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해석들: 지식 독점의 위험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무지’가 공포/권력을 만든다. 알지 못할 때, 앎에의 접근이 제한되어서 누군가 말해주는 내용만을 믿어야 하는 무지의 상황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번역과 권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제 그토록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작가/철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작가는 ‘유명’해서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한 번은 듣고 지나가지만, 루인도 수업 시간을 통해 몇 번은 들었지만 글을 직접 읽은 적은 없었다. 오늘있는 수업 텍스트였기에 며칠 전부터 읽었을 따름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이 글 주제와 별로 상관없기도 하지만, “○○ 읽어봤다~!”하는 식의 무식을 떠벌리는 자랑이 될까봐. 그렇잖아도 무식한데 이런 식으로 무식을 과시하면, 흑;;;, 비참해진다.) 글을 읽으면서, 중얼거린 건, 자국어인 한국어 외에 다른 외국어를 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번역본만이 아니라 다른 번역본도 같이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실감했다.

물론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기에 루인이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영역본 또한 번역자에 의한 번역/해석일 뿐이다. 프랑스어로 쓴 글을 영어로 번역했고 그 번역본을 읽으니 결국 중역하는 격. 하지만 프랑스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역시 한국어 번역을 다시 해석/번역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해석은 중역이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안도했다. 지금의 시대가 오직 한국어 번역문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번역자의 번역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식을 가진 자, 지식에의 접근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고,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리 읽어도 비문 혹은 오역 같아도 문제제기가 불가능했겠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독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얘기하고 싶다. 일전에 이차텍스트에 대한 불신을 적은 적이 있는데 딱 이런 경우였다. 물론 한국어 번역자의 번역이 잘 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영어와 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루인의 수준에서도 영어로 읽는 게 편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번역 자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래서 저자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번역자의 입장/위치에 의해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이다)의 문제이며 이는 다른 자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글을 어떤 내용으로 알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약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한 명씩만 있다면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텍스트의 내용은 그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만 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사람은 사실 상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실제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이건 단순히 그 사람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는 것 이상인데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차단하며 다른 해석을 애시 당초 발화할 수 없게 하고 다른 상상력을 통제하는 끔찍함이다. 의심할 수 없고 번역자의 해석을 믿을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끔찍함. (이런 끔찍함이 학제에선 너무도 비일비재하다는 거, 너무 끔찍하지 않아?)

너무도 매력적인 텍스트를 두 가지 번역본(영어와 한국어)으로 대조해서 읽으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물론 그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다른 텍스트와 연결해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즐거움도 느꼈다. 즐겁다.

메종 드 히미코, 망종

어제, 두 편의 영화를 즐겼다. 오후 3시의 [메종 드 히미코]와 저녁 6시의 [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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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드 히미코]는 두 번째다. 극장에서 언제 내릴지 모르고 DVD를 언제 출시할지 모르니, 꼭 다시 즐기고 싶었다. 여전히 좋다. 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연결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다시금 품는다. “메종 드 히미코”란 공간은 “자기만의 방”과 닮아 있다.

다시 즐기며 새로 발견한 사실 두 가지:
“메종 드 히미코”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아래에 불꽃을 터뜨리는 꼬마 4명이 나오는 장면에서 루비와 다른 한 명이 물을 뿌리면서 나오는데, 이때 꼬마들이 외치는 말 중에 하나가 “호모의 역습이다”. 이 말에 큭큭 웃었는데, 감독은 알고 이 말을 쓴 건지 궁금했다. 1979년에 재니스 레이먼드는 [성전환 제국]이란 대표적인 트랜스 혐오 문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 대해 대략 10년이 지나 샌디 스톤은 [“제국”의 역습]이란 글을 썼다. 재니스 레이먼드와 의료담론에서 나타나는 트랜스 혐오를 비판하는 글이다. 꼬마들이 외친 “호모의 역습이다”(물론 이때의 의미는 조롱/혐오이다)는 이 말을 다시 한 번 전유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트랜스/이반혐오를 드러내면 결국 “역습”을 가한다는 의미로. 물론 감독은 이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차피 텍스트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
또 하나는, 그 꼬마들 중 한 명이 하루히코에게 반해서 “메종 드 히미코”에 찾아가는데, 그때 꼬마가 입고 있는 상의에 적힌 글자. 옷에 그려져 있는 캐릭터와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옷엔 “TRANS”라고 적혀 있다. 트랜스라니. 후후후. 우연이라고 하기엔 의미심장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 영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영화가 아니다. 오다기리 조 한 명에 집중하고 말거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만든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라는 식으로 지나가고 말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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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을 ‘즐겼다.’ 영화관을 나서선 비상금처럼 가지고 있던 돈으로 이것저것 소비했다. 귀걸이를 두 개 사고, 책을 두 권 사고, 마녀 연필을 두 자루 사고 핸드폰 장식을 사고. 숨 막히는 느낌.

