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11.18:00 아트레온1관 2층W-6,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2006.04.11.20:00 아트레온2관 1층G-7, [그 밤의 진실]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이미 한 번 즐긴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너무 좋아서 다시 즐겼다. 다시 즐겨도 좋다 이전에 쓴 글은 여기로.
#[그 밤의 진실]
영화를 즐기며, 트라우마가 남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보며, 이 영화는 트라우마로 남겠구나, 했다.
줄거리를 요약하면(어차피 국내에선 개봉 할 것 같지 않으니까,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없지) 나약과 보난데 두 부족의 전쟁과 평화 협정 과정을 담고 있다. 나약은 대통령이 있는 국가이며 보난데는 일테면, 저항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부족 모두 10년이 넘는 전쟁을 통해 유혈사태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러 명의 등장인물 중, 나약의 에드나와 그의 남편인 대통령, 보난데의 테오 대령(보난데의 지도자격)와 그 부인 등이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갈등의 핵심은, 두 부족 간의 전쟁 중에 에드나의 자식이 끔찍한(차마 적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죽었는데 에드나의 자식을 죽인 사람이 테오 대령이란 것. 테오 대령은 더 이상 전쟁은 무의미하며 어떻게든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 인물이다. 전쟁을 시작할 초기엔 이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더 이상 그런 의미는 없으며 지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을 뿐이란 걸,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게 되는지를 자신의 만행/폭력―에드나의 자식을 끔찍한 모습으로 죽였다는 것―을 통해 깨닫고 그 사실에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나에게 사죄하며 용서를 구한다.
루인은 에드나에 이입했다. 자식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것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졌는데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지도 언어화 하지도 못한 체 서둘러 봉합해야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나약의 대통령과 보난데의 테오 대령은 서둘러 평화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두 부족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소통할 시간이 부족했고 특히 에드나는 그 전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만 평화가 필요하니 트라우마를 그저 참아야 한다고 “강요” 받을 뿐이다.
(좀더 자세한 혹은 루인과는 다른 소개는 서울여성영화제 홈페이지에서 참고.)
루인은 이 영화를 치유하지도 언어화하지도 않은 상처나 트라우마를 서둘러 봉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런 상처들로 소통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새로운 상처들이 생기는 지로 읽었다.
에드나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매순간 누가 죽였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기를 바라고 평화협정을 맺는 걸 반대한다. 그냥 침묵하며 가만히 있다가도 서둘러 봉합한 봉합사가 터지곤 한다. 이런 모습에서 루인을 만났다. 취약하고 언제나 불안해서, 글로는 항상 상처는 쾌락의 대가라고 쓰면서도, 상처가 생길 때마다 고통 받고 그 과정에서 화내고 불안해하고 화내는 루인에게 혐오와 실망을 느끼고…. 에드나는 루인의 모습이다. 괜찮은 척 하면서도 돌아서면 욱씬거리는 상처를 느끼는, 그래서 에드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테오 대령은 에드나에게 직접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에드나는 거절한다(테오 대령의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별로였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고 축제를 하는 마을의 한적한 곳에서 테오 대령을 습격해서 죽인다. 몸에 양념을 바르며 바비큐처럼 태워서(감독의 삼촌이 이렇게 죽었다고 한다). 이 광경이 들키고 두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달려온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로 아팠다. 테오 대령의 부인은 테오 대령의 동생이 에드나를 죽이려고 할 때, 고통스럽게 울면서도 죽이지 못하게 막는다.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복수를 막으려는 태도. 이런 태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팠다. 정작 에드나를 죽이는 사람은, 남편인 대통령이다. 그렇게 얻는 게 평화다. 대화도 협상도 소통도 없이 그저 죽음을 통해 평화를 얻었다.
감독은 평화를 찾고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말했다. 루인은 치유하지 않고 언어화하려는 과정 없이 서둘러 봉합하려는 상처나 트라우마로 대화에 들어간다는 것은 새로운 고통과 상처가 되는 것으로 읽었다. 대화의 과정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소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로 읽었다.
영화는 누구를 위한 누구의 평화인지는 묻지 않는다. 평화가 무엇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잠잠한 상태를 평화로 가정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집단에서 상대의 폭력에 문제제기 하면 처음엔 반박하거나 사과하다가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왜 그 정도 가지고 지금도 얘기하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곤 하는데, 결국 이 과정에서 문제제기를 한 피해 경험자는 더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해자”로 간주된다. 루인에게 에드나는 이런 역할로 다가왔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말하려는 인물. 테오 대령은 이 과정에서 사죄하려는 사람. 대령의 부인은 그런 과정을 유지하려는 사람. 대통령이 어쩌면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실용주의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통령은 목소리를 죽임으로써 목소리가 없는 상태-잠잠한 침묵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마을의 염소들을 풀어주며 자연으로 자유롭게 돌아가라고 하는데, 우리에선 풀려났지만 목에는 여전히 줄이 메여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