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일정조절, 케이트 본슈타인(본스틴), mtf 여대 입학 이슈 등

ㄱ.
일정 조절을 한다는 얘길 적었죠. 네, 일정을 조절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과정이 원활했고요. 그래서 잠도 자면 안 되는 일정에서 잠은 잘 수 있는 일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후후.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빠듯한 일정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게으른 관계로 일정 조절이 필요했어요.
암튼 이렇게 일정을 조절했더니 가끔은 누군가와 히히덕 거리며 놀 수 있는 심리적 여유도 생겼네요. 실제 놀 수 있는지, 실제 놀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건 심리적 여유가 생겼다는 거죠. 심리적 여유가 생겨야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심리적 여유가 없다면 잘 할 수 있는 일도 망치기 마련이거든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일정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일정을 조절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더 아쉬워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죠.
ㄴ.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기도 하고, 제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씁니다.
제가 좋아하는 트랜스젠더 이론가/작가 중 한 명인 케이트 본슈타인Kate Bornstein이 많이 아프단 얘길 들었습니다. 아픈 것도 걱정인데, 과거에 한 번 수술을 받았는데 또 다른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병도 있어 수술도 쉽지 않고 비용도 만만찮다는 얘기였습니다. 이에 본슈타인의 동료들이 자발적으로 기금 마련 페이지를 개설했지요. 목표 금액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모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들은 본슈타인은 화를 냈다지요…
제가 미국에 살았거나 제게 해외결제카드가 있다면 저 역시 모금에 동참했을 겁니다. ‘나 같은 사람도 트랜스젠더라고 부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에 본슈타인의 글을 읽으며 힘을 얻었거든요. 그러고 보면 1990년대 초반 트랜스젠더 이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mtf 트랜스젠더는 어쩜 그렇게 다들 비이성애자인지. 본슈타인, 스트라이커, 스톤, 윌킨스와 같은 이들의 글을 읽으며 상상력을 발휘하고 또 저 자신을 설명하는데 많은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니 본슈타인은 제게 상당히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기금 마련에 동참은 못 했지만 부디 수술이 잘 되어 완쾌하길 바랍니다.
ㄴ-1
언젠가 본슈타인의 자서전을 공동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그 번역에 어떤 식으로건 기여를 하며 한국어로 출판하고 싶어요.
ㄷ.
요 며칠 전까지 구글뉴스의 트랜스젠더 이슈 중 가장 핫한 뉴스는 미국 어느 여대가 mtf 트랜스여성의 입학을 거부한 일이었습니다. 확실히 언론이 물기 좋아할 요소가 가득합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 평소 관심 없는 언론이라도, 여성혐오나 페미니즘을 싫어한다면 트랜스젠더 인권 운운하며 달려들기 딱 좋은 이슈죠. 그래서 한 편만 대충 살피고 말았는데요..
기사 중 하나: http://goo.gl/lwpCD
지렁이 활동할 때도 그랬고 박사과정 진학을 고민할 때도 그랬고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제출하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여기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죠. 하나는 아직 호적 상 성별변경을 하지 않은 ftm 트랜스남성이 입학한 다음 재학 중 ‘남성’으로 공부상 기록을 바꿨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입학을 시도하는 것이었죠. 이대에 재학중인 사람을 포함한 몇 명은 제게 이대에 지원하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일인시위를 해야 한다면 함께 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럼에도 지원하지 않았던 건 언론을 타야 하는 피곤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언론을 타면서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이슈가 겹쳐져서도 아니었고요. 제가 제기한 이슈를 빌미로 이대(혹은 ‘꼴페미’로 불리는 망상 속의 집단)를 혐오하는 무리가 우르르 달려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도 없으면서 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대는 트랜스젠더를 차별한다느니 하는 댓글이 달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트랜스혐오와 여성혐오를 동시에 표출하면서도 자신은 옳은 것처럼 행동할 것이고… 어떤 정치적 행동엔 이런 식의 원치 않는 반응이 생길 것을 감안하면서도 시도해야겠지만, 이 일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는 반응에도 내가 제기하는 이슈가 충분히 알려지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럴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트랜스여성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은 대학의 태도가 납득이 가는 건 아닙니다. 납득이 갈 리가 있나요.
ㄹ.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이성애-비트랜스젠더에 대해 강의해주실 분 찾습니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라고 가정한 집단을 대상으로 제가 트랜스젠더 이슈를 강의한 적은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알려달라고 부르는 곳은 가끔 있더라고요. 근데 그 반대의 경우는 없더라고요.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듯 그렇게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설명할 강사가 계실까요?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이성애-비트랜스젠더와 관련한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단, 소위 자기 자신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범주로 설명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혹은 이런 분을 더 우대합니다).
ㅡ_ㅡ;;;
ㅁ.
‘비트랜스-페미니스트와 비트랜스-퀴어는 그럼에도 트랜스젠더의 최대 동맹이다’라는 식으로 논의를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렇게 정리한다고 해서 트랜스젠더 이슈는 페미니즘 이슈가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이들이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언설에 움직일 사람은 이미 움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이 가능할까?
+
음악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들

지금 이 시간에 학과연구실에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문득 낯설다고 느낀다. 아, 그래, 겨울을 지내면서 이 시간이면 玄牝에 돌아가 있곤 했다. 방을 덥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잠들 땐 보일러를 껐기에, 잠들기 한 두 시간 전에는 꼭 玄牝에 도착해야 했다) 9시가 넘으면 돌아가곤 했는데, 봄이 지나갈 때까지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인 걸. 여름이면 더욱더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아마 [트랜스아메리카]를 대여섯 번은 읽은 듯 하다. 만약 단순히 좋아하는 영화를 이 정도 읽었다면, 좀 읽었거나 그럭저럭 많이 읽은 셈이다. 하지만 분석하려고, 비평하려고 읽었다면? 고작 여섯 번 정도 읽고 비평하겠다고 나대는 셈이다. 부끄럽다.

