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루인의 힘

갈망과 바람이 강하다보면 어느 순간 부인과 부정으로 변한다. 바라지 않는다고, 원하지 않는다고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다고. 부인과 부정은 나와 당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며, 애도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런 시도는 루인에게 언제나 부질없는데, 부인과 부정을 하고 있는 순간은 이미 당신과 루인이 하나가 된 상태이고, 그래서 애도할 수 없는 상태이며 우울로 변한 상태이다. 이렇게 우울로 변한 상태에선, 더 이상 당신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데,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당신과 루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루인이 하나가 된 결과로 발생한 우울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고 당신이란 원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무엇이 원인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만나지 않길 바래. 우울은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 되니까.

[#M_ 그리고.. | 왜!.. |
그나저나 일련의 이런 우울과 관련한 글들은 왜 누군가의 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일까. 혹은 왜 자꾸만 누군가의 분석에 기대어 루인의 삶을 구성하는 걸까._M#]

지리멸렬

그러고보면 지리멸렬이란 단어는 참 아름다운 말이야. “갈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됨.” 그래. 잡을 수 있는 몸이 어디있겠으며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어디있겠어.

마음 심(心)이란 한자는 단 네 개의 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두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 사실 그래. 마음을 하나로 다잡아 먹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꿈이야. 언제나 흩어진 것이 마음이고 몸인 걸. 그래서 지리멸렬이란 말은 참 예뻐.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고 언제나 그렇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뜻하니까.

지리멸렬. 지리멸렬.

시간을 견디다

지리멸렬한 시간을 견디고 있어.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시간에 익숙해질 즈음엔 다시 무뎌진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이 정도의 멸렬함은 아무렇지 않은 걸.

불필요한 기대는 언제나 더 깊은 쾌락을 불러. 그러니 이런 루인의 쾌락을 뭐라고 하지마. 그저 매일같이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하면서 그런 기대와 희망을 버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서 살고 있어. 이런 일상의 반복. 희망이라는 중독 속에서 희망을 버리고 그것의 이면에 숨겨진 ‘현실’을 직면하고 있어. 그래, 고작 이 정도가 루인인 걸.

며칠이면 된다는 걸 알아. 그러니 이 정도에서 그만할게. 그 뿐이야. 그저 습관 같은 것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지금도 그런 걸. 이런 상황에서도 분석하고 있는 루인인 걸. 다 쉬운 일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