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하늘, 태양/볕, 이중서사, 윤리

[밀양] 2007.06.18. 18:45 아트레온 9관 11층 G-10

#제대로 써야지 하고 미루다가,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간단하게 메모만. 스포일러는 없음.

01.
며칠 전, 영화잡지를 뒤적이다가 이 영화와 관련한 글이 있어서 대충 넘기다가, 이 영화엔 하늘이 많이 나온다는 구절을 읽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하늘을 비추는 장면은 단 두 번뿐이다. 두 번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하늘을 담고 있다. 물론 자동차도로를 비추면서 하늘이 드러나는 경우가 두어 번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너 번이 전부. 하늘이 많이 나온다고 느껴지는 건, 어느 장면부터 전도연은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때문인 듯.

02.
이 영화에서 하늘은, 종교가 두드러지게 나와서 하나님으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루인은 예전부터 자꾸만, 단지 하나님이 아니라 바람피고,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즉, 죽어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거는 모습과 겹친다고 느꼈다. 하늘을 쳐다보며 “잘 봐”라거나 “보고 있니”라고 얘기하는 모습들 모두 “하나님”과 죽은 남편에게 하는 말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신애(전도연)에게 남편이 하늘과 같은 존재란 의미는 아니고.

03.
흥미로운 건, 이 영화는 한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을 이어붙인, 두 개의 작품을 연결한 영화이기도 하다. 준이 하늘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유괴되는 사건까지가 단편. 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찾아간 현장에서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이 장편의 시작.

영화가 시작할 때 준이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 준이 반응하는 모습들은, 죽은 준을 찾은 곳에서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 신애가 반응하는 모습들과 거의 같다. 이 장면에서 신애와 준은 우울증으로 합체했다고 느꼈다.

04.
당연히 의도적인 연출이겠지만 이 영화 속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 태양의 광기가 넘치는 날씨다.

05.
영화를 두 번 안 읽었다면, 범인이 누군지 못 알아 봤을 뻔. 그래서 그 중3 아이와 왜 그렇게 불안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지 모를 뻔 했다. -_-;; 인면맹의 문제다.ㅠ_ㅠ

06.
가장 화났던 장면은, 범인의 태도. 그리고 같이 있던 사람들의 태도. 이 영화가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면 바로 이 장면 때문.

신애가 종교에 귀의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기 위해, 범인을 용서하러 (같은 교회 사람들과 함께) 면회를 간다. 범인은 표정이 너무 좋은데, 하나님께 귀의했고 그래서 용서를 구했다고, 용서 받았다고 말하며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다”고 반응한다. 이 두 장면에서 화가 났다.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준의 죽음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은 신애지 하나님이 아닌데, 정작 그 사건으로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신애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님에도, 범인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비록 범인은 신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다소 형식적으로 들리고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았고, 신애도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 역시 하나님에 기대어 용서를 얘기하고 믿음을 얘기하지 신애의 고통과 슬픔은 얘기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 속에서 신애의 고통은 “방황하는 어린 양”일 뿐이다. 영화 속,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정작 타인의 고통엔 무관심하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범인이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있다는 말에 “역시 하나님은 대단하다”란 말이 나올 수 있는 거 아닐까? 마찬가지로, 종교인들은 계속해서 용서하란 말을 되풀이 할 뿐, 신애가 “하나님이 이미 용서를 했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느냐”란 항변을 못 알아듣는 것 역시 그래서가 아닐까.

지난 글에서도 적었듯, 이 글에서 종교는 하나의 장치이고,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교라도 아무 상관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정작 타인의 고통엔 무관심하면서 구원이나 믿음 같은 막연한 ‘희망’ 만을 얘기하는 방식에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자”란 얘기만 할 뿐 정작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엔 모두가 무관심할 때, 그런 집단 속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개인은 어떤 식으로 변하는가를 [밀양]은 그리고 있는 듯 하다.

07.
이 영화가 프랑스영화나 독일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영화를 읽다가, 문득 [미치고 싶을 때]가 떠올랐다.

[밀양]의 후반부에, 신애는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말이 너무도 양가적으로 다가왔다. 이 말이 절실하고도 절박하게 다가오면서도 이 말을 안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궁시렁거리고 있다. 이 말이 좋으면서도, 안 하는 게 나았을 뻔 했다고. 그래서 프랑스나 독일이었으면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
메모만 해도 이 분량이니, 정말 적었다면…-_-;;

정희진-뜨겁고 재미있는 여성주의 인식론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으로 이어진 위그회의를 하다가, 연분홍치마 사무실에 우연히 팜플렛을 봤다. 그냥 무심결에 손이 갔고, 그래서 뒷장을 봤는데…!!!

정희진 :: 뜨겁고 재미있는 여성주의 인식론

란 구절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내용인가 찾아보니

[1강] 차이와 권력
[2강] 위치성과 언어
[3강]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4강] 다중적 정체성
[5강] 탈식민주의로서의 여성주의
[6강] 유목하는 주체
[7강] 여러 개의 젠더
[8강] 대화의 정치로서의 여성주의

오오, 재밌겠다! (사실, 정희진선생님 강의라는 것 자체로 이미 확실히 끌린 상태지만… 흐흐) 그래서 강의일정 등을 확인했는데…

제목 : 뜨겁고 재미있는 여성주의 인식론
강사 : 정희진
강의구성 : 8회 오프라인 강좌 / 수강료 : 160,000원
강의일정 : 6월 29일 개강 / 매주 금요일 오후 7시-9시

수강료가…ㅠ_ㅠ 정희진선생님 강좌에 이 정도 강의료를 지불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합친 금액은… 현재의 루인에겐 무리라고… T^T

