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4.14:00 아트레온 4관 F-7, [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세 편의 영화를 같이 즐길 경우 생기는 문제는, 특히 루인 같은 인간일 경우 한 편의 영화에 열광해서 다른 작품의 내용을 잊어버린다는 것.

#[분노의 사진]
시각 이미지는 문자보다 그 효과가 더 빠른 편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만을 반영하는데 루인에게 이미지를 통한 효과는 문자만큼이나 혹은 문자보다 더 느리다. 아무튼 사진작가의 사진과 다큐멘터리는 이런 시각 효과를 이용한 흑인 ‘레즈비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나레이션 중에 “어떤 사람은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 내용을 본다”와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 이 말이 와 닿았다. 어떤 사람에겐 신기한 볼거리거나 “문화적 충격”일 테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사람이 처한 맥락이 떠오를 것이다.

#[흉터]
인상적이었던 만큼이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벌써 정리하기엔 아직 언어가 빈약하다.

#[부치 미스티끄]
이 다큐멘터리를 즐기다 바로 앞의 두 편을 거의 놓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광이란 말로 요약 가능.

젠더 혹은 ‘이성애’ 관계 바깥에 있는 이들이 ‘이성애’-젠더 구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욕망과 ‘이성애’-젠더 구조가 요구하는 모습 사이에서 협상하는 것.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관계가 혐오범죄로부터 그나마 안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부치”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른바 ‘남성’스러운 모습을 선호하고 ‘여성’다운 모습을 싫어한다는 이미지. 거칠고 힘이 센 모습. 물론 이런 이미지/환상은 다른 모습을 지우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한 사람 중 한 명이 했던 말 “부치는 죽지 않는다. 다양해질 뿐이다.”라는 말에 열광했다. 아아, 너무 좋아!

또 다른 접근은 부치-‘레즈비언’과 트랜스와의 관계. 루인은 이 다큐를 즐기며 부치와 FTM(female to male)의 밀접한 관계를 느낌과 동시에 트랜스가 어떻게 이반queer이론의 범위 내에서만 묶이는지를 느꼈다.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경험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인터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트랜스이론을 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갔다는 얘기에서처럼, 둘의 관계는 밀접하다. 혹자는 둘 사이에 있어,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만큼이나 감독은 트랜스를 외면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선 드랙 킹이나 트랜스로 읽을 지점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독이 전제하고 있는 ‘레즈비언’은 어떤 ‘정체성’일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부치라고 한 걸까? 그렇다면 ‘남성’으로 환원하지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내내 이 지점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내용을 전유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트랜스와 트랜스이론이 기존의 다른 모순을 설명하는데 명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전유할 수 있다. 루인 역시 최근, 몇 명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트랜스 이론으로 전유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작가들은 트랜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루인은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느꼈기에 맥락을 설명하며 모색의 방향을 욕망했다. 하지만, 마냥 전유하는 건, 문제가 있다. 앎의 배타적 경계를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탈맥락적으로 전유해서 마치 자신의 의견인양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까.

뭐, 어쨌거나 다큐멘터리는 전체적으로 좋았다. 특히나 화장실 문제는 너무너무 열광. 이건 [메종 드 히미코]에서도 느낀 부분. 언젠가 한 편의 글로 쓰고 싶은 문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화장실에 갈 땐 어느 화장실에 가야할까? 치마를 입은 날은 ‘여자’화장실에, 바지를 입은 날은 ‘남자’화장실에 가야할까?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가던 곳에 가지만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서 종종 상상한다. 굳이 화장실을 젠더로 나눠야 할까? 다큐멘터리에선 부치 화장실을 따로 만들자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한 경우라면 혹은 했든 안 했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여전히 배제하는 방식이다.

#
이렇게 영화제가 끝났다. 아쉬움과 함께 많은 자극으로 에로틱했던 시간이었다.

침묵에 대한 의문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3.10:30 아트레온1관 2층W-7, [침묵에 대한 의문]

지난번에 쓴 [침묵에 대한 의문]의 후기는 여기서 참고.

너무 좋아서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열광했다. 이렇게 유쾌하다니.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묘한 ‘상처’가 생겼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행에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같이 온 사람은 뭔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루인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배운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영화”라고. 이 말을 듣고 순간, 분개하고 ‘상처’로 다가왔지만 뭔가 들킨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화는 언어를 질문하고 있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다보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기에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별로 손해 볼 것 없다. 이때 저항자는 상대가 이해할 때까지 열심히 말해야 할까? 이 영화는 “아하하하하하”하며 소리 내어 웃으며 법정을 비웃는다(판사는 법정모독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이 유쾌한 지점이다.