그런데 왜 마지막 장면에서 치마를 입었을까. 이 영화에서 최순희는 단 한 번 치마를 입고 카메라는 단 한 번 움직이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근데 그 치마가 H라인의 보폭을 제한하고 다소 불편한 옷이라는 것(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그 옷).

아직은 이 영화 평을 쓸 시기가 아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고 안 쓸 가능성이 더 크지만, 아프다.

모든 말하기/글쓰기는 협상하는 언어다: 트랜스와 나혜석

몇 년 전만 해도 트랜스는 전혀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그래서 트랜스란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것은커녕, 자신의 정체성을 명명할 언어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리수는 언제나 복잡한 위치에 존재한다.) 지금도 커밍아웃은 곧 ‘동성애’를 의미하기에 트랜스 정체성이 그렇게 가시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트랜스는 의료담론/의료제도에서 정신병 질환으로 분류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루인은 정신병자이기도 하고 루인이 쓰는 모든 글은 “미친 인간의 헛소리”기도 하다.

미국에선 트랜스 정체성을 정신병 범주로 둘 것이냐 삭제할 것이냐로 트랜스 커뮤니티 내부에서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한다(한국에선 없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가 안 되어서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DSM에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래서 트랜스란 커밍아웃은 의료담론에선 “나 정신병자요”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물론 트랜스들이 자신을 정신병자로 여기냐면 그렇진 않다. 정체성의 갈등 시기와 자기에게 하는 커밍아웃의 어려움, ‘자기혐오’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미쳤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병 목록에서 삭제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법한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계급 문제 때문이다. 트랜스가 정신병 목록에 올라 있으면 수술을 할 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 목록에서도 빼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게 하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는 안 되나 보다. 미국에 사는 트랜스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서 이런 투쟁을 안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수술비가 아무리 비싸도 상관없을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의료보험 혜택은 계급/계층적인 문제와 연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미쳤다”고 여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원하는 트랜스라면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협상 전략이다. 루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수술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 않지만 어느 날 이런 욕망이 강해서 수술을 원한다면, 이성애-젠더 구조의 의료담론과 의료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나는 정신병자요”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제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협상의 언어이다. (직장 상사에게 싫어도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 모두 이런 협상하는 말하기/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을 텍스트로 토론을 하며, 이 글에서 나타나는 나혜석의 “보수적인 측면”으로 인한 “모순”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루인은 모순이 아니라 협상이라는 얘기 정도를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나혜석은 이혼을 하고 나서(하기 직전인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이혼고백장”이란 글을 썼다. 어떤 경로로 결혼을 했고 어떤 연유로 이혼을 했는가를 적은 글이다. 당시엔 “사생활의 폭로” 혹은 기존 사회의 모순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큰 이슈가 되었나 보다. 뭐, 지금도 이런 글쓰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이 글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여성’관이다. 이전의 글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유교적 “전통”에 따른 ‘여성’관을 “내면화”한 모습이 이 글에는 나타난다. 신혼여행으로 죽은 남자친구를 성묘하러 갔던 나혜석이 이혼하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매달리는 모습도 나온다. 이건 모순일까? “전통적 유교관의 내면화”일까?

루인은 미국에서 트랜스들이 벌이고 있는 정신병 목록의 논쟁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혜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런 언어를 차용한 것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이후 나혜석의 위치가 이전과는 달라졌고 더 이상 이전처럼 발화할 수 없었기에 이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해선 글을 출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출간도 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나혜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유교에서 바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차용한 것은 아닐 런지. 트랜스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선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그래서 슬펐다. 이런 슬픈 몸으로 정희진 선생님 강좌를 들으러 갔었고 그래서 더 열광하며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