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

2004년 가을 무렵, 정희진 선생님의 (글이 실릴) 책이 나온다는 얘길 들었었다. 그 내용이 “공간, 몸, 성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책은 나오지 않았다.

2005년 봄, 8월 즈음이면 정희진 선생님의 책이 세 권 나온다는 얘길 들었다. 엄청 기대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한 권은 나왔다. [페미니즘의 도전] 아직 다른 두 권이 남아 있었다. 남은 두 권 중 한 권은 교재로 쓸 책이라고 했다.

작년 여름 즈음인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가 나온다는 얘길 들었다. 우왓!, 하는 기대감과 함께 정희진 선생님의 “공간, 몸, 성폭력”이란 주제의 글이 이곳에 실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짐작을 했었다. 이런 소식과 함께,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에 실리는 글이 상당할 것이란 기대를 자아내는 글을 접하기 시작했다. 어떤 논문을 읽다가 각주를 보면, 출간예정으로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에 실릴 글에서 인용했다고 적혀있었다. 혹은 토론회 자료집에 이 책에 실릴 예정으로 짐작하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엔 2005년 계획에 이 책 출간이라고 적혀있었지만, 해를 넘겼다.

그리고 어제, 조교근무를 한다고 강의계획서를 받았다가 예상치 않은 책 이름을 접했다.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처음엔 설마 했다. 출간예정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묘한 흥분이 몸을 타고 돌았다. 오늘 나스타샤를 켜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들어가 확인하니, 으하하, 책이 출간되었다고 공지가 떴다. 꺅꺅꺅!!!

드디어 출간되었다. 내용이 장난이 아니다. 제목과 목록만으로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 곧장 서점으로 가야겠다.

[#M_ 자세한 목록 읽기.. | 접기.. |
책머리에_ 섹슈얼리티 연구의 새 지평을 기대하며(이미경)
들어가며_ 다양항 주체들의 의미투쟁 스토리를 읽으며(변혜정)

강의를 열며_ 지구화 시대 한국사회 성문화와 성 연구방법(김은실)

1부 섹슈얼리티 경험과 주체성

여대생의 연애 경험 성·사랑·결혼의 정치학, 그 변화와 의미(김신현경)
1. 연애가 바뀌고 있다? – 성·사랑·결혼 제도의 역사적 변화
2. 여대생의 연애를 구성하는 일상적 문화
3. ‘프로젝트화’하는 연애, 지속되는 결혼의 조건
4. 변화, 진정한 가능성이 되기 위하여

자위하기 분리된 여성의 욕망과 몸, 제자리 찾기(원사)
1. 왜 자위인가?
2. 자위하기
3. 자위가 여성들에게 갖는 정치적 의미_성적 쾌락과 주체성은 자매다
4. 가부장제 비웃기_성역할 고정관념을 넘고 넘은 성적 실천으로서의 자위 경험
5. 클리토리스와 질의 경계 밖 욕망을 찾아서
6. 상상할 수 없는 것 상상하기
7. 나가며

섹스와 임신 너무나 밀접한, 그러나 너무나 다른 이야기(원영)
1. 성과 이성애 연애관계의 역동적 변화
2. 당당함을 드러내는 키워드, 성
3. ‘주체적 인간’에서 ‘피해자 여성’으로의 전환점, 임신
4. 왜 섹스는 문제가 되지 않고 임신이 문제가 되는가?
5. 다르지 않은 듯, 다른 듯 보이는 움직임들

미혼모의 섹슈얼리티 욕구와 책임의 성별화 벗어나기(서정애)
1. 들어가며
2. 미혼모가 되는 것
3. ‘혼전’ 임신의 낙인과 책임 ‘미혼부’는 없는가
4. 젠더 관계에서의 제한적이고 모순적인 섹슈얼리티
5. ‘미혼모’ 낙인을 넘어서

성폭력 ‘경험들’에 대한 단상 성폭력 행위와 피해 의미의 틈새(변혜정)
1. 들어가며
2. 성폭력 행위를 기억한다는 것
3. ‘피해’ 구성
4. 남은 문제들

2부 섹슈얼리티 이론과 정치학

성매매, 누구와 누구 혹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문제인가?(민가영)
1.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은 동의어인가?
2. ‘성매매 근절이나 ‘성노동’이 왜 성매매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는가?
3. 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한 가지 방법
4. 성매매 경험이 체화된 여성의 몸에 대한 탐구로
5. 성매매/여성과 차이의 정치학
6. 나오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넘어서 공간, 몸, 성폭력(정희진)
1. 젠더와 공간
2. 시간과 공간, 몸과 마음, 여성과 남성
3. ‘그릇 대 내용물’의 공간 개념과 여성의 몸
4. ‘공간으로서 여성의 몸’과 성폭력
5. 몸, 객관성,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
6. 성적자기결정권의 공간 논리를 넘어서

