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고민 중 하나는 누가, 왜, 어떻게 명명[naming]하는가, 이다. 왜냐면 어떤 사람 혹은 현상을 명명하는 과정을 통해 모순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모순이라고 규정해버리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루인을 포함은 상당수의 트랜스들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경험하는 갈등과 경합 보다는 트랜스젠더라는 그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경합이 더 많다고 얘기한다. 주민등록번호 체제를 통해 할당 받은 성별과 루인이 인식하는 성별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불일치라고 여긴 적이 별로 없었고, 그런 루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많은 트랜스들이 좋아하는 상대의 성별을 통해 자신의 젠더정체성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럴 때도 루인은 루인이 인식하는 성별과 상대의 성별을 통해 어떤 “모순”이 있다고 여기거나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즉, 이전에 좋아한 사람을 그때는 ‘이성애’로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면 ‘레즈비언’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모순’이거나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지점들이 “모순” 혹은 “갈등”과 “문제”로 다가온 건, 페미니즘을 통해 젠더라는 용어를 배운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즉, 트랜스젠더라는 용어와 루인이 만나고 그것을 일치 혹은 그것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명명한다는 건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모순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몸앓이를 하고 있다. 물론 모든 명명의 과정이 이런 건 아닌데, 어떤 명명은 자신을 해명하고 설명하며 자신을 주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명명은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모순 없음”을 “모순 있음”으로 만드는 과정임 역시 부인할 수 없다고 느낀다.
명명의 폭력성은 너무도 많아서 진부하리라 여기지만, 페미니즘의, 트랜스젠더 정치학에서의 명명 역시 폭력적일 수 있음을, 그런 과정을 통해 무엇을 삭제하고 무엇을 예외나 이상한 것으로 만드는 지를 함께 고민할 필요성을 다시금 고민한다고 할까. 혹은 도대체 왜 명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 출발점부터 다시 물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루인의 고통과 쾌락은 트랜스라는 언어를 만나면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