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펄, [포의 그림자]

매튜 펄 [포의 그림자] 1, 2권, 이은선 옮김, 서울: 황금가지, 2007 (Mathew Pearl, The Poe Shadow,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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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프로이트翁과 관련해서 배울 때, 선생님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이러이러한 단계를 거치면 이러이러한 성격이 형성된다”라는 도식이 아니라 일종의 “시나리오”라고 설명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자신의 어떤 감정들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석가에게 과거의 경험을 얘기하면, 정신분석가는 과거의 경험을 적절하게 짜 맞춰서 서사를 만드는데, 이 서사가 나를 설득하고 수긍해서 해소되면 상담은 성공한 셈이고 수긍하지 못 하면 실패한 셈이다. 이 말은, 지금 루인의 성격은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학교생활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유전자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으며, 중요한 건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쨌거나 그런 설명에 내가 수긍하고 그래서 뭔가 해소되는 느낌을 가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단 의미이다. 이런 식의 서사 만들기가 근대적인 이야기구조의 전형이기에,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서사를 만들 수 없는 존재는 [검은 집]처럼 “싸이코패스”가 된다.

[포의 그림자]를 읽다가, 추리소설이야 말로 이런 서사 만들기의 전형이구나, 했다. 어차피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설명을 만들어서 독자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범인을 지목하고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단서들을 통해 가장 그럴 듯한 추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추리소설의 핵심일 테고, 이런 점에서 추리과정은 서사를 만드는 과정인 셈이자 정신분석과정인 셈이다.

02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라면, 포(Edgar Allan Poe)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더 설명할 거리는 없다. 큭큭. 중학생 시절부터인가 포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으니, 교보홈페이지에서 이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달까. [단테클럽]이란 책의 작가라는데 처음 듣는 책이다. -_-;;

[포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소설로 쓴 작가평전일 수도 있고 문학해설서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 저자의 성실함이 돋보이고 해석의 기발함에 놀라지만, 추리소설로서도 충분히 재밌다. 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도 좋지만, 굳이 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야기 자체가 재밌다.

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모르그 가의 살인”과 관련한 해석. “모르그 가의 살인”은 포의 유명한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설인데, 끔찍한 살인범이 우랑우탄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뒤팽의 모델이 누구냐를 두고 약간의 말이 있었던 걸로 안다. 근데 매튜 펄은 “모르그 가의 살인”을 처음으로 게재한 잡지에 쓴 포의 다른 서평에 착안해서 꽤나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조르주 상드의 본명이 아망딘 오로르 루시 ‘뒤팽’이며, 상드의 죽은 형제의 이름은 오귀스트 뒤팽이고, “모르그 가의 살인”에 나오는 골목 이름 “라마르틴”은 시인이자 정치가 이름 라마르틴, 시신을 검증하려고 등장한 의사의 이름, “폴 뒤마”는 알렉상드르 뒤마([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뒤팽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감, “이시도르 뮈제”는 시인 알프레드 뮈세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모르그 가의 살인”을 프랑스 문학계에 대한 일종의 풍자 소설로 얘기하는 부분(2권136-138)에 이르면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다.

책 읽는 속도가 무척 느린 루인이지만, 이틀 만에 두 권의 책을 다 읽었으니, 무척 재밌게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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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게 거의 남아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남작의 이야기와 섞여 버렸을 걸세. 남작이 교묘한 수법과 궤변으로 신문과 세간의 풍문을 어지럽혀 놓았으니까. 소재가 파악될 무렵이면 증인들 모두 오염되어 있을 게 분명해”
“거짓말을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실질적인 기억과 이야기가 남작의 의도대로 바뀔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남작이 돈을 주고 재판정에 세우는 증인이나 다름없단 말이지. 이들을 만나더라도 아주 기본적인 사실 외에는 소득이 없을 테니 무슨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정보를 얻을 수가 있겠나?” (1권, 216, 뒤퐁트와 클라크의 대화)

“오류를 알아야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법이라네, 무슈 클라크.” (1권, 223, 뒤퐁트)

“늘 멀리 있는 진실만 찾으려고 날뛰는 곳이 신문이니 바로 눈앞에 있는 진실을 놓칠 수밖에. 놀랄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별일에 다 놀라는 곳이 신문이지. 어떤 사실이 한번 거론되면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네 군데에서 못을 박으면 무시하는 것이 상책일세. 반복으로 인해 모든 사고가 마비되니까.” (1권, 254, 뒤퐁트)

