라디오를 듣다가 종이에 펜으로 쓴 편지를 손글씨로 표현하는 디제이의 말을 듣고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손으로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펜으로 쓰는 것 뿐 아니라 키보드를 통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손”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펜으로 글을 쓰는 루인이지만, 한편으론 모니터를 보며 글을 쓰고 수정하고, 꽤나 긴 글도 모니터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꽤나 부러워하는 편이다. 펜으로 글을 쓴다는 건, 수정을 할 때도 일일이 다 프린트해서 펜으로 수정을 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사실 이러다보면 꽤나 많은 종이를 낭비하기 마련이다. 이면지를 활용하거나 양면을 다 활용한다고 해도 종이가 소비되지 않은 건 아닌데, 이런 점에서 항상 갈등을 한다. 이렇게 버려지는 종이를 볼 때마다, 적어도 모니터로 글을 쓰고 수정을 하고 어지간한 논문을 읽을 수 있다면 이렇게 버려지는 종이는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 이렇게 버려지는 종이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좋은 글을 쓰면 되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지만, 흑, 이제까지 쓴 글을 떠올리면ㅠ_ㅠ 이럴 때마다 이순원씨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는 글을 쓸 때마다 자기가 살던 곳의 나무들을 떠올린다고.

또 다른 상념으로 넘어가면, 몇 년 전만해도 사람들은 모니터로 글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기에 종이책은 적어도 백 년 안엔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 추세론 훨씬 일찍 종이책이 없어질 것 같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로 비용이 적게 들어갈 테니까. (비용하니까 떠오른 불안은, 이러다 전공서적들 혹은 이른바 “전문서”들은 죄다 전자출판을 하는 건 아닐런지. 흑. 그러면 안 되는데…) 어쩌면 몇 십 년 안에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경우보다 전자책으로 출판하는 경우가 더 많아 질지도 모르겠다. 뭐, 이러다 언젠가 종이책은 고대의 유물이 되겠지. 흐흐.

+
논문도 펜으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 원고를 보관하면 의미가 있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잠깐 했다. 흐흐. -_-;; 예전에 작가들이 모두 키보드로 글을 쓰면서 “육필원고”가 없다는 말이 떠올라 이런 상상을 했지만, 이런 상상을 하기 전에 공부나 좀 하라고! 흑흑흑(←내일 있을 어떤 일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기대하는 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