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대한 의문/그녀의 비밀/부서진 거울

2006.04.09.11:00 아트레온 2관 1층G-11, [침묵에 대한 의문]
2006.04.09.14:00 아트레온 2관 1층G-7, [그녀의 비밀]
2006.04.09.20:00 아트레온 2관 1층G-7, [부서진 거울]

#[침묵에 대한 의문]
누구의 언어로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가 소리쳐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 그래서 루인이 하곤 하는 말은, 타자들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서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혹은 들으려는 귀가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동성애’/이반이 가시화되자 “세기말이 되고 서구문화가 유입되니까 성정체성 위기가 생긴다”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동성애’는 한국”전통”문화에는 없었는데 서구문화가 유입하면서 생긴 거란 얘기다. 하지만 과거 기록에 ‘동성애’ 관련 기록은 있고 관련 목소리는 항상 있었다.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듣기 시작하고선 그때야 처음 생긴 거라고 얘기하는 셈이다.

누구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그래서 들을 수 있는 것 밖에 못 듣는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말해도 상대가 알아듣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협상력으로서 침묵을 선택하기도 한다.

[침묵에 대한 의문]은 이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른바 페미니즘 고전영화라고 평하는데, 영화를 즐기고 나면 왜 그렇게 평하는지 알 수 있다. 페미니즘 고전영화라고 해서 재미없는 영화냐면, 호리스의 영화 자체가 너무너무 재미있다.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심리학자가 처음엔 기존의 ‘남성’언어만 사용하기에 세 ‘여성’들의 말을 못 알아듣다가 자신의 위치를 읽으면서(positioning) ‘여성’의 언어로 기존의 법언어에 저항하는 것. 영화 끝 부분에 ‘여성’들이 소리 내어 웃는 장면은 정말 통쾌하다.

#[그녀의 비밀]
이 영화의 평을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세 가지 코드가 겹쳐있는데, 망명/”불법”체류, ‘레즈비언’/이반queer, 트랜스/드랙이다. 기존의 법언어 바깥에 위치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커밍아웃 혹은 아웃팅이 곧 바로 추방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추방되어 돌아가는 고국에선 사형선고와 같은 선고가 내려져 있는 상황이다(주인공은 이란 출신이고 이곳에선 ‘동성애’는 금지되어 있다). 이제, 주인공은 죽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타자”로서의 정치학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엮어 간다.

빼어난 작품이지만 한국에 개봉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언젠간 꼭 이 영화의 평을 쓰고 싶다.

#[부서진 거울]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감독의 욕망을 읽었다. 1995년 작품이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면 11년 전 개봉한 이 영화에선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외딴 집에 사는 사람, 사회에서 배제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주로 나오는 공간은 해피하우스라는 성매매업소이다. 이 공간의 이름은 역설적인데 루인은 해피하우스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관계를 엮어가는 그 순간이 해피하다는 점에서 해피하우스라고 읽었다.

메를린 호리스의 영화는 매유 유쾌하고 좋다.

빨간 모자의 진실: 딱 “전체 관람가” 영화

2006.04.09.09:00 아트레온 5관 C-10, [빨간 모자의 진실]

전날 [나나]를 예매할 때, 많은 사람들이 [빨간 모자의 진실]을 예매하는 모습을 접했다. 개봉 전부터 기대했는데, 바로 이 기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9시를 보러 갔다. 며칠 전 바보같이 새벽 2시에 잤고 그때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인지라 너무 졸렸지만 그래도 9시에 [빨간 모자의 진실]을 즐기고 11시부터 서울여성영화제를 즐기면 딱이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영화, 홍보문구처럼 더빙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끝. 홍보전단지에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말이 있는데, 범인이 등장하는 순간, 아 쟤가 범인이겠구나, 했다. 스토리는 네 명의 진술이 끝나는 지점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하, 아하, 하는 재미가 있지만 그 지점을 넘어가면 진부하다. 그래서 후반부에 가면 지루했다. 그렇잖아도 졸음이 밀려오는데 스토리마저 진부하면 어쩌란 말이냐. 거의 잘 뻔 했다고 할까.

뭐, 딱 “전체 관람가”인 영화다. 더 뭘 바라랴.

안토니아스 라인/여성 애니메이션의 새물결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08.14:00 아트레온 2관, [안토니아스 라인], 1층G-9
2006.04.08.21:00 아트레온 1관, [여성 애니메이션의 새물결], 1층I-10

#[안토니아스 라인]
기존의 공동체와는 다른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을 꿈꾸고 있다면, 이 영화는 참 유쾌하다.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과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을에서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엮어가는 안토니아의 집은 언제나 즐거운 공간이다. 결혼을 강제하는 이성애-젠더 관계를 거부하며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를 엮어가고, 아버지/’남성’ 중심의 종교를 조롱하는(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다) 등등의 상상력.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이른바 “타자”의 삶이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겁다는 걸 드러낸다는 점이다.

강추!

#[여성 애니메이션의 새물결]
작년처럼 올해도 기대했지만, 힘들었다. 단편 14편을 즐긴다는 건, 장편 14편을 연속해서 즐기는 것과 같은 집중력과 노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피로가 누적되어 있기에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 점도 있다. 하지만 반쯤 했을 땐 이미 지쳤고 그냥 받아들이는 상태였다. 그래도 [커밍아웃]은 좋았다. 언어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와 [침묵에 대한 의문]과 엮어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 단편 때문에 선택한 것이지만.

#상영 작품은
베티 / 클라라 / 월광 / 거지 포핀 / 육다골대녀 / 커밍아웃 / 산다는 것은 / 몬스터 / 치명적 비만 / 강박증 / 헤비 포켓 / 시티 파라다이스 / 해골여인 / 피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