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의 쾌: 우울증

“불쾌의 쾌”라고 프로이트옹은 말한 적 있다. 켁. 치유 혹은 치료를 계속해서 미루며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그것을 지속하고 이런 과정에서 쾌락을 느낀다는 뜻이라고, 날림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사람에겐 불쾌이지만 자신에겐 쾌락이니 불쾌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에게(도) 불쾌이기에 쾌락인 셈이다. 그래서 “불쾌의 쾌”인 것이고. 이와 관련한 예로, 프로이트옹은 아이들이 대변을 참으며, 그렇게 참는 과정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우울증이, 사실은 최고의 쾌락임을 깨달았다. “우울해~!”라는 외침은 한편으론 “즐거워”라고 말하는 의미라는 것도 아울러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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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말하는 것

어떤 행동에 앞서 발생하는 두려움, 걱정, 불안은 내 몸에 축적되어 있고 침전물로 가라 앉아 있는 관습, 금기, ‘경험’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다. 바닥에 침전물이 가라 앉아 있는 비이커의 물을 저어 침전물들이 회오리처럼 일어나듯. 두려움은 그 동안 내가 어떤 환경 혹은 관습(승인과 금기) 속에서 살았고, 어떤 규범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살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다. 동시에 나를 둘러싼 여러 지배규범들과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자신의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축적되어 있고 깊히 가라 앉아 있어서 없는 것만 같은 흔적들, 금기(인 동시에 승인)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하는지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무엇을 입을 지를 망설이는 과정이 이러하고 루인의 매니큐어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보는 과정이 이러하다. 한 편으론 매니큐어를 심드렁하게 드러내고, 다른 한 편으론 매니큐어를 한 손톱을 숨기려 한다. 루인의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짐작할 수 있을 뿐, 알 수는 없다), 루인의 외형과 매니큐어는 언제나 어떤 충돌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거의 매일 접하는 김밥가게 주인은 매일 루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루인의 손톱을 볼 때마다 매번 표정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표정을 접할 때마다 루인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만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루인은 이런 루인을 바라보는 루인에게 이래저래 변명한다.

필요한 건, 허무맹랑한 “자부심”이 아니라 이 두려움을 읽을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이다. 그리하여 이 용기와 상상력, 두려움이 사실은 자부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움, 사랑, 우울증

진이정은 지장경에서 그리움이란 단어를 발견하고 울었다고 했다. 보살도 그리움에 울었다고 했던가, 그리움으로 윤회한다고 했던가….

북향인 사무실에서 버틀러를 읽다가 (짝)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상당히 위로 받았다. 그러며 진이정이 떠올랐다.

만약 무언가를, 발달단계처럼, 어떤 단계로 나눠서 설명해도 괜찮다면, 우울증을 사랑의 “완성”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울증이 자기처벌이 아니라 자기보상의 형태라면, 대상을 상실한 혹은 대상에게 다가가길 포기한/고백하지 않는 사랑의 우울증은 가장 멋진 형태의 “보상”임을 깨달았다. 당신과 내가 합쳐진 상태, 더 이상 당신과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 더 이상 그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상태…. 하긴, ㄹㄲ은 (“이성애”) 사랑 자체가 우울증이라고 말했지만[물론 이건 전후 맥락을 몽땅 무시하고 쓴 것임].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은 그리움인 것 같다고…. 그리움만이 우리를 윤회케 한다고 했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힘, 우울증의 윤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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