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수업 예습에세이. 일종의 리뷰 혹은 독서일기;;;
조순경씨의 논문은 여기라고 해봐야, 깨져서 안 됨ㅠ_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예습에세이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루인은 저자의 입장과 루인의 입장이 갈등하는 그 지점을 쓰는 편이다.
바쁘다고 블로그에 아무 글도 안 쓰기 애매할 땐, 역시 이런 글이…-_-;;;
2. 조순경 <한국 여성학 지식의 사회적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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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수업을 통해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배운 후, 느꼈던 괴리와 갈등은 이후 고민의 중요한 지표이다. 젠더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상당한 간극을 이루고 있는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동안 기존의 젠더 설명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젠더에 억지로 끼워 맞췄고, 어떤 ‘경험’들은 지우거나 없는 것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변태스럽고 부끄러운 경험일 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그래서 기존의 젠더 인식에 별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 갈등을 그냥 두기엔 균열이 컸다. 기존의 젠더 설명에선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남성’이나 스포츠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입(고 싶어 하)는 ‘여성’을 설명할 수가 없고 단지 “변태행위의 예외”일 뿐이었다. 이런 불일치, 간극, 균열지점, 갈등 등을 고민하는 와중에 조한혜정 선생님의 <탈식민지 시대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읽었고 그 과정에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기존의 지식/인식체계와는 맞지 않음에도 기존의 지식으로, 다른 누군가의 ‘경험’으로 해석한 지식으로 맥락이 다른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는 행위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벨 훅스의 글이 매력적이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읽었을 땐, 왜 벨 훅스가 번역되지 않았을까, 로 혼자서 흥분했다. [Ain’t I A Woman]이나 [Feminist Theory]와 같은 책은 탁월한 통찰력을 주는데, 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글만 번역되고 배우는 걸까.
모든 지식 생산 과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왜 다른 많은 문제들 중에서 그것을 묻는가, 그 질문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가와 연동한다. “수입 이론”은 왜 특정 이론만 수입하는 걸까, 이런 선별과정은 어떤 맥락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트랜스/젠더/이반queer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 국내에서 생산한 이론이든 번역한 책이나 논문이든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문 상황이다.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가 “가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트랜스 이론을 통해 젠더를 다시 읽는 작업이라든가 트랜스 담론을 논의하는 작업은 아직도 극히 드물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서 ‘현상’이 되는 건 아니며, 어떤 현상이 가시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이론적 논의를 생산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현상이 드러나도 그것을 통해 언어화하는 작업, 앎을 생산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리수를 통한 트랜스의 가시화는 젠더를 다시 질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사람도 있더라”는 식으로, 젠더의 예외를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식의 유입과 생산, 그리고 ‘현실’의 설명은 언제나 특정한 요구/권력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현실’은 고정되고 모두에게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며 어떤 입장으로 ‘경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성애’자들에게 “호모포비아”는 뉴스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낯선 일이지만 이반들에겐 “호모포비아”가 일상 ‘경험’일 때, ‘경험’하고 구성하는 ‘현실’은 다르다. 이반이라고 모두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내용 역시 다르다. 언제 어떤 앎으로 삶을 해석하느냐로 과거는 끊임없이 변한다. 기존의 젠더 해석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시절의 트랜스/이반 ‘경험’은 언제나 지워야할 일이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경험’이었다. 루인에게 트랜스/이반 ‘경험’은 일종의 발굴(‘창조’, ‘발명’)과정인데, 새로운 앎/언어와 만나면서 잊고 있던 혹은 삭제해야만 했던 과거를 되살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과거를 계속해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젠더구조를 당연시 하던 시절엔 중 ․ 고등학생 시절 ‘동성’을 좋아한 감정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기존의 젠더 설명과 갈등을 겪으면서 이런 과거들을 발굴하고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경험’이 불쑥 떠오르곤 했다. 언제나 새로운 몸을 통해 다른 식으로 ‘현실’을 구성했고 과거는 한 번도 고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트랜스/이반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채식주의자로 명명하면서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영어로 쓴 책이나 논문들을 읽으며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서구에서 수입한 것”이라거나 “수입 이론에 의존”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 2006년을 살고 있는 지금, 어디까지가 미국적이고 어디까지가 일본문화의 잔재이고 어디까지가 한국적인 걸까. ‘순수’하게 한국적인 내용은 있을까. “우리의 현실”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어떤 언어가 자신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거나 숨통 트이게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따지고 보면 수입하지 않은 이론이 어디 있겠느냐고). 또한 “의존”이라면 의존이 그렇게 안 좋은 걸까. 오히려 독립적이라는 착각이 더 문제가 아닐까. “서구는 이론이고 제 3세계는 데이터”라는 언설은 역설적으로 서구이론이 “제 3세계”의 ‘경험’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누구나 서로와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지만, 자신은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더 문제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각주 15번에 있는 “서구 여성학 이론에서 결여된 부분, 서구 이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문제영역이 곧 한국사회의 여성 경험의 특수성이며 우리와 서구 사회의 현실과의 차이라 할 수 있다”(186쪽)란 말은 문제로 다가왔다. 왜 서구(라고 불리는 특정 지역)는 “보편”이고 한국은 “특수”인가. 서구는 그들이 경험에 기반하고 있기에 그런 이론이 나왔으며 그것은 ‘보편’이 아니라 그런 이론이 나온 맥락이란 의미이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서구의 그것과 다른 것은 한국의 경험이 “특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찾는 과정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183쪽)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음”이 문제이다. 기존의 언어와 자신의 몸이 가지는 갈등과 불편함을 읽는 작업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읽는 작업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읽기는 기존의 권력에 아부하기 보다는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기존의 권력에 아부하고 기존의 언어를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갈등하는 감정들을 언어화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리수를 통해 “트랜스젠더”란 명명을 접했지만 끌림과는 별도로 트랜스가 숨통을 튀어주는 언어로 다가온 건, 젠더를 고민한 이후였다. 기존의 언어에 머물려고 할 땐, 비록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우울했고 언제나 자기 분열 과정에 있(었)다. 기존의 권력체제에 있는 이상,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는 없다. 비록 “미쳤군”이란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이, 더 행복하고 때론 ‘권력’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언어를 모색하는 미미한 과정에 머물고 있지만, 균열과 분열 과정과 이때 느끼는 감정을 읽는 작업이, ‘다른’ 지식을 생산하는 자원이 되리라 믿는다. “타자성”은 열등함의 지표가 아니라 자원/힘이기 때문이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