관련 페이지는 여기로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들

지금 이 시간에 학과연구실에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문득 낯설다고 느낀다. 아, 그래, 겨울을 지내면서 이 시간이면 玄牝에 돌아가 있곤 했다. 방을 덥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잠들 땐 보일러를 껐기에, 잠들기 한 두 시간 전에는 꼭 玄牝에 도착해야 했다) 9시가 넘으면 돌아가곤 했는데, 봄이 지나갈 때까지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인 걸. 여름이면 더욱더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아마 [트랜스아메리카]를 대여섯 번은 읽은 듯 하다. 만약 단순히 좋아하는 영화를 이 정도 읽었다면, 좀 읽었거나 그럭저럭 많이 읽은 셈이다. 하지만 분석하려고, 비평하려고 읽었다면? 고작 여섯 번 정도 읽고 비평하겠다고 나대는 셈이다. 부끄럽다.

이런 부끄러움들이 계속된다. 요즘 들어 부쩍, 긴장감은 떨어지고 페티쉬만 늘었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공부도 안 하면서 열심히 한 것 같은 과거만 상기하며, “그래도 좀 했어”라고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삶. 이런 자신을 깨닫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졌다. 초등학생시절 30번 정도 읽은 소설책이 있다. 옛 말쌈에 100번은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의 말뜻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뜻을 대충은 혹은 얼핏 엿본 적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작 대여섯 번이라니. 그렇다고 다른 거라도 열심히 하느냐면 전혀 아니다. 엄살이 아니라 건조한 자기 평가.

개별연구수업을 준비하며 버틀러와 ㅌㄹ ㅁㅇ의 책 서평을 몇 개 찾았는데, 서평을 읽으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정녕 서평자와 루인은 같은 책을 읽은 것이란 말이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서평자가 언급하는 비평이 루인의 비평과 너무 다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당황하고 좌절한다. 도대체 무얼 읽은 것이냐. 읽긴 읽은 것이냐!

아무려나, 하고 싶은 말은, [트랜스아메리카]를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 처음엔 단순히 횡단서사로 읽었다. [Run To 루인]의 어느 글에도 이렇게 해석하며 적었고. 미국을 횡단하는 내용과 성별을 횡단[이른바 성전환]하는 내용이 겹쳐있는 정도의 영화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으며, 이 영화의 주제는 다르게 다가왔다. 최근의 결론 중 하나는, (프로서의 지적과 비슷한데)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은 수술과정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통합과정,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 영화는 비록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기위해 뉴욕에서 LA로 가지만, 이 과정은 단지 수술을 하러 가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과 소통하고 죽었다고 부정한 부모들과 화해하는 작업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며 엔딩크레딧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 두 명을 발견. 한 명은 케이트 본스틴(Kate Bornstein)이고 다른 한 명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 아마 영화자문을 했지 않을까 싶다. 이 두 명이 유난히 반가운 건, 트랜스와 관련한 공부를 시작할 초기에 정말 좋아하며 읽었던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본스틴은 트랜스/젠더 이론가이자 연극배우고, 윌킨스는 트랜스/젠더(혹은 젠더퀴어) 이론가이자 젠더 활동가이다. 둘 다 글을 쉽게 쓴다는 점에서 영어라도 부담스럽지는 않다는 장점도 있다. -_-;;; 흐흐.

본스틴의 주요 저작은 자서전이기도 한 [젠더 법외자Gender Outlaw](무법자가 더 와 닿는 표현이지만 법외자가 좀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최근의 고민은 이 책의 제목의 의미인데, 젠더 법외자란 말은 젠더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 책의 내용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한땐 이런 표현이 좋았지만, 좋아할 수는 있어도 동의하긴 힘들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법외자로 얘기할 경우, 젠더 사회의 바깥-즉, 현재의 사회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존재, 초월적인 존재로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스틴의 경우 실제 경향이 좀 있다. 물론 작년에 읽고 다시 안 읽었다는 점에서 지금 이 글의 신뢰도는 상당히 떨어짐!)

그래서 최근 자주 중얼거리는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고 얘기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 인식이 현재로선 더 매력적이다. 윌킨스의 이런 말을 통할 땐, 젠더나 젠더시스템을 고정된 의미로 가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젠더시스템이 문제이며, 위반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제도라고 접근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 건, 젠더와 관련한 논의를 하다보면, 적지 않은 경우에 트랜스젠더를 사례로, 논의의 주제/대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와 젠더 규범을 강화한다”는 말과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젠더 규범에 문제제기하며 젠더를 초월한다”란 식의 언설들 모두, 트랜스젠더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개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협상하고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이런 논쟁에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개개인들은 “보수적”이기만 한 것도 “진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윌킨스의 말은 바로 이런 식의 논쟁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라는 말에서 나는 사례로, 논의의 주제로 존재하며 규명해야할 대상은 “나”가 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고 말하는 순간, 규명할 대상은 “나”에서 “젠더시스템”으로 바뀌고, 논쟁의 주제 역시 “젠더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경험’을 통해 때때로 기존의 논의 자체를 바꿀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말이 좋은 이유는 석사논문과 관련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석사논문의 아이디어도 [Run To 루인]에 적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적기가 애매하다. 아직은 막연한 상태라 개념어만 남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

아무려나 내일 마감인 기말논문의 초고를 오늘에야 간신히 끝냈는데, 초고 상태가 엉망이다. 그러니 엄청난 수정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초고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돌리고 있다.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오면, [Run To 루인]도 좀 더 활발하겠지. 월요일까지 써야할 글이 두 편 더 있고 월요일 저녁엔 위그출판회의가 있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玄牝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