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떠난 몸: 선천성 그리움 중독증

당신이 그리워요.
이렇게 서늘한 날, 서늘한 기운이 몸을 타고 놀면
당신의 이름을 가만 부를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무엇 하겠어요.
그냥 당신을 그릴 뿐이죠.

킥킥, 웃으면 당신이 떠올라요.
당신, 부르며 흩어지는 몸들. 어찌할 줄 몰라
사방으로 방황하는 몸들. 몸을 떠난 몸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디로 가면 몸 떠난 몸이 몸의 공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킥킥 웃는 사이에 몸은 흩어지고 당신은 어딘가로 가버리죠.
이름만 희미하게 남았어요.
아무 것도 없고 이름만 남았어요. 이름이 곧 존재를 규정하는 삶에서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무엇을 규정하고 있는 걸까요.
어떤 틀로 당신을 찍어내고 있는 걸까요.
흩어진 몸은 어떤 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걸까요.
어떤 거푸집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걸까요.

당신, 가만 부르며 당신의 거푸집을 만듭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서 웅크리고 앉아요.
킥킥, 킥킥킥, 키득키득 킬킬킬
참지 못할 웃음균에 전염이라도 된 마냥
당신, 킥킥 웃으며 불러요.

몸 떠난 몸이 찾아가요,
부르면 금방 부서질 것 같은 얇은 관…

천재라는 말의 불편함: 해석의 변화

한때, 천재라는 명명에 엄청난 질투를 품은 적이 있다. 지금이라고 덜할까? 특히 고등학생 시절까지,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닮고 싶었고 스스로도 천재이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좌절’하면서 선망했다.

그 중 가장 선망했던 인물은 랭보. 푸훗. 그땐 랭보가 좋았다. 시 한 편 제대로 안 읽었고 어떻게 해석도 못했지만 랭보가 좋았다. 이유는 하나, 천재이기 때문이다. 랭보의 삶을 그린 [토탈 이클립스]란 영화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을 땐 너무도 읽고 싶었지만, 루인의 집에서 영화는 곧 대학생 이상의 관람가란 분위기였기에 비디오를 빌려 즐긴다는 건, 감히 못할 일이었다. ‘동성애’자란 얘길 읽었을 땐, 더 이끌렸다. (누군가 랭보가 ‘동성애’자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말에서 비난의 뉘앙스를 느꼈기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회피했던 기억도 있다. 커밍아웃의 정치학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 그땐 두려움이었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이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진 않는다. 언어가 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천재를 선망한다는 건, 사실 루인으로선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뱁새가 황새를 쫒아 가는 격인지 황새가 뱁새를 따라하는 격인지 알 수 없지만 루인은 애시 당초 천재가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고 그럴 ‘운명’도 아니(었)다. (물론 ‘운명’은 고정되어서 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경합하고 협상하는 과정이다.) 그랬기에 누군가 루인에게 천재라는 말을 해주길 바랐고 스스로가 천재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아는 상황에서 이건 결코 이룰 수 없었다.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들부터도 루인을 무시하는 상황이었는데.

돌이켜 다시 읽으면, 천재가 되고 싶다는, 천재를 향한 선망이 자기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의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자의식과 자존심만 강해졌지만 동시에 너무도 취약한 인간이 되었다. 언제나 전전긍긍하고 눈치를 보면서 동시에 주변에 완전히 무관심하고. 가장 큰 문제는 따라하기였다. 천재를 향한 선망은 루인의 재능을 읽기 보다는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의 행동(재능을 따라할 수는 없으니까)을 따라했고 겉멋이나 들었다. 이쯤 쓰면, 부끄럽다는 말 정도 할 수 있겠지만, 별로 부끄럽지 않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바로 그런 행동이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었기에 그때의 모습을 부정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고 몸앓는다.

천재를 선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선망이 자기발전을 가로막는 한 요인이긴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욕심만 많고 “눈”만 높아 언제나 일정 이상의 수준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길 다그치고 그래서 자뻑과 자학의 접점에서 갈팡질팡하고. 하지만 바로 이것이 자랄 수 있는 힘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바로 이 갈팡질팡하는 행동이 루인을 자라게 하는 힘임을 안다.

