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러 로그/글 추천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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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퍼러 로그를 따라가다 보면, 재미있는 검색어를 많이 발견한다. (하지만 차마 쓸 수는 없다.) 그 중엔 발견하고 즐거운 검색어도 있는데, 이반, 게이, 레즈비언, 이반검열, 이반SM, 타자의 집단화 등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검색어는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리티, 크로스드레서와 같은 검색어다. 어떤 의미로 검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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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종이매체 발간을 위해 글 추천에 들어갔다. 아직 모두가 다 한 건 아니지만, 그런 추천 속에 루인의 글이 몇 편 있다. 재밌는 건, 지난 번에도 느낀 거지만, 루인이 쓴 글 중, 루인이 좋아하는 글과 다른 사람들이 읽을만 하다고 추천한 글에서 차이가 생긴다는 것. 루인은 그럭저럭이라고 여긴 글이 다수의 추천을 받는가 하면 애착이 많이 가는 글은 종종 루인만 추천하는 식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매체를 인쇄할 땐, 결국 다수의 추천에 따르겠지만 글에 대한 접근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렇게 다른 추천이 나오는지는 항상 궁금하다. (이 접점에서 대화와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이후: 협상하는 글쓰기/말하기

당연한 얘기지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모든 발화가 자유로운 건 아니다. 한 비밀 리플에 답글을 달면서 이 말도 같이 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플을 달아 주신 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느낀다.)

모든 글쓰기/말하기는 협상하는 글쓰기/말하기이기에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이곳에 이반queer/트랜스 정체성과 관련 생활들에 관한 아무 얘기나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공개했을 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며 어떻게 얘기해야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 전에 이곳에 쓸 것인가 말 것인가로 더 갈등하지만. 물론 이런 협상을 무시하고 쓰는 글도 종종 있지만, 혼자 즐기고 말 것이 아니기에 겪는 과정이다.

이 협상력이 자원이라고 몸앓는다. “약자”, “소수자”로서의 지표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음의 지표이다. 이 과정이 언어를 획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즐거운 그리고 신나는: 루인에게 쓰는 편지

두어 달 전에 이곳에 쓴 글을 이랑블로그에도 올린다고 수정했다. 대략 두 달도 더 걸렸는데, 게을러서다.

어째서 커밍아웃의 즐거움보다 두려움을 먼저 배운 걸까, 하는 몸앓이를 하곤 한다. 루인만 이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간 접한 책이나 글 중엔, 커밍아웃의 즐거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커밍아웃을 한 이후 겪은 아웃팅이나,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 혹은 혐오증으로 인해 커밍아웃을 못하고 숨기고 산다는 얘기들이 많다. 특정 누군가에게만 커밍아웃을 했는데, 하지도 않은 혹은 하기 싫었던 사람들도 알고는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는 사례. 회사나 단체에서 일하는데 커밍아웃 혹은 아웃팅으로 쫓겨났다는 사례. 가끔씩은 아웃팅을 협박하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신문에 나기도 한다(이런 기사의 리플은 숨을 멈추고 읽는다). 커밍아웃을 고민하기 전부터 루인이 접한 정보는 이처럼 커밍아웃 이후의 부정적인 사례들이 대다수였다. 언론을 통해 접하는 ‘동성애’관련 기사의 절대 다수도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피해사례나 공포와 관련한 것이다.

이런 루인은 무엇이 가장 두려웠을까. 루인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커밍아웃보다는 루인에게 하는 커밍아웃이었다. 루인은 루인에게 하는 커밍아웃이 가장 힘들었다. 왜? 예전에 한채윤씨가 “동성애는 서구에서 수입된 거라고 하지만 정말 수입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혐오증이다”라고 말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던 흔적이 몸에 있다. 적어도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좋아하는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 어느 쪽도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냥 좋아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연애가 허용되던 시절 이후(루인은 집이든 학교든 10대의 연애는 불량한 행동으로 간주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이성연애의 구조 속에 들어가면서 상대방의 젠더가 핵심이 되었다. “이성 친구 있니?”, “이성 친구 안 사귀니?” 등등의 이성연애를 정상규범으로 제도화하는 언설은 그렇지 않은 연애나 성정체성을 강제로 삭제하게끔 했다. 그리하여 이런 과거를 해석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하고 잊혀진 과거를 발굴해야 했다. 10대들에게 이반이 “유행”이라는 식의 기사를 접하곤 하는데, “유행”이기 전에도 이런 감성은 풍부했다. 수입되었다면 수입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며 변태니 문란하니 하는 “동성애 혐오증”이다.

루인이 접한 글에서 아웃팅의 두려움이나 커밍아웃 이후의 부정적인 사례들이 많은 것은 이것과 관련 있을까. 혹은 (주류 언론의 경우) 이런 부정적인 사례를 유포함으로써 커밍아웃을 더욱더 힘들게 하거나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커밍아웃 이후 무조건 부정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닌데.

이건 루인이 주로 지내는 공간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니 루인의 이성애혈연가족들과 그 친족들은 [Run To 루인]을 모른다. 알리고 싶지도 않고(동거란 주제만으로 얼굴 표정을 바꾸며 경악하는 반응을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Run To 루인]을 알면서 루인을 아는 사람에게라면 커밍아웃한 것이 오히려 ‘자유’롭고 훨씬 편하다.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고, 남의 이야기처럼 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사례인양 말하는 것만큼 불편하고 괴로운 일도 없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느낌이랄까. 루인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과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얘기하며 남의 이야기인양 말하고 나면, 루인에 대한 불쾌함으로 며칠이고 앓는다. 말 할 수 없기에 숨겨야하지만 숨기기 때문에 그런 자신이 싫어지는 감정으로 분하고 화나고 억울하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상태에 시달린다.

[Run To 루인]을 통해 커밍아웃을 한 후 가장 좋았던 건, 이런 “불편함”이 줄었다는 점이다. 모든 말하기는 협상하는 말하기이기에, 닿은 사람 모두에게 커밍아웃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소통하거나 공유하고자 한다면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 현재의 감정이다. 이반queer이나 비’이성애’, 트랜스와 관련해서 글을 쓸 때, 커밍아웃을 한 상태에서 쓰는 것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것은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자기 삶을 남의 이야기처럼 쓴다는 것의 괴리, 글을 통해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끊임없는 자기 검열 등에서 어느 정도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은 커밍아웃만의 즐거움일 것이다. 아웃팅이 두렵다면 커밍아웃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커밍아웃을 해서 힘들었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즐겁다는 얘기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커밍아웃을 하겠다, 안 하겠다가 아니라 커밍아웃 자체가 공포가 되지 않길 바라니까. 그래서 커밍아웃이 (얼마간의) 두려움 속에서도 좀더 즐겁고 행복한 일로 여겨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