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과 사례 분석을 통해 본 성적 소수자 대상 ‘혐오 폭력’의 구조에 대한 연구

작년 봄부터 시작해서 비공식적으로 올 2월 초에야 끝난 연구 프로젝트 보고서가 2월에 나왔습니다. 보고서 제목은 “판결문과 사례 분석을 통해 본 성적 소수자 대상 ‘혐오 폭력’의 구조에 대한 연구”입니다. 보고서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혹은 제 블로그의 writing 메뉴에서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부족한 보고서지만 한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향의 LGBT/퀴어 혐오를 유형화하고 이를 통해 혐오 폭력이 발생하는 방식을 탐문하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LGBT/퀴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혐오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패닉 방어(게이 패닉 방어, 트랜스 패닉 방어) 논의를 추가했고, 2000년대 들어 발생한 혐오 사건이나 행동을 정리하는 연대표도 작성하여 실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한 번 즈음 읽어보시길…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패닉 방어 파트를 책임지고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본 보고서는 공저로 작성했고 서로 각자가 책임지는 파트가 있었지만 서로 의견을 제안하고 서로 논의했기에 각 파트의 저자를 밝히긴 애매하지만 아무려나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 해 저의 강의를 들으셨던 분이라면 패닉 방어 파트를 제가 썼을 것이란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듯하고요. 제가 책임을 지고 썼지만 저의 색깔은 가급적 줄였고요. 공동 논문이니 필요한 부분이지요.
그런데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헤럴드경제란 신문사에서 저희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표절하는 연속기사를 냈기 때문입니다. 시리즈 제목은 [호모포비아 논쟁]인데 많은 부분이 저희 연구결과보고서를 인용이나 출처 표시 없이 마치 기자가 직접 조사한 것처럼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은 패닉 방어 관련 기사입니다. 보고서 내용을 고스란히 가져다 썼습니다. 사실상 요약 정리 수준의 기사를 썼는데 출처를 일절 밝히지 않아 표절입니다. 빡쳐서 어떻게 문제 제기를 할까 진지한 고민도 하고 있고요.
해럴드경제의 김진원 기사가 표절한 기사의 제목은 “[호모포비아 논쟁②] 트랜스젠더는 죽여도 된다? ‘패닉 방어 전략’ 아시나요”고 주소는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60302000789 입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면 정말 SNS를 쓰지 않는 게 아쉽지요. 앞으로도 쓰지 않겠지만.
기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는 수고를 해야 할까 말까 고민입니다.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

작년 언제부터인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와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혼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트랜스젠더퀴어로 일괄적으로 쓰고 있다. 아직 입에는 잘 안 붙어서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거의 10년을 트랜스젠더라고만 말해왔으니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단독으로 쓰는 글에선 어지간하면 트랜스젠더퀴어로 쓰고 있다.

사실 트랜스젠더퀴어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붙인 용어라고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정확한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나는 특별히 의도를 쓰지 않고 LGBT/퀴어란 용어를 그냥 쓰는 등 이런 일이 많으니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어쩐지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해선 몇 번 질문을 받아 정리를 해야 할 듯했다.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 동안 나를 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며 지내왔고 이를 통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는 젠더 인식론을 구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내가 말하는 트랜스젠더는 또한 젠더퀴어기도 하다. 아울러 나 자신이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기도 한데 내겐 이것을 분리해서 설명하는 일이 매우 불편했다. 트랜스젠더’면서’ 젠더퀴어가 아니라 그냥 트랜스젠더퀴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이유에서만 이 용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란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쓰이는 방식을 살피다 보면 이 두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을 포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현재 시점에서의 트랜스젠더, 혹은 의료적 조치를 하고 자신을 (트랜스)여성 아니면 (트랜스)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가입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런 식의 설명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말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아울러 자신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설명하는 이들 역시 특정 순간엔 이런 식으로만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런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 젠더퀴어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호르몬만 하건, 수술을 하건 의료적 조치를 원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있었다. 아울러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어떤 순간엔 구분하는 듯하지만 젠더퀴어의 복잡한 경험 맥락에서 어디서 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나 자신은 이런 구분과 분열, 모순을 어떻게 하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부연설명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겪지 않으면서, 그 분열과 모순을 내 삶이자 내 몸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란 고민을 했다. 그것이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즉 의료적 조치를 하건 하지 않건,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만 가끔 틈새를 드러내건 이원젠더 규범에 저항하며 다른 방식으로 젠더를 구성하건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저항하고 때때로 능청스럽게 무시하는 그런 일시적이거나 지속적 삶의 태도, 젠더 경험, 인식론을 설명하고 싶어서 트랜스젠더퀴어란 용어를 채택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강한 우려가 더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표한 염려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대략 2000년대 어느 순간까지 용어의 대립(‘대립’이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은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젠더였다. 트랜스섹슈얼은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이고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와 상관없이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젠더를 표현하는 사람을 포괄했다(학제 기준으로는 지금도 이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즉 지금 시점에서는 젠더퀴어가 당시엔 트랜스젠더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트랜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하거나 원하고, 전형적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부합하거나 부합하려 애쓰고,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스스로를 생산성 있거나 상품성있는 몸으로 재현/구현하고자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젠더퀴어는 바로 그런 정치학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이미 1990년대부터 사용한 개념/용어지만) 마치 새로운 것처럼 등장했다. 즉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 구도가 트랜스젠더-젠더퀴어로 바뀐 느낌이다. 나의 염려는 단순했다. 젠더퀴어가 또 다시 범주를 구분하고 범주를 확정하는 용어가 되지 않기를,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쓰이는 방식처럼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용어가 지금의 젠더퀴어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금의 정치적 인식론을 고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선택한 용어가 트랜스젠더퀴어다.
그러니까 이성애-이원젠더 체제에 저항하고 비판하고 농담처럼 무시하는 그런 인식론적 태도를 지속할 수 있길 바라는 어떤 입장이 있다.

기억력

나는 어쩌면 앞으로 내 기억력과 더 많이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고민을 하고 있다.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잊고 망각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글을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아득한 느낌,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어렴풋한 형상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런 상태다. 그리하여 나는 나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내 기억력이 약해지거나 흐릿해지는 이 기억력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사실마저 어느 순간 잊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