그런데 루인 앞을 지나간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모른다는 것”, “배운 사람이나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가 페미니즘/여성학 혹은 이른바 “타자”로 불리는 이반queer/트랜스처럼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모색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영화일까. 고민 없음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엘리트주의가 아닐까. 흔히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내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페미니즘 언어를 접하며 쾌락에 빠지는 사람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저학력 비정규직 “아줌마”들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기존의 ‘이성애’ ‘남성’ 언어에 익숙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다. 채식(주의)자라고 루인의 위치를 밝혔을 때, “베지테리언도 여러 종류가 있지”라고 말하면서 아는 체 하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보다 “베지테리언”이 무슨 말인지 몰라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바꿔 말해야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관계 맺고 소통할 지를 한 번에 이해하는 식당 주인을 알고 있다. 대학 혹은 대학원 공부를 했다는 것이 “잘 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나가듯 한 말에 분개했지만 묘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지적 컴플렉스? 루인의 무식이 주는 열등감? 언어의 빈약함이 주는 갈증? 그 말을 듣고 내내 우울했다. 그 말을 듣고 분개하는 루인이 더 이상한 건 아닐 런지. 어쩌면 루인도 그 사람이 한 말과 비슷한 몸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정할 자신이 없다. 무엇일까.

어떤 사람의 말에 화를 낸다는 건, 상대의 폭력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상대와 자신을 동일한 위치에 두는 탈맥락화의 과정 때문인 경우도 있다. 루인은 종종 말투가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라는 말을 듣고 글이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의 기준에선) 길다는 얘길 듣는다. 물론 상대는 비난이나 비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열심히 해명하려고 애썼다. 이랑의 한 친구는 이와 비슷한 말을 듣고 화가 났었다고 한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억울했고 상대가 한 말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글이 짧은 게 문제가 아니냐고. 루인은 시간 여유만 넉넉하다면 글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용하는 문장이나 언어를 새로이 해석하거나 “해명”하는 작업들 때문이다. 글이든 말이든 하기 시작하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 만큼 루인에겐 기존의 언어를 그냥 사용하기엔 불편한 지점들이 너무도 많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루인이 쓰는 글이 길어진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루인에게 글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명하려고 하는 건, 상대와 루인의 위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루인은 지난 학기, 한 달 알바비 135,000원을 주는 학부 조교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 달 용돈도 안 되는 비용이란 식으로 말한 것에 화가 났었다. 루인에게 이 돈은 중요한 생계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낼 필요가 있었을까. 자치하는 루인과 서울에 집이 있는 그와의 계급과 환경의 맥락이 다른데. 화를 낸다는 건, 그 사람과 루인의 위치가 같다고 가정해서다. 그런 반응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여전히 그때그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의 말이 왜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무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지점이 들킨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

필름 인사이드 특별 강연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2.17:00 아트레온 4관, 1층 K-5 [필름 인사이드 특별 강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수업이 아니었다면 이 강연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화요일 수업을 휴강하는 대신 이 강연을 듣기로 했고 선생님께서 표를 끊어 주셨다.

이 강연의 재밌는 점은, 비디오카메라가 페미니즘 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 1960년대 당시, 페미니즘 사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영화가 좋을 거라고 했지만 영화를 제작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고 다닐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가 나왔고 이를 통해 비디오카메라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발표자인, 프랑스에 있는 시몬느 드 보브와르 영상센터의 니꼴 페르난데 페레Nicole Fernandez Ferrer는 농담으로 비디오카메라의 개발이 페미니즘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했다. 물론 1960년대 1970년대 당시 찍은 다큐멘터리는 세련된 형식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말하면 그걸 그대로 찍는 정도. 다큐멘터리하면 떠올리는 나레이션이라던가 어떤 설명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누군가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재미있는 내용도 많다.

일테면, ‘동성애’ 차별 반대 운동을 하는 시위 현장을 찍으며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부분을 보여주는데, 그 사람들의 반응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동성애는 인간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교육이 문제다”, “유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안 된다”, (왜냐고 물으니)”그냥 좀 이상하다” 등등. 1970년대라는 설명만 하지 않는다면 2006년을 살고 있는 한국이라고 해도 믿을 법 하다. 피임과 낙태 허용을 요구하는 시위는 사실, “급진적”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의 한국에서 이런 시위가 가능할까? 물론 1970년대의 프랑스와 2006년의 한국을 동일한 위치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고 운동의 방법이 많이 바뀐 상황에서 피임과 낙태 허용을 요구하는 가두시위가 없다고 해서 지금의 운동 방식이나 사회가 더 보수적이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혹은 그래서)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런 운동은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일어난 초기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운동은 항상 초기에 가장 “급진”적이다.
(“급진”적이란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때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데, 사용의 맥락 때문이다. 보통 “넌 너무 급진적이야”란 말은 “너무 극단적이야”란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곤 하는데 이런 말들은 맞는 것 같거나 틀렸다고 하기엔 왠지 자신이 “보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싫을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거슬리는 목소리를 배제하기 위한 ‘세련’된 방식일 뿐이다. “급진”이나 “극단”의 기준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통한 1970년대 프랑스의 페미니즘 운동의 변화상을 짚고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인 강의였다. 다만 때로 2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의 내용 중 1~2분 정도만을 보여줬는데, 왜 그 부분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그저 궁금함으로 아쉬움으로 남기며 자리를 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