벽장 비우기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와 이성애주의(한채윤)
1. 들어가며
2. 성정체성 형성 과정의 차이
3. 커밍아웃과 벽장 속의 이성애자들
4. 섹슈얼리티, 죽거나 성애화되거나
5. 이성애주의, 우아한 호모포비아의 진실
6. 마무리하며

포르노그래피, 억압과 해방의 이분법을 넘어서(이나영)
1. 들어가며
2. 포르노란 무엇인가?
3. 포르노에 관한 논의
4. 포르노에 개입하기, 사회 비판적으로 보기
5. 나가며

한국 영화의 섹슈얼리티 재현(주유신)
1. 한국 영화의 문화 정치학
2. 젠더 정치학으로 바라본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
3. 섹슈얼리티 정치학으로 바라본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
4. 여성 섹슈얼리티를 재현한 네 가지 사례

신여성과 성애화 그들은 왜 ‘애인’ 혹은 ‘탕녀’로 불렸는가? – 이명선
1. ‘신여성’ 다시 보기
2. ‘사회적 주체’로서 신여성의 등장
3. ‘신여성’ 담론과 성애화
4. 근대 여성주의의 출현과 ‘반격’ 그리고 섹슈얼리티
5. 맺음말

참고 문헌
글쓴이 소개

출처는 여기
_M#]

아직 한 권이 남아있다. 아니,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이 책이 그 세 권 중의 한 권 일거란 예상을 못했을 뿐. 다른 한 권은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라고 짐작. 이 책에서 “‘여성’과 ‘인간’을 넘어서-인권의 성별 정치학”이란 제목의 글을 쓰셨다. 화요일에 [메종 드 히미코]를 보고 교보에 들어 충동구매 하듯 샀다. 인터넷으로 접했을 땐, 책값이 좀 비싸 망설였지만, 서점에서 접하는 순간, 망설임은 사라졌다. 후훗.

[#M_ +.. | -.. |
바보 같은 실수를 했다. 아아, 예상치 못한 이 바보 같음이라니. 며칠 뒤에 잊지 않으면 적어야지.ㅠ_ㅠ_M#]

사는 앨범과 그렇지 않은 앨범의 미묘한 차이

MP3가 등장한 이후, 음악/앨범을 평가하는 방법이 조금은 달라졌다.

MP3를 누군가 그냥 줘도 안 받고 안 듣는 음악 받는 시간이 아깝고 한순간이나마 나스타샤의 용량을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싫으니까
일단 받아서 한 번 듣곤 그냥 지우는 음악
받아서 몇 번 듣고 CD로 백업하곤 잊을 음악
여러 번을 반복해서 들으며 즐기는 음악
이런 청취를 통해 결국 앨범을 사는 음악
MP3 확인 없이 무조건 사는 음악 가끔 MP3를 받기도 하지만 앨범을 사는 시간까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것(이때의 시간 공백은 국내에 들어오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일 뿐 행여 실망한다고 해서 앨범을 안 사는 건 아니다
앨범은 앨범대로 사고 음원은 음원대로 모으는 음악 유일하게 Muse가 이랬는데 예전에 외국 서버로 음악을 받을 땐,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음원은 모두 모았다. 꼭 루인 때문은 아니겠지만 루인이 즐겨가는 레코드가게에서 루인 때문에 뮤즈의 [Hullabaloo] DVD를 수입했었고 경매를 통해 [Absolution] DVD반도 구했다. 뭐, 좋아하면 이런다.

대충 이런 식으로 루인의 관심 음악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Cat Power에 열광하고 있지만(그래서 DVD까지 샀지만) MP3로 받아 들었던 몇 해 전만해도 들으면 좋긴 하지만 구매력까지 생기는 건 아닌 음악이었다. 한때 캣 파워가 음반매장의 진열대에 깔렸던 적이 있었는데 가게에 갈 때마다 사야지 하면서도 시큰둥하게 지나치곤 했다. Atmosphere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앨범 구매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엔 CD 구매를 중심으로 생활 패턴을 정했을 정도이니 살 만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앳모스피어 앨범을 산 건 얼마 전.

