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감정

붉은 꽃 피고 진 자리에 남겨진 흔적.
붉은 꽃, 활짝 핀 자리보다는 피지 못하고 시든 자리가 더 선명하고 오래 남아. 응어리처럼 고여선, 오래도록 피지 못했음을 알려주지.

사실은, 정작 나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 아니, 나의 감정 상태는 언제나 뒷전이라는 걸.

그래, 그래서 슬프니? 슬펐니? … 응. 그런가봐.
근데 기쁘니? 기뻤니? … 응, 기쁘기도 했던 것 같아.
혹은 그때, 그 순간, 먹먹했던가.
감정은 언제나 복잡하게 얽혀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면서도 울 기회를 찾고 있어.

오랜만에 “공허”라는 단어를 썼어. 루인의 상태를 설명하며 [Run To 루인]에 “공허”란 단어를 쓴 적은 거의 없는데. 지금은 “공허”, 그러다 어느 순간 “빈곤”을 얘기하겠지. 아냐. “공허”와 “빈곤”은 그저 설명하는 언어일 뿐,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은 같아.

붉은 꽃이 피고 진 자리의 흔적. 이 계절이 오고 반팔을 입는 시기가 오면 이렇게도 신경 쓰여. 혼자서 자꾸만 신경 쓰고 있어. 별거도 아닌데 자꾸만 신경 쓰여서 이렇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어. 이제 그만 말해야지.

발화: 알 수 없음.

일전에 회의 자리에서 ㅇㄹ씨가 루인에게, 루인은 너무도 많은 고민들이 담겨 있는 내용들을 너무도 가벼운 농담조로, 그것도 툭 뱉는 한 마디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루인의 이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해도) 느끼길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그 지적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니까.

지금도 조금 불안하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내용의 다른 형식인데, 그걸 에둘러 말하고, 이런 에둘러 말하기를 통해 엉뚱한 효과를 낳는 건 아닌지… 루인이 듣는 비난이나 비판이 걱정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낄 불쾌함이 고민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 사실은, 갈 수록 모르겠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고 믿는 순간,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동시에 깨닫는다. 관계를 엮어가는 일이 언제나 이렇다지만… 그래도… 갈 수록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불안하다. 매번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 안다고 믿으려는 순간이 곧,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뭔가 알 것 같다고 믿었는데, 이미 알 것 같은 상태에 있던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저 만치 변한 모습으로 있다. 안다고 믿으며 말했는데, 말하고 난 순간, 반추한다. 도대체 난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지. 어떤 맥락을 알면서, 안다고 믿고 있는 건지.

말을 엮어 가고 만들어 간다는 건, 이런 긴장을 견디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낯설게 깨닫는다.

붉은 꽃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하다.

길을 걸을 때면 종종 아무 문장이나 만든다. “눈을 감으면 눈이 분시다.” 아냐, 아냐. “감은 눈 사이로 붉은 물결이 인다.” “붉게 핀 꽃이 시들며, 팔에 흔적을 남긴다.” “팔에 핀 붉은 꽃의 흔적들이,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종종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할 때마다, 숨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괜히 팔을 숨긴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월을 견딘다. 시간을 견디며 몸에 새긴 흔적들, 세월을 견뎠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세월 속에 색이 바래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라지진 않는다.

허수경의 시집에서였나, 공후인이란 악기는 악기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연주법은 남아 있지 않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남아 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왜.

언제나 그렇듯,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기 마련이다. 에둘러, 에둘러 몇 번을 에둘러 표현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몸에서 맴돌면,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을 바라본다. 그러면 다 잊는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아침에 학교에 왔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 왔듯, 계속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