“자네는 수사의 핵심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날마다 조금씩 더.”
“선생님, 저는 어떻게든 돕고 싶습니다.”
사실 나는 핵심은커녕 주변도 밟지 못한 기분이었고, 우리가 지금까지 파악한 것은 사건의 변두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1권, 263, 뒤퐁트와 클라크)

“그랬지. 자네가 레이놀즈를 발견한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이야기했다시피 무의미한 부분들을 모두 알아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법이라네.” (1권, 263, 뒤퐁트)

“아, 그렇지는 않다네. 포 선생의 사망 당시와 관련하여 우리가 파악한 사실들 중에서 신문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세부 정황과 사실에 기대는 부분은 미미하니까. 세부 정황과 사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의 중심은 아니라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게나. 세부 정황은 항상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기본적인 부분일세. 하지만 그 자체가 어떤 깨달음을 주지는 않지. 그 안에 숨은 진실을 파악하려면 제대로 해석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데, 뒤팽 남작의 해석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닌가. 남작이 우리보다 유리해지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네. 오히려 정반대니까. 그의 해석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가 접하는 세부 사항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더 앞서나갈 수 있는 것이지.” (1권, 299, 뒤퐁트)

“무슈 포는 평범한 인물이 아닐세. 너무나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그의 결정은 사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논리적인 것이라네.” (2권, 217, 뒤퐁트)

“어떤 사람의 동기를 파악하려 할 때는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피기보다, 무슨 일을 빠뜨렸고 어떤 부분을 게을리 했는지 살피는 자세도 종종 필요한 법이라네.” (2권, 237, 뒤퐁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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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이치 [ZOO]

요즘, 방학이란 핑계로 소설책을 몇 권 읽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중 상당수가 추리소설 혹은 그 언저리의 범주에 속하는 소설들. 이렇게 읽고 있는 소설들 중 한 권이 오츠이치(Z一)의 [ZOO]. 작가의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따지고 보면 굳이 독후감까지 쓸 정도의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두른 띠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문학의 충격
(…)
‘시대의 천재’ 오츠이치의 대표작 한국 출간

란 구절이 있는데, 짐작할 수 있듯 그저 웃음만 날 뿐인 진부한 홍보문구이다.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재”란 느낌도 안 들고, “충격”적일만한 소설도 아니다. 고어영화에 큰 거부감만 없다면, 내용도 그렇게 끔찍하지 않고(모든 작품이 고어인 건 아니고).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포(Poe)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포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포의 영향을 받았구나, 혹은 포의 어느 소설이 떠오르는 형식이구나, 하는 느낌이 많이 든달까. 그렇다고 포의 아류작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홍보구절과 같은 호들갑이 이 소설들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인 것 같기도 하다. 아직은 덜 여물었다는 느낌도 있고. 소름끼치거나 서늘한 느낌을 소설이라면, 차라리 마루야마 겐지의 초기작품이 낫지 않을까? (마루야마 겐지를 안 읽었다면,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나 [소나티네], [하나비] 등을 떠올리면 될 듯.)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은 지 일주일이 넘은 지금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건, 이 소설집에 실린 두 번째 소설 “SO – far”의 설정 때문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주인공인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엄마는 아빠가 안 보인다고 말하고, 아빠는 엄마가 안 보인다고 말한다. 셋이서 같은 소파에 앉아 있을 때에도 엄마에겐 나만 보일 뿐 아빠는 안 보이고, 아빠 역시 나만 보일 뿐 엄마는 안 보인다고. 왜 그런가 했더니,

무슨 볼일이 있어서 친척 숙부에게 갖다 주어야 할 게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쪽이 전차를 타고 숙부의 집에 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가위바위보를 한 뒤부터가 달라졌다. 엄마가 있던 세계에서는 아빠가 져서 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가 있던 세계에서는 엄마가 숙부의 집에 갔다고 한다.
전차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래서 엄마가 있던 세계에서는 아빠가, 아빠가 있던 세계에서는 엄마가 죽고 만 모양이다. 각각의 세계에서 살아난 쪽은 나와 둘만 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였다. (p.84)