그 시절도 지금도 루인에게 천재는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을 의미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구나 놀랄 법한 재능을 발하는 사람. 그래서 그땐 그렇게 선망했고 지금은 욕으로 해석한다. 그 시절과 지금의 언어가 변했다.

일테면 공유하면서 좋아하는 누군가(가수? 작가? 누구든!)를 얘기할 때면, 정말 천재 같다니까, 란 감탄사를 듣곤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말이 그 사람을 향한 칭찬이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건.

이 느낌은 이른바 “타자성”이라고 불리며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갖은 불이익과 고통들을 고민하면서부터이다. 이른바 빼어난 트랜스이론가를, 이반queer이론가를, 페미니스트를, 정희진 선생님을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시간 동안 겪었을 아픔과 상처을 “천재”라는 말로 칭찬할 수 있을까.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의 산물이며 그런 상처들을 언어화하는 쾌락의 과정인데 “천재”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그건 참 윤리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더구나 그 앎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앎인데,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타고난 재능으로 부르며 사회 상황과는 무관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건, 더더욱 문제가 많다고 느낀다.

※여러 날 전,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블로그에 쓰기로 했던 글. 아마 한 달은 아니어도 그 정도의 시간은 지난 것 같아… 쿠헹~

바쁘지만, 즐거워

일테면 요즘의 생활은, 5분 거리에 있는 우체국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다. 저녁 따위 안 먹고 하루에 한 끼로도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득 담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종종 바쁘다고 징징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힘들지는 않다. 힘들다고? 아니, 오히려 즐겁고 너무 좋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말, 맞다. 종종 이 말은 어쩔 수 없는 ‘진리’라고 느낀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너무 많아도 즐길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말, 좋은 말이다. 만약 별로 안 좋아하는 텍스트와 놀아야 한다거나 별로 안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징징거릴 정도로 바쁘게 해야 하는데도, 즐거울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루인은 언제나 하고 싶은 일만 하는 편이다. 학부 때 수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것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지 누군가 권해서가 아니었다. 수학 담당이었던 고3 담임도 말렸지만, ‘이성애’혈연가족의 부모들도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했고 그래서 중간에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운 배움이었다고 느끼고 있다. 루인에게 수학을 배운 배경은 너무도 중요한 바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쁘다고 징징거리지만, 즐겁다. 재밌다. 핵심은 이것. 쾌락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아마 쾌락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런 생활방식을 엮어가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냥 수업교제는 읽는 둥 마는 둥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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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활 와중에 재밌는 걸 깨달았다. 수업 시간에 발화를 한다는 것과 수업 사람들과 친밀함을 느낀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

두 개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한 수업 시간엔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다. 선생님이 시키면 간신히 말할까, 그냥 침묵. 하지만 그 수업은 재밌고 그 수업 사람들과도 친밀함을 느끼며 지낸다. 다른 학교에서 듣고 있는 수업이다. 반면 (루인의 입장으론) 꽤나 많은 발화를 한다고 느끼는 다른 수업에선 수업은 재밌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는 별다른 친밀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서먹함을 느낄 정도다. 현재 등록금을 내고 있는 학교에서 듣는 수업이다.

이 차이는 여러 이유로 생겼을 테다. 친밀함을 느끼는 수업은, 조모임을 몇 번 했고, 수업 사람들과 저녁을 여러 번 먹었고 등등. 못 느끼는 수업은 그저 수업 시간에 접하는 것이 전부. 세미나든 수업이든 그것만으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건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단순히 오프라인의 모임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핵심인건 아니다.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루인에게의 핵심은 이것이다. 친밀함을 느끼는 수업은 커밍아웃을 했고, 그래서 종종 이런 얘기를 하고, 못 느끼는 수업은 안 했고, 공공연한 혹은 “세련된” 젠더혐오/공포 발언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