이런 부끄러움들이 계속된다. 요즘 들어 부쩍, 긴장감은 떨어지고 페티쉬만 늘었다고 중얼거리고 있다. 공부도 안 하면서 열심히 한 것 같은 과거만 상기하며, “그래도 좀 했어”라고 자기 위안이나 하고 있는 삶. 이런 자신을 깨닫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졌다. 초등학생시절 30번 정도 읽은 소설책이 있다. 옛 말쌈에 100번은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의 말뜻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뜻을 대충은 혹은 얼핏 엿본 적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고작 대여섯 번이라니. 그렇다고 다른 거라도 열심히 하느냐면 전혀 아니다. 엄살이 아니라 건조한 자기 평가.

개별연구수업을 준비하며 버틀러와 ㅌㄹ ㅁㅇ의 책 서평을 몇 개 찾았는데, 서평을 읽으면서 상당히 당황했다. 정녕 서평자와 루인은 같은 책을 읽은 것이란 말이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서평자가 언급하는 비평이 루인의 비평과 너무 다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도) 당황하고 좌절한다. 도대체 무얼 읽은 것이냐. 읽긴 읽은 것이냐!

아무려나, 하고 싶은 말은, [트랜스아메리카]를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너무 달랐다. 처음엔 단순히 횡단서사로 읽었다. [Run To 루인]의 어느 글에도 이렇게 해석하며 적었고. 미국을 횡단하는 내용과 성별을 횡단[이른바 성전환]하는 내용이 겹쳐있는 정도의 영화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으며, 이 영화의 주제는 다르게 다가왔다. 최근의 결론 중 하나는, (프로서의 지적과 비슷한데)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은 수술과정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통합과정,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 영화는 비록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기위해 뉴욕에서 LA로 가지만, 이 과정은 단지 수술을 하러 가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조차 몰랐던 아들과 소통하고 죽었다고 부정한 부모들과 화해하는 작업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며 엔딩크레딧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 두 명을 발견. 한 명은 케이트 본스틴(Kate Bornstein)이고 다른 한 명은 리키 윌킨스(Riki Wilchins). 아마 영화자문을 했지 않을까 싶다. 이 두 명이 유난히 반가운 건, 트랜스와 관련한 공부를 시작할 초기에 정말 좋아하며 읽었던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본스틴은 트랜스/젠더 이론가이자 연극배우고, 윌킨스는 트랜스/젠더(혹은 젠더퀴어) 이론가이자 젠더 활동가이다. 둘 다 글을 쉽게 쓴다는 점에서 영어라도 부담스럽지는 않다는 장점도 있다. -_-;;; 흐흐.

본스틴의 주요 저작은 자서전이기도 한 [젠더 법외자Gender Outlaw](무법자가 더 와 닿는 표현이지만 법외자가 좀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최근의 고민은 이 책의 제목의 의미인데, 젠더 법외자란 말은 젠더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 책의 내용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고. 한땐 이런 표현이 좋았지만, 좋아할 수는 있어도 동의하긴 힘들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법외자로 얘기할 경우, 젠더 사회의 바깥-즉, 현재의 사회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존재, 초월적인 존재로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스틴의 경우 실제 경향이 좀 있다. 물론 작년에 읽고 다시 안 읽었다는 점에서 지금 이 글의 신뢰도는 상당히 떨어짐!)

그래서 최근 자주 중얼거리는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고 얘기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런 인식이 현재로선 더 매력적이다. 윌킨스의 이런 말을 통할 땐, 젠더나 젠더시스템을 고정된 의미로 가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젠더시스템이 문제이며, 위반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제도라고 접근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윌킨스의 말이 더 와 닿는 건, 젠더와 관련한 논의를 하다보면, 적지 않은 경우에 트랜스젠더를 사례로, 논의의 주제/대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와 젠더 규범을 강화한다”는 말과 “트랜스젠더는 이성애 젠더 규범에 문제제기하며 젠더를 초월한다”란 식의 언설들 모두, 트랜스젠더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개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개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협상하고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이런 논쟁에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개개인들은 “보수적”이기만 한 것도 “진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윌킨스의 말은 바로 이런 식의 논쟁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했다”라는 말에서 나는 사례로, 논의의 주제로 존재하며 규명해야할 대상은 “나”가 되지만, “젠더시스템이 나를 위반했다”고 말하는 순간, 규명할 대상은 “나”에서 “젠더시스템”으로 바뀌고, 논쟁의 주제 역시 “젠더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경험’을 통해 때때로 기존의 논의 자체를 바꿀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말이 좋은 이유는 석사논문과 관련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석사논문의 아이디어도 [Run To 루인]에 적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적기가 애매하다. 아직은 막연한 상태라 개념어만 남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

아무려나 내일 마감인 기말논문의 초고를 오늘에야 간신히 끝냈는데, 초고 상태가 엉망이다. 그러니 엄청난 수정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초고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한숨을 돌리고 있다. 월요일이 지나 화요일이 오면, [Run To 루인]도 좀 더 활발하겠지. 월요일까지 써야할 글이 두 편 더 있고 월요일 저녁엔 위그출판회의가 있으니까. 그럼 이제 슬슬 玄牝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