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하다.

길을 걸을 때면 종종 아무 문장이나 만든다. “눈을 감으면 눈이 분시다.” 아냐, 아냐. “감은 눈 사이로 붉은 물결이 인다.” “붉게 핀 꽃이 시들며, 팔에 흔적을 남긴다.” “팔에 핀 붉은 꽃의 흔적들이,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종종 부끄럽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이 선명할 때마다, 숨고 싶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 괜히 팔을 숨긴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월을 견딘다. 시간을 견디며 몸에 새긴 흔적들, 세월을 견뎠음을 알려주는 흔적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세월 속에 색이 바래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라지진 않는다.

허수경의 시집에서였나, 공후인이란 악기는 악기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연주법은 남아 있지 않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은 남아 있는데, 왜 그랬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왜.

언제나 그렇듯,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기 마련이다. 에둘러, 에둘러 몇 번을 에둘러 표현을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몸에서 맴돌면, 붉은 꽃 피고 진 흔적을 바라본다. 그러면 다 잊는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아침에 학교에 왔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살아 왔듯, 계속 살아갈 것이다.

퇴고

딱히 수정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해도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문제가 있는 부분을 깨닫기 마련이다. 이건 이런 문장이 아니라 저런 문장을 써야 했고, 여기엔 이 단어 말고 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이건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식이고, 등등. 그냥 읽어도 이런데 수정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읽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글을 다시 읽을 때마다 프린트한 종이엔 붉은 펜이 지나간 흔적이 가득 남는다. (이미 출판한 글을 잘 안 읽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어제 메일로 보낸 원고를 어제 오후와 오늘 아침에 다시 수정해서 메일로 발송하며 더 이상 안 고쳐야지(=책으로 나올 때까지 안 읽어야지), 라고 다짐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었다. (근데 정말? 루인이 가능할까? 오늘이 인쇄소에 넘기는 날이라고 믿으면 가능해. -_-;;;) 그러며 며칠 전부터 읽다가 외면하기를 반복한 글을 붙잡았다. 며칠 전 늦은 밤에 들은 논평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으니, 논평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오고 또 다른 문제들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논평을 들을 당시엔 상당 부분을 버리고 다른 내용으로 채워야겠다고 구상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싶다. 그보다는 설명을 해야 함에도 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들을 채워야 한다는 걸. 그것도 루인의 맥락을 더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그날 그 자리에선, 기존의 글을 버리고 아예 새로운 글을 써야겠다는 말도 했다. 곧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다짐이 꽤나 중요한 효과를 낳았다. 기존의 글을 버리겠다는 다짐을 할 때, 문제점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건 오늘 다시 발송한 글에서도 마찬가지고.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다짐으로 수정하는 것과 아니다 싶으면 버릴 수 있다는 다짐으로 수정하는 것의 차이려나.

우선은 간단하게 수정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읽은 상황이고, 이제 본격적인 수정에 들어가려는 찰나, 슬쩍 외면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지만, 막상 하려니 선뜻 내키진 않는다. 블로그 글이 아니면 워드로는 글을 쓰지 않는/못 쓰는 루인을 살짝 원망한다. 이번 퇴고의 경우엔 워드로 해야 편한데, 또 그러지 못한다. 이 점이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외면하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오늘 안에 수정하고 워드작업까지 마쳐야 한다. 다른 읽을거리도 밀려 있고 수정한 틀을 다시 수정해야 하기에. 목요일이 수업인데 석탄일이라 쉰다는 사실에 감사!

연구실의 창밖은 반짝반짝 빛난다. 퇴고하기 딱 좋은 날이다. 글을 쓰기도 좋은 날이고. 태양이 빛나는 시간에 주로 글을 쓰는 루인으로선 더 없이 좋은 날이다.

