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계급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6.10.01.일. 아트레온 6회 21:25, 2관 3층 D-17

극장에서 걸어 나오며, 루인이 영화평론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느꼈다. 종종 영화를 읽고난 후, 분석 같은 거 하지 않고 그냥 “재밌었다” 혹은 “별로였다” 정도의 간단한 언급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영화가 그렇다.

이 영화는 슬프긴 하지만 [각설탕]만큼 울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면 딱히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도 아닌 듯 하고. 뭐랄까, 뭔가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뭐, 나쁘진 않다. (이 영화는 상당히 ‘착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읽기에 따라선 할 얘기가 상당히 많기도 하다.)

사실, 이 영화는 루인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만한 영화였다.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낼 뻔 했다. 일테면 유정(이나영 분)이란 캐릭터는 루인이 이입하기 제격인 인물. 자살미수, 주변에 무감, 가족과의 불화 혹은 (무)관심 등등의 모습들에서 곧장 빠져들 뻔 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밀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건 유정의 계급적 위치 때문이었다. 일테면 비록 교수(강사?)라곤 하지만 굳이 직업이 없어도 “엄마”의 재산을 통해 먹고살 수 있는 상태, 화가 나면 다른 사람의 새로 산 수입차를 부숴도 되는 지위. 이런 모습들은,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이런 모습들 때문에”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영화에선 계급적 지위 차이에 상관없이 아픔은 공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글쎄다.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에 감응하는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글쎄”다.

그나저나 영화는 전체적으로 예쁘다. 화면을 잘 잡았고 종종 정말 멋진 장면들이 많다. 일테면 면회소에서 카메라는 유정만을 잡는데, 투명유리벽에 윤수(강동원 분)의 모습이 비춰서 서로가 마주보고 있음에도, 마치 서로 다른 자리에 있고 그래서 서로를 떠올리면서 예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장면이 멋진 건 나중에, 케이크 사진과 겹치면서 더욱 아프게 남는다. 그리고 막연히 “인기 있는 청춘스타”라고 여겼는데, 강동원과 이나영 의외로 연기가 괜찮다.

잘 살아보세: 섹슈얼리티, 근대국민국가

[잘 살아보세] 2006.09.29.금, 아트레온 6회 21:10, 8관 11층 F-5

※학생 1,000원 할인, 첫 회 상영작은 4,000원으로 바뀌었다. 역시 주변에 다른 극장이 생기고 볼 일이다. 물론 루인은 “학생”이 ‘아니’지만, 학부시절 학생증을 여전히 가지고 다닌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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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든 것은 1970년대 출산통제를 소재로 다루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심드렁하게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영화를 읽고 난 지금, 그냥 지나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이 몸을 스친다. 가족계획요원인 박현주(김정은 분)의 연기는 영화에 집중하는데 방해할 정도로 어색하고, 부분적으로 흥미롭고 재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지루한 스토리는 질질 끈다는 느낌을 준다. 한 편의 영상이야기로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2006년에 만들어 개봉하는 1970년대라는 장면, 2006년 식의 1970년대 재현은 과장인 걸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변희봉씨의 연기를 빼면 전체적으로 목소리부터 행동까지 다소 과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행동부터 말투까지. 이런 식의 재현이 영화에 ‘현실감’을 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과거는 과장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은 겉돈다는 느낌 혹은 붕 떠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점들이 있다. 물론 루인의 이런 느낌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루인과는 다를 거라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개개인의 맥락에 따라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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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보세”와 같은 의미의 말들은 루인이 어렸을 때도, 아니 이런 강박들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잘 살아야한다”는 말. 이런 말은 이성애혈연가족들을 통해 지금도 빈번하게 듣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잘 살아보세”라는 말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박정희식의 개발일변도의 경제성장만이 잘 사는 것이라고 얘기할 때, 그래서 GNP나 GDP가 높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환상 속에서 “잘 살아보세”의 잘 사는 것은 국가경제성장과 돈이 많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에서, 국가경제성장이 곧 개개인들의 경제적 안정화와 동의어는 아니다. 비정규직과 고용불안이 만연한 상태에서, 잘 산다는 건 기업인들이나 재벌들이 잘 사는 것이지 반드시 노동자들도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국가경제가 성장하면 노동자들도 잘 살 것이라고 홍보하지만 그건 지금까지도 반복하고 있는 홍보문구일 뿐이다.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비록 빚이 억 대에 이르지만, 그래서 “로또라도 할까” 하는 농담을 하지만, 돈이 많음이 곧 잘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잘 산다”의 의미는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빚이 있는 상황에선, 로또라도 당첨되어서 빚만 다 갚으면 잘 살 것 같지만 그러고 나면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바뀌어 있다. 비슷한 상황에서도 개개인의 맥락에 따라 잘 산다는 의미가 다를 때, “잘 살아보세”라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로 언어구조와 고민의 방향이 변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잘 살아보세”라는 당위성의 문구 속에서 “왜 잘 살아야하는가”, “꼭 잘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차단될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꼭 “잘 살아야” 하는가. 좀 “못 살면” 안 되는가.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이런 질문구조를 꽤나 진부한 이야기구조로 풀어간다. 그래서 솔직히 좀 지루한 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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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출산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를 통한 ‘허구’의 재현이지만(뭐 그렇다고 이 말이 “진짜 현실”은 따로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근대국민국가의 기획에 따라 개인의 몸이 어떻게 통제되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시대의 강박은 항상 있었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피임을 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죄라는 인식도 또 하나의 인구정책이다. 즉 박정희식 개발정책에서 인구정책이 어떻게 발생하고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인구정책이 변해가고 그 과정에서 어떤 저항과 협상이 있었느냐를 읽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재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출산률 최저라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출산통제/인구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같이 읽는다면 그렇게까지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이성애만을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이 지점은 잘 모르겠다.) 이 영화를 읽기 위해선 1970년대라는 것, 그래서 TV는커녕 라디오도 없는 마을에서 할 일은 “밤일과 낮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밤일”이라고 부르는 성행위는 지금의 의미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그런 지점에서 성행위에 좀 더 표면적으로 국가가 개입한다. 이런 국가의 개입을 표면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존의 개입 방식에 반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구정책을 개개인들 모두가 당연시할 때, 그것은 국가에 의한 권력통제라기 보다는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권력으로 의미가 변한다. 개개인들이 그 권력을 실행하고 지속한다. 그런 권력수행을 국가가 다른 식으로 바꿀 때, 없는 것 같은 통제가 갑자기 생겼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건, 국가의 농업정책이나 축산정책에 따라 업종을 바꿨다가 빚더미에 오른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이 지점과 겹치면서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두 명의 주인공(박현주와 변이장)은 국가의 정책에 충실하고(그것이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하나의 협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느낀다. 박정희는 밀어붙이라고 말하고, 변이장(이범수 분)은 출산율 0%를 약속하고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이웃이 임신하자 마을에서 쫓아내고, 정관수술이 풀려서 임신했음에도 변이장의 부인이 임신하자 불륜으로 갈등하고. 어떤 일을 할 때면, 그것은 일단 하고 보자는 식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토론이 있은 후에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일에 따른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왜 그 일을 하는지, 그 일을 통해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그래서 이후엔 어떤 식으로 할 건지와 같은 준비 없이 일단하고 보자는 식은 지양하는 편이다. (그래서 루인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 무조건 밀어붙이기 식의 사업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쌈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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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읽고 난 감정은 양가적이다. 읽고 나서 그다지 재미있다는 느낌을 안 받았기에 그렇고 이 글을 쓰면서 뭔가 정리할 시간을 줬다는 점에서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