며칠 전(며칠 이라고 하니 여러 날 전), 카카키오(최근 kakakio/카카키오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분이 있으니 블로그 주소 링크해요^^;;)가 롤러코스터 새 앨범을 들어봤냐고 물어봐서, 우연찮게 받았는데 아직 안 들었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카카키오는 (블로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롤러코스터를 상당히 좋아하기에, 이런 불법스런 답이 유쾌할 리 없다. 롤러코스터를 알게 된 건, 아주 오래전, 지누의 첫 앨범이 나왔던 시절로 거슬러간다. 이승환을 좋아하면 토이를 좋아하고 토이를 좋아하면 김동률을 좋아하고… 뭐 이런 식의 카르텔이 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도로 지누 앨범을 재밌게 들었기에 지누가 롤러코스터로 앨범을 냈다는 소식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앨범을 샀고 정말 좋아, 로 기억하는 앨범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 롤러코스터의 두 번째 앨범엔 루인이 한때 너무 좋아했던 곡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사지도 않았고 MP3를 받지도 않았었다. 세 번째 앨범부터는 어느 정도 인기도 얻었지만 그뿐. 매력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앨범을 구매할 유인이 생기질 않는다. 좋아하는, 사고 싶을 만큼 몸을 자극하는 음악의 선호가 바뀐 걸까? 하지만 당시 좋아하던 음악 중엔 지금 들어도 좋아서 온 몸이 떨리는 음악이 있는데, 무엇이 바뀐 걸까.

Oasis도 그렇다. 몇 해 전 가을, 오아시스를 미친 듯이 들은 적이 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교통사고가 날 뻔도 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막 화를 내는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루인은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을 뿐이었다(죄송해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 끝. 오히려 덜 좋아했던 Blur 앨범은 몇 장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오아시스 공연을 계기로 참 오랜만에 예전에 듣던 음원을 다시 꺼내 들었고 또 며칠 열광하고 이참에 앨범을 살까, 했지만 역시나 며칠로 끝.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Nina Nastasia는 앨범을 사기 전까진 이름도 몰랐지만 운명 같은 느낌으로 샀었다. 그날은 가을의 어느 토요일 낮이었다. 즐겨가는 음반가게에서 앨범을 구경하다 Nina Nastasia의 Touch & Go에서 나온 첫 번째 앨범인 [The Blackened Air]와 만났고, 루인은 앓는 소리를 냈다. 생활비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지만 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며 루인을 위로하고 루인이란 닉을 만드는 계기가 되고, 등등.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 그러고 보면 뮤즈는 MP3로 처음 접했고 그때 구운 CD가 지금도 있다. 앨범을 산다는 건, 그만큼의 더 큰 애정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결국은 앨범을 사서 듣는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의 미묘한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뮤즈가 올 여름 섬머 소닉 페스티발에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뮤즈 홈피에서 읽고 섬머 소닉 페스티발 홈피에서 다시 확인했다. 올 여름, 알바비를 모아서 동남아 지역으로 갈까 했는데, 일본에나 갈까?

메종 드 히미코: “변태”로 기억하거나 변태하거나

2006.03.07. 화. 오후 5시 40분. 5,000원 씨네코아 4관 [메종 드 히미코]

01. 오랫동안 망설이다 어제 오후, 수업이 끝나자 곧바로 지하철을 탔다. 영화가 몇 시에 끝나도 상관없었는데 그 전날 어제 날짜로 올릴 새 글을 미리 써뒀기 때문이다-_-;;(미리 쓰고 날짜를 수정해서 어제 공개했다, 쿨럭;;) 저녁에 일이 생기는 걸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玄牝에 돌아와 나스타샤를 켜고 새로운 글을 쓸 시간이 애매해지기 때문. 너무 늦게까지 나스타샤와 노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종종 걸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걸어 씨네코아까지 갔다. 저녁 외출을 별로 안 좋아하는 루인이기에 [메종 드 히미코]와 즐기겠다는 다짐을 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조제, …]를 그다지 좋게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관의 좌석에 앉았다.

02. 영화관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은 “변태”들이 나오는 웃기는/재밌는 영화로 기억할 테지만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통해 변태할 것이라고. 영화관에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며 이런 확신을 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끝내주는 영화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셨지만 보실 의향이 있다면, 이 글을 피해주세요. 스포일러투성이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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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흑백화면으로 몇 장의 클로즈업한 사진을 접하며, 짜릿한 흥분에 빠졌다. 이건 게이 영화가 아니라 트랜스 영화잖아! 영화를 보며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일본에서의 게이는 ‘남성’동성애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반queer/비’이성애’자/트랜스 등 이른바 ‘이성애’-젠더에서 벗어난 사람 모두를 지칭한다는 것. 호모나 게이, 트랜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 그래서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로 홍보할 수도 있지만 루인은 트랜스 영화며 끝내주는 이성애 영화라고 느꼈다.