+
근데 사실, 영화 보러 가고 싶다. 우헤헤. -_-;;

한 가지 주제로 글쓰기: 채식과 학벌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 판본은 초고란 전제 하에서 발송했다가 5일 만에 취소했다. 글을 취소한 날인 지난 토요일은 청탁 마감 날이었으니 꽤나 당혹스러웠으리라. 여러 가지로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판본을 쓰고 프린트를 했지만 역시나 폐기했다. 그렇게 (첫 번째 판본과는 완전히 다른)세 번째 판본을 썼고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고 메일로도 보냈다. 첫 번째 글은 기획을 잘못 해석한데다 글 자체도 어정쩡했다. 두 번째 판본은 첫 번째 판본을 폐기하면서 새로 구상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는 욕심이 보여 폐기했다. 오직 한 가지 얘기만 하겠다고 다짐하고 세 번째 판본을 새로 썼다. 일요일인 어제 쓰고 오늘 낮에 메일로 발송했다. 루인에게야 모든 글이 초고이니 계속 고쳐야 하지만(발송하고 나서 다시 읽으며 또 퇴고를 했다는;;;) 틀 자체는 안 바꿔도 될 듯 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어제 아침에야 비로소 기획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간 기획의도를 잘못 파악한 측면이 있었고(몇 가지 지점들은 파악했지만, 결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었다) 어떤 강박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루인의 많은 글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 편의 글에 다 쏟아 붓는 편이라면, 이번 글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주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글엔 “루인의 글”이란 어떤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ㅋㄷ의 지적처럼 첫 번째 판본은 “루인의 글”이란 느낌이 없었다. (ㅋㄷ, 고마워요!)

이렇게 세 가지 판본을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건, 한 편의 글엔 한 가지 얘기만 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쓴 많은 글들이 한 편의 글에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풀었고(마치 이 글이 루인의 마지막 글이자 유일한 지면이라도 되는 냥) 그래서 다소 산만하거나 중구난방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면, 이번 글에선 어떻게든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다.

선택한 주제는 채식과 학벌이었다. 아니, “채식으로 읽는 학벌, 학벌로 읽는 채식”이 더 정확하겠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루인으로선 채식과 학벌이라는 관계가 꽤나 선명한 편이고, 채식과 관련한 최근 고민 역시 이 지점이기에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재밌었다. 그런 동시에 이 주제가 이번 기획의도를 꽤나 잘 반영할 수 있겠단 느낌도 있었다. (내용을 압축한다면 “음식의 정치학“에 있는 내용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이번 글은 블로그에 공개할 수는 없는 성격이라서;;; 물론 공개하고 싶은 바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글을 쓰면서, 채식과 학벌의 관계를 좀 더 집중적으로 다뤘고 그래서 스스로 뭔가를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여러 교차지점들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이 부분은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고 다른 지점들과 같이 얘기해야 해,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지만, 그걸 매끄럽게 풀어낼 능력이 현재의 루인에겐 없고, 글의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일부러 쓰지 않기도 했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제한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알고 있으니까….) 이런 “쓰지 않음”을 통해 루인의 위치와 이 글의 한계를 분명히 할 수 있고, 괜히 이것저것 다 언급해서 비판을 피해갈 여지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 측면이라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채식과 관련한 다른 많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지 않고, 채식과 학벌의 관계에 집중해서 글을 전개했다.

그러며 주제를 좁혀야 할 필요성을 조금은 느꼈달까. 주제를 좁혀서 글을 쓸 필요가 있다는 선생님들의 지적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번 글쓰기 작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다른데 있다. 그것도 “루인의 글”같지 않은 그 글, 즉 폐기한 그 글 속에 있다. 루인에게 가장 중요한 지점. 하지만 이 지점은 친구에게 먼저 말하고 여기 써야지. 이렇게 하겠다고 딱히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고 소중함의 표시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나누고 싶은 얘기가 참 많은데….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만 만나는 건 아니지만….

+
확실한 건, 이렇게 나온 세 번째 판본과 같은 글은 다른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글이란 것. 특히나 “루인”이란 이름으로 외부지면에서 쓸 수 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고. 그래서 이런 기회를 준 친구에게 더욱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