엄마건 아빠건 둘 중의 한 명은 죽었다고 하고, 주인공인 나는 둘 다 살아 있다고 믿고 실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함께 살고. 흥미로운 건, 위에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엄마의 입장에선 아빠가 죽었기에 엄마와 나, 둘 만 남았고, 아빠의 입장에선 엄마가 죽었기에 아빠와 나, 둘 만 남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에 따르면, ‘살아남은 엄마와 살아가는 나’의 세계는 살아남은 엄마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죽은 아빠의 걱정 혹은 상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상이고, ‘살아남은 아빠와 살아가는 나’의 세계 역시 죽은 엄마의 걱정 혹은 상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상이란 점이다.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엄마와 나의 삶은 죽은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는 엄마가 죽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아빠와 나의 삶은 죽은 엄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 이 설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소설의 결론은 전혀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구성은, 영화 [기담]에서 인영과 동원의 세계를 이루는 방식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살아가는 이들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설정. 사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역시 이렇지 않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설정이 유난히 걸린 건, 최근 겪은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혹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뭔가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테면 한 선생님의 상만 해도, 돌아가신 분이 존재한 적이 없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죽음을 전해 듣고 서야 비로소 그 분의 존재를 깨달은 셈이다. 나의 인식 범위에서 존재한 적도 없는 이가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 이 느낌이 기묘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들은 죽은 이의 상상에서 살고 있는 산 자들의 삶과 닮은 건 아닐는지.

숨책, 책, 논문주제

숨책에서 알바를 하고 왔다. 오후에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주말에 시간이 되느냐는 전화려니 했는데 오늘 저녁에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 전부터 돈 벌 궁리를 하고 있어서, 전화가 유난히 반가웠다. (몇 달 전부터, ‘아주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란 인생을 살고 있다. 흐흐 -_-;;) 내일 저녁에도 하기로 했고, 어쩌면 목요일 저녁에도 한다. 사흘 간 알바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게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잖아도 숨책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알바하러 간 김에 책도 두 권 샀다. 수잔 브라이슨의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와 네이폴의 소설 [흉내].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책이 출판된 당시부터 사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있어서 망설임 없이 골랐다. 하지만 언제 읽을까? 아주아주 나중에 읽을 것 같다. 네이폴의 [흉내]는, 사실, 네이폴이란 작가 자체를 잘 모른다. 이름은 귀 설지 않은데 누군지 모르겠다. 그저, 책날개에 적혀 있는

…지난 세월의 혼돈을 기억하고 응시하는 한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주인공의 그 쓸쓸한 돌이킴 속에는 ‘진짜’가 되기 위해 ‘진짜인 척’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사실은 겉보기의 중심을 흉내 낸 맹목에 지나지 않았다는 섬뜩한 자기반성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란 구절을 읽고, 사지 않을 수 없었달까. 제대로 모르면서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행동, 트랜스도 아니고 전환/이행(transition)의 경험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 여성(혹은 남성)”이었다란 식의 서사, “패싱passing” 등이 동시에 떠올라, 이 책을 골랐다.

석사논문 주제도 이런 고민과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고. 지난 몇 달 전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주제가 다가오고 있다. 그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두 개의 주제를 하나로 엮어갈 텐데, 그중 하나는 많진 않아도 몇몇 참고 문헌을 찾아둔 상태고 그 중 일부는 이미 한 번 읽었다. 문제는 다른 주제와 관련해서 당장 떠오르는 참고문헌이 전혀 없다는 거… lllon_ 간단하게 언급한 논문은 하나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용한 아이디어를 얻을 만한 논문이나 책을 모르고 있는 상태다. 흑흑. (아, 방금 아이디어를 줄 만한 글이 몇 개 떠오르긴 했다. 힛. -_-;;;)

사실, 며칠 전에 몇몇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제를 얘기했더니, 다들 좋아는 하는데, “박사논문 쓰려고?”라는 반응도 있어서 살짝 당황했다. 정작 루인은 A4지로 10페이지 분량이면 충분할 내용이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려나, 어떻게 되겠지, 뭐. 흐흐.

어쨌든 며칠 알바를 하면, 생활비도 벌고 영화비도 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랑 [카모메 식당] 읽으러 가야지.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