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물소리가 들린다. 사무실 창문 옆에 빗물을 빼기 위한 배수구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다. 비오는 날 이사왔지만, 사무실 내부를 정리한 후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저녁를 맞고 있다. 이 물소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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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시 레폿을 위해 세 권의 소설을 읽었는데, 오오, 엄청나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선생님이 세 권을 지목해 준 것 같지만, 세 권의 목록을 정한 건 루인. 그래도 이렇게까지 멋진 작품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끝나고 관련해서 쓸 예정. 후후.

근황

97시간짜리 잠을 자고 싶어. 아님 89시간짜리 잠이라도 좋아. 벌겋게 충혈 된 눈. 빨간 눈. 빨갛게 물든 눈. 근데 필요한 건 잠이 아니라 영양. 몇 주 간 하루에 한 끼를 먹을까 말까 하는 생활을 하자, 잇몸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잘 챙겨 먹을 것. 잘 챙겨 먹어야 집중력도 상승함.

며칠 전, 연구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이 루인에게 “피골이 상접하다”란 말을 했을 때, 여전히 스스로를 무척 뚱뚱하다고 여기고 있던 루인은 무척이나 당황했다고 한다. 잇몸에서 이가 다 빠질 것만 같기도 했던 시기라, 두 가지를 다짐했다. 하나, 이번 추석엔 부산에 내려가지 말아야지. 둘, 종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싸 다녀야겠어.

사실, 이번 추석에도 부산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피골이 상접하다”란 말을 듣자,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면, 어쨌거나 부모님은 적잖은 걱정을 하실 테니, 살을 좀 찌워서, 추석 지나고 나중에 가야겠다.

그렇잖아도 밥값 부담이 크기도 했고, 종시만 끝나면 아침에 밥 하는 시간 정도는 낼 수 있겠다는 걸 깨닫자,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도시락을 싸겠다는 고민은, 그 말을 듣기 훨씬 전부터였다.) 도시락을 싸겠다고 하니 주변에선 다들 이 기회에 전기밥솥을 사라고 했는데, 정작 도시락을 싸겠다고 다짐했을 때 루인의 계획은 2인 분의 밥을 할 수 있는 돌솥을 사는 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기까지 전기밥솥을 살 수 있다는 상상을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이왕 밥을 해먹기로 했으면 매일 아침 돌솥에 밥 하는 게 당연. 예전에 사용한 돌솥은 일인분용이라 밥을 먹을 때마다 밥을 새로 해야 했지만, 이번 기회에 이인분용을 사야겠다.

사무실 이사는 지난주에 무난히 끝났어요.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이사했지만 아무려나, 지금은 얼추 정리가 끝난 상황. 근데 사무실에 아직 인터넷 연결은 안 된 상태. (지금 이 글은, 종시 레폿을 쓰기 위해 학교에서 빌린 노트북으로 쓰고 있음.)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까진 계속해서 종시모드.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Run To 루인]을 그만 둬야겠다는 상상을 한 번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고, 그냥 이 기회에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했다. 이래저래 혼자 주절거린 말들, 글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냥 폐쇄하는 상상도 몇 번 했다. 명절 같은 시간에 이곳에 아무 글도 안 쓰는 것과 인터넷에 접속할 수도 있을 때에도 그냥 방치하는 건,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이렇게 글을 쓰고, 또 며칠 방치하고 나면 다음 주부턴 예전처럼 글도 쓰고 댓글도 달겠지.

읽고 싶은 책과 영화도 잔뜩 밀려 있고.

추석

추석이 다가오면서, 또 어쩔 수 없이 부산에 갈 건지 말 건지로 고민하고 있다. 근데 이 고민이 예전과는 좀 많이 다른 거 같다. 예전엔 내려가야 하는데 가기 싫어서 “가기 싫어~!!”하고 외치는 발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항상 스트레스에 방점을 찍었고 그래서 정말 가기 싫어서 사고도 좀 쳤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가곤 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가고 최대한 빨리 올라오는 식이었다.

그러다 최근, 논문이란 아해가 꽤나 그럴 듯한 핑계 거리가 되면서, 올 가을부턴 안 내려가도 괜찮은 상황이다. (정확하겐 지난 설부터 안 갈 수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4학기엔 못 올 수도 있으니까 기대하지 말라는 얘길 했었고, 그리하여 정말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비로소 안 내려갈 수 있는 상황, 그토록 바라던 상황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조금씩 내려가고 싶은 바람이 들기 시작한다. 물론 내려가면 발생하는 뻔한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아니고 이런 상황만 떠올리면 정말로 가기 싫지만.

사실 논문 준비로, 책을 읽어야 해서 못 내려간다는 말, 핑계다. 읽을거리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 있을 때 더 많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없고 근처에 극장도 없기에 할 일이라곤 집안일과 독서가 전부니까. 한땐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스트레스도 이젠 적당히 넘기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고 있고.

요즘은 부모님들이 얘기하는 혈연이란 강박이 마냥 문제이기만 한가, 란 고민을 하고 있다. 공익광고 같은 데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 몇 해 동안 연락이 없던 자식(대체로 “아들”이다)이 명절 아침에 찾아오면 가족들이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식의 환상을, 루인의 부모님 역시 가지고 있고, 이런 환상에 부모님들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또 이런 환상이 충족되면 좋아하시는 편이다. 이런 환상을 느낄 때마다 “그건 이러이러해서 잘못이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과연 잘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욕망은 그 자체로 문제란 식으로 지목할 것이 아니라 이런 욕망이 작동하는 구조, 이런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부모님들의 맥락에서 이런 욕망의 의미 등을 묻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텐데, 마치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사람 마냥 행동한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식의 욕망을 비판하면서 명절을 무시하려는 행동을 하면, 마치 루인은 혈연가족제도와 무관하게 살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닌지, 명절 행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건 아니건 간에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민하기 보다는 이런 상황에 따른 고민 자체를 피하려고만 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혈연가족관계에 가장 강박적인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루인인 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에 내려갈까 하는 고민을 하는 좀 더 불순한 동기는, 며칠 전에 쓴 가족과 관련한 고민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번에 내려가면 은근슬쩍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꼭 물어보고 싶은 건 아니라 해도,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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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만약 혈연가족관계에서, 혈연이란 무게를 지울 수 있다면, 혈연에 기대지 않으면서 개개인으로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의 가족과는 어떤 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의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혈연의 무게를 지울 수 있다면 그때도 여전히 만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