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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은 이미 몇 번 했다고 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두렵고 망설이고 그래서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음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전혀 모르는,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고 예측했다고 해서 그런 예측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건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절친한 친구라고 해서 커밍아웃이 쉽고 낯선 사람이라고 해서 커밍아웃이 어려운 건 아니다. 때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여긴 사람보다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그래서 그간 친밀했던 사람과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도 평생을 만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은 바람을 품기도 한다. 그러니 커밍아웃은, 상대와 과거에 어떤 관계를 엮어 왔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커밍아웃을 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가 관계를 맺어가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리니 커밍아웃을 한 그 순간은 어떻게 잘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만남까지는 불안하고 후회하고 기뻐하는 감정을 반복한다. “잘했다”고 다독거리고 “괜찮다”고 위안하고 그러면서도 더 이상 그 사람과 관계를 엮어 갈 수 없을까봐 불안에 떤다. 그렇기에 다음 만남까지는 불안하고 불안하다. 그 순간엔 상대와 소통을 했다는 느낌이 있더라도 헤어진 순간 상대는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에게 트랜스라고 커밍아웃을 했을 때, 친구의 반응에 고마웠다. 친구는, 그 순간만은 조금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기뻐했고 친구의 걱정은 어느 정도 공개적인 커밍아웃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이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다음날, 문자를 통해 축하의 말을 보내줬다. 그땐 그저 좋았는데 지금 다시 고민하면, 너무도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사실, 그 누군가에게 루인의 블로그를 알려준다는 건, 언제나 망설이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얼마간의 불안을 안고 말하는 건데, 루인의 입장에선 [Run To 루인]을 알려 준다는 건, 곧 커밍아웃을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물론 커밍아웃 때문 만은 아니지만. 그리고 [Run To 루인]을 알려 줬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땐, 불안과 포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종종 알려 주는 건, [Run To 루인]을 모르고선 루인과 소통하기가 힘든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선 소통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밍아웃은 언제나, 망설이고 멈칫거리며 다시 한 번 고민하는 일이다.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과 일정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커밍아웃을 고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익숙해지는 일이냐면 그렇지 않다. 차라리 할수록 더 힘들고 더 많은 망설임을 겪는다.
어제, 어쩌면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소통할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커밍아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무슨 얘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빠르게 눈치 챈 덕분에, 얼결에 한 셈이다(혹시나 오해할까봐 적으면, 아웃팅은 아니다). 루인의 관심 분야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루인이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활동한다는 걸 말할 일이 생겨 말했고, 이 과정에서 커밍아웃을 한 셈이다. 상대방이 감수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세한 불안에 떨고 있다. 상대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커밍아웃 이후, 전혀 낯선 사람 마냥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커밍아웃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루인이 취약해서이다. (그리고 이 취약함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런 바람을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