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빙자한 폭력: 욕설을 하지 않는 이유

사랑이란 이름을 빙자한 폭력들이 있다. 일테면 (초, 중, 고등) 학교 선생들이 행사하는 “사랑의 매”라고 불리는 폭력과 가족이 그렇다. 중학생 이후, 루인에게 가족은 언제나 폭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기에 “가족주의를 지향 한다”는 말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삼성의 광고 문구 중에 “또 하나의 가족”이란 말이 있는데, 꽤나 끔찍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루인에게 이 말은 역효과다.) 물론 루인의 이성애혈연가족이라고 24시간 내내 폭력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요즘은 영악해서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어제, 사무실에 있다가 루인은 왜 욕설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했던 대답이 욕설에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도 부끄러운(수줍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들은 욕설들에의 트라우마, 그것이 루인이 욕설을 하지 않게 했다. 작은 욕설이라도 들으면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는 경우에도 욕설은 효과적인 대응이 아니라고 몸앓는데, 그건 루인이 “쿨”하거나 성숙해서가 아니라 이런 경험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경험이 한편으론 자원이 된 셈이랄까. 화가 났을 때 욕설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언어를 찾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그건 폭력이에요”라는 말은 루인이 하는 가장 심한 ‘욕설’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 폭력이란 말은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이럴 땐 참 애매하다. 뼈가 부러질 때까지 구타가 있어야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과 공포 분위기 혹은 참을 수 없이 숨 막히는 분위기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권력을 이용해서 강제를 행사하는 것, 상처가 될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래서 루인도 늘 폭력적이다.

다른 해석들: 지식 독점의 위험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무지’가 공포/권력을 만든다. 알지 못할 때, 앎에의 접근이 제한되어서 누군가 말해주는 내용만을 믿어야 하는 무지의 상황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번역과 권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제 그토록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작가/철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작가는 ‘유명’해서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한 번은 듣고 지나가지만, 루인도 수업 시간을 통해 몇 번은 들었지만 글을 직접 읽은 적은 없었다. 오늘있는 수업 텍스트였기에 며칠 전부터 읽었을 따름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이 글 주제와 별로 상관없기도 하지만, “○○ 읽어봤다~!”하는 식의 무식을 떠벌리는 자랑이 될까봐. 그렇잖아도 무식한데 이런 식으로 무식을 과시하면, 흑;;;, 비참해진다.) 글을 읽으면서, 중얼거린 건, 자국어인 한국어 외에 다른 외국어를 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번역본만이 아니라 다른 번역본도 같이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실감했다.

물론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기에 루인이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영역본 또한 번역자에 의한 번역/해석일 뿐이다. 프랑스어로 쓴 글을 영어로 번역했고 그 번역본을 읽으니 결국 중역하는 격. 하지만 프랑스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역시 한국어 번역을 다시 해석/번역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해석은 중역이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안도했다. 지금의 시대가 오직 한국어 번역문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번역자의 번역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식을 가진 자, 지식에의 접근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고,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리 읽어도 비문 혹은 오역 같아도 문제제기가 불가능했겠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독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얘기하고 싶다. 일전에 이차텍스트에 대한 불신을 적은 적이 있는데 딱 이런 경우였다. 물론 한국어 번역자의 번역이 잘 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영어와 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루인의 수준에서도 영어로 읽는 게 편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번역 자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래서 저자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번역자의 입장/위치에 의해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이다)의 문제이며 이는 다른 자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글을 어떤 내용으로 알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약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한 명씩만 있다면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텍스트의 내용은 그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만 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사람은 사실 상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실제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이건 단순히 그 사람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는 것 이상인데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차단하며 다른 해석을 애시 당초 발화할 수 없게 하고 다른 상상력을 통제하는 끔찍함이다. 의심할 수 없고 번역자의 해석을 믿을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끔찍함. (이런 끔찍함이 학제에선 너무도 비일비재하다는 거, 너무 끔찍하지 않아?)

너무도 매력적인 텍스트를 두 가지 번역본(영어와 한국어)으로 대조해서 읽으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물론 그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다른 텍스트와 연결해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즐거움도 느꼈다. 즐겁다.

메종 드 히미코, 망종

어제, 두 편의 영화를 즐겼다. 오후 3시의 [메종 드 히미코]와 저녁 6시의 [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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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드 히미코]는 두 번째다. 극장에서 언제 내릴지 모르고 DVD를 언제 출시할지 모르니, 꼭 다시 즐기고 싶었다. 여전히 좋다. 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연결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다시금 품는다. “메종 드 히미코”란 공간은 “자기만의 방”과 닮아 있다.

다시 즐기며 새로 발견한 사실 두 가지:
“메종 드 히미코”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아래에 불꽃을 터뜨리는 꼬마 4명이 나오는 장면에서 루비와 다른 한 명이 물을 뿌리면서 나오는데, 이때 꼬마들이 외치는 말 중에 하나가 “호모의 역습이다”. 이 말에 큭큭 웃었는데, 감독은 알고 이 말을 쓴 건지 궁금했다. 1979년에 재니스 레이먼드는 [성전환 제국]이란 대표적인 트랜스 혐오 문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 대해 대략 10년이 지나 샌디 스톤은 [“제국”의 역습]이란 글을 썼다. 재니스 레이먼드와 의료담론에서 나타나는 트랜스 혐오를 비판하는 글이다. 꼬마들이 외친 “호모의 역습이다”(물론 이때의 의미는 조롱/혐오이다)는 이 말을 다시 한 번 전유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트랜스/이반혐오를 드러내면 결국 “역습”을 가한다는 의미로. 물론 감독은 이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차피 텍스트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
또 하나는, 그 꼬마들 중 한 명이 하루히코에게 반해서 “메종 드 히미코”에 찾아가는데, 그때 꼬마가 입고 있는 상의에 적힌 글자. 옷에 그려져 있는 캐릭터와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옷엔 “TRANS”라고 적혀 있다. 트랜스라니. 후후후. 우연이라고 하기엔 의미심장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 영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영화가 아니다. 오다기리 조 한 명에 집중하고 말거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만든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라는 식으로 지나가고 말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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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을 ‘즐겼다.’ 영화관을 나서선 비상금처럼 가지고 있던 돈으로 이것저것 소비했다. 귀걸이를 두 개 사고, 책을 두 권 사고, 마녀 연필을 두 자루 사고 핸드폰 장식을 사고. 숨 막히는 느낌.

그런데 왜 마지막 장면에서 치마를 입었을까. 이 영화에서 최순희는 단 한 번 치마를 입고 카메라는 단 한 번 움직이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근데 그 치마가 H라인의 보폭을 제한하고 다소 불편한 옷이라는 것(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그 옷).

아직은 이 영화 평을 쓸 시기가 아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고 안 쓸 가능성이 더 크지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