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말하기/글쓰기는 협상하는 언어다: 트랜스와 나혜석

몇 년 전만 해도 트랜스는 전혀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그래서 트랜스란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것은커녕, 자신의 정체성을 명명할 언어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리수는 언제나 복잡한 위치에 존재한다.) 지금도 커밍아웃은 곧 ‘동성애’를 의미하기에 트랜스 정체성이 그렇게 가시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트랜스는 의료담론/의료제도에서 정신병 질환으로 분류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루인은 정신병자이기도 하고 루인이 쓰는 모든 글은 “미친 인간의 헛소리”기도 하다.

미국에선 트랜스 정체성을 정신병 범주로 둘 것이냐 삭제할 것이냐로 트랜스 커뮤니티 내부에서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한다(한국에선 없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가 안 되어서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DSM에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래서 트랜스란 커밍아웃은 의료담론에선 “나 정신병자요”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물론 트랜스들이 자신을 정신병자로 여기냐면 그렇진 않다. 정체성의 갈등 시기와 자기에게 하는 커밍아웃의 어려움, ‘자기혐오’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미쳤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병 목록에서 삭제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법한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계급 문제 때문이다. 트랜스가 정신병 목록에 올라 있으면 수술을 할 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 목록에서도 빼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게 하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는 안 되나 보다. 미국에 사는 트랜스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서 이런 투쟁을 안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수술비가 아무리 비싸도 상관없을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의료보험 혜택은 계급/계층적인 문제와 연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미쳤다”고 여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원하는 트랜스라면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협상 전략이다. 루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수술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 않지만 어느 날 이런 욕망이 강해서 수술을 원한다면, 이성애-젠더 구조의 의료담론과 의료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나는 정신병자요”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제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협상의 언어이다. (직장 상사에게 싫어도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 모두 이런 협상하는 말하기/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을 텍스트로 토론을 하며, 이 글에서 나타나는 나혜석의 “보수적인 측면”으로 인한 “모순”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루인은 모순이 아니라 협상이라는 얘기 정도를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나혜석은 이혼을 하고 나서(하기 직전인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이혼고백장”이란 글을 썼다. 어떤 경로로 결혼을 했고 어떤 연유로 이혼을 했는가를 적은 글이다. 당시엔 “사생활의 폭로” 혹은 기존 사회의 모순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큰 이슈가 되었나 보다. 뭐, 지금도 이런 글쓰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이 글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여성’관이다. 이전의 글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유교적 “전통”에 따른 ‘여성’관을 “내면화”한 모습이 이 글에는 나타난다. 신혼여행으로 죽은 남자친구를 성묘하러 갔던 나혜석이 이혼하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매달리는 모습도 나온다. 이건 모순일까? “전통적 유교관의 내면화”일까?

루인은 미국에서 트랜스들이 벌이고 있는 정신병 목록의 논쟁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혜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런 언어를 차용한 것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이후 나혜석의 위치가 이전과는 달라졌고 더 이상 이전처럼 발화할 수 없었기에 이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해선 글을 출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출간도 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나혜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유교에서 바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차용한 것은 아닐 런지. 트랜스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선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그래서 슬펐다. 이런 슬픈 몸으로 정희진 선생님 강좌를 들으러 갔었고 그래서 더 열광하며 즐거웠다.

스윙걸즈: 실망과는 다른 만족감

피곤했다.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한 분이 사주는 것이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아무리 즐거운 사람이라도 헤어진 후엔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피곤함이었다. 그래서 그냥 玄牝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루인이 가려고 한 극장에선 마지막 상영이었기에 보기로 했다. 표를 끊고 상영까지 한 시간도 더 남았다.

극장으로 들어가, 쉴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까 어쩔까 조금 망설였다. 책상처럼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폈지만 피곤함에 책이 잘 읽힐지는 자신 없었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었다. 영어 번역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모두 펼치고 읽다가 신경질이 나서 한국어 번역본을 덮었다. 번역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영어 번역본은 잘 한 걸까? 그럼에도 영어 번역본을 선택한 건, 영어일 때 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나게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스윙걸즈] 2006.03.29(수). 21시 40분.
※스포일러 없음!