이 영화를 “동성애” 영화로 부르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느낀다. 히미코와 하루히코(오다기리 죠 분)의 사랑은 “동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이성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루히코는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어떻게 명명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야기 전개로는 ‘남성’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히미코는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사랑은 동성애일까, 이성애일까. 세상엔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남성’과 ‘여성’ 뿐이라고 강제하는 ‘이성애’-젠더 사회에서 히미코는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없으며 하루히코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명명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들의 모든 사랑은 이성애다. (이때의 이성애는 작은 따음표’ ‘가 없는 이성애며 루인은 모든 사랑은 결국 이성애라고 몸앓는다.)

이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은 “남자” 주인공, 사오리(시바사키 코우 분)의 존재로 인해서다(이 문장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스포일러!). “여자와 자 본 적이 있느냐”며 그 느낌을 묻는 사오리의 혼란스러움, 사오리가 “남자”임을 깨닫고 당황하는 하루히코의 모습, 처음엔 자신의 자식임에도 못 알아 보다 나중에야 깨닫는 히미코의 모습(“아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딸”이 나타났으니까) 등은 성정체성/젠더 정체성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가장 아닌 척하고 이반혐오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사오리지만, 이건 바로 자신이 이반/트랜스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때때로 등장인물들을 대상화하는 이유 역시, 카메라의 시선과 사오리의 시선이 거의 일치해서이다. “메종 드 히미코”에 사는 사람들과 괴리를 느끼고 낯설어 할 땐 “메종 드 히미코”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화하지만, 어울려 있을 땐 대상화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거의 없음을 느꼈다. 이런 사오리의 시선으로 전개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또한 관객의 시선과 만나면서 또 다른 균열 지점을 만든다. 대상화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변태”로 비웃거나(영화와 노는 내내 이런 비웃음과 끔찍해 하고 징그러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카메라의 대상화하는 시선을 깨닫고 불편해하거나, 사오리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일치하면서 생기는 ‘유머’에 웃거나. 루인은 세 번째, 킥킥, 웃었다. 사오리의 대상화하는 시선은, 알고 있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자신도 또한 “메종 드 히미코”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음을 직면해야 하는데서 생기는 두려움/공포 때문이다. 이럴 때 대상화하는 시선은 상대에 대한 대상화가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직면하기 싫어하는 자신에 대한 대상화-자기 조롱의 시선이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별다른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킥킥 웃으며 아픈 것과 불편한 것은 다르다). 감독, 너무 멋져♡

03. 물풍선을 던진 꼬마가 하루히코에게 혼나는 장면, 하루히코와 (사오리가 근무하는)페인트 회사 사장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아아, 너무 뻔하게도 꼬마와 사장 둘 다 “게이”임을 알았다. 꼬마의 표정은 이미 반한 표정이고, 페인트 회사 사장 역시 하루히코에게 반한 상태였기에 하루히코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잔뜩 긴장했고 큰 소리로 하하하, 웃었던 것이다.

하루히코가 사오리에게, 사오리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페인트 회사 사장이 부럽다고 말 한 이유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느꼈다. 섹스를 했다 아니다, 가 아니라 자신은 사오리가 “남성”임을 알고 놀란데 반해 페인트 회사 사장은 그렇지 않았다. 사장은 ‘이성애’자로 불림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았는데 반해, 하루히코는 이반으로 정체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자기혐오/이반혐오를 직면했기 때문이다. 사오리가 그 말을 듣고 운 것도 같은 이유이지 싶다. 사오리 자신도 이반/트랜스지만 언제나 “메종 드 히미코” 사람들을 “변태” 취급하고 대상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봤으니까. 그래서 이 장면이 너무도 아팠다. 이 곳, [Run To 루인]에도 몇 번인가 썼듯, 가장 힘든 건, 자신이 이반/트랜스라는 자기 정체성을 깨달으며 가지는 자기혐오다. 그래서 자신에게 하는 커밍아웃이 가장 힘들며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하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가 힘들다. 이런 자기혐오/이반혐오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장이 부러울 수밖에 없고 “부럽다”는 말은 하루히코에게도 사오리에게도 너무 아픈 깨달음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도 이 지점이다.

04. 이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 하나하나가 너무도 좋았고 절실했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루인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며 반드시 DVD를 사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리라고 다짐했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