이 영화에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극장에서 접하는 홍보용 필름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팜플릿을 챙겨 읽으면서도 너무너무 기대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은 시간에 영화관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기대였다. 그리고 기대는 너무 높았다. 그래서 실망했다.

그랬다. 실망스러웠다. 솔직히 홍보용 필름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영화 스토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만 따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기대가 너무 컸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망은 기대가 있을 때 생기는 법. 만약 별다른 정보 없이 별다른 기대 없이 이 영화를 즐겼다면 너무너무 만족스럽다는 얘기를 했겠지.

이런 묘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재밌었고, 묘한 만족감과 깔깔 웃는 와중에 피곤함은 싹 가셨다. 스윙걸즈 밴드의 유일한 ‘남성’인 나카무라의 등장이 좀 짜증나고 거슬렸지만(불편한 지점이 있다) 그래도 좋았다. 음악은 유쾌하고 영화는 (연기의 어색함이 종종 거슬렸지만) 즐거웠다. 말도 안 되는 만화적 구성도 재밌었다. 아니다. 이런 말들은 단지 불필요한 부연설명일 뿐이다.

또 즐기고 싶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면도칼, 자해, 왼쪽 귀 그리고 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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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여러 해 전, 면도칼을 목걸이 삼아 걸고 다닌 적이 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옷 속에 숨겨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면도칼의 까칠하고 차가운 느낌이 몸에 닿으면 역설적이겠지만 오히려 온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가시 같은 날들이 조금은 무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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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열 명 정도의 깡패나 “적”에게 둘러싸여 있고 손에 칼이 있으면 누군가를 위협하며 방어를 하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리 칼이 있다고 해도 혼자선 이길 수가 없다.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팔뚝을 긋고 뿜어 나오는 피를 혀끝으로 살짝 맛보는 행동. 실은 이런 행동이 더 위협적이다.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어 자신을 가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들은 이런 장면을 통해 더 큰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가해할 수 있다면 상대방은 더 아무렇게 가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자해는 자아도취(자뻑)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고 타인을 공격하지 못하는 내사introjection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공격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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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런 느낌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가게를 나선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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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은 양쪽 귀의 청력이 다르다. 전화를 받으면 왼쪽으로 받고 음악을 한쪽 귀로만 들어야 할 상황이면 왼쪽귀로만 듣는다. 왼쪽의 청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오른쪽의 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마도 대여섯 살 정도로 기억하는 나이 즈음, 오토바이에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다. 이성애혈연가족이 모두 있었지만 모두들 절묘하게 피해서 루인에게로 부딪혔다. 앗싸! 요즘 같으면 병원으로 간다, 보험금 받는다 하겠지만, 당시 부모님은 오토바이 운전자를 그냥 돌려보냈다. 루인만 혼났다. 제대로 안 보고 다닌다고. 크크크. 그렇게 교통사고는 잊혀질 뻔 했는데 그러질 않았다. 이후 초등학생 6학년이 끝날 때까지 그 사건의 흔적은 몸에 남아 있었다. 오른쪽 귀에 핏덩어리가 굳어서 돌처럼 들어 있었다. 이성애혈연가족들은 루인의 귀에 이런 이상한 것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사건이 나고도 7, 8년이 지나서야 병원에 갔다. 큭큭.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핏덩어리가 굳어서 돌덩어리처럼 들어있다는 걸.

소리에 민감한 루인에게 왼쪽 귀는 너무도 소중하다. 좀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귀이기 때문이다. 왼쪽 귀를 막으면 오른쪽 귀만으론 잘 못 듣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론 지금까지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원했다. 왼쪽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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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지고 싶어서, 신나려고 귀를 뚫었는데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몸앓이를 했다. 이런 흔적들이 떠올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많이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