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인간을 사랑했어요..

찬 바람이 열어 둔 창틈 사이로 들어왔다. 날씨가 쌀쌀했다. 흐리기도 했고 햇살이 창 너머로 들어오기도 했다. 평이한 날이었다. 일요일의 흔한 날이었다.

방 안은 밝았고 먼지가 쌓여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음악 소리에 따라 먼지가 흔들리며 떠다녔다.

진작 사지 않았음을 질책하며 당장이라도 전 앨범을 사서 듣고 싶어졌다.

Cat Power – Werewolf

특히 이 곡이 그랬다. 몇 번이고 듣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노래가 좋다. 듣고 있으면 달콤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 설탕을 입힌 독약 같으니까.

종일 캣 파워를 듣고 있다.

[#M_ +.. | -.. | Fool도 좋지만, 이 앨범은 구할 수가 있으니까 한 곡만._M#]

트랜스가 그렇게 이상해요?

“당신은 이반이나 트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혐오하는 사람도 많지만 인정한다거나 그들도 사람이다, 그게 어때서, 라는 식의 답을 듣기도 한다.
[#M_ +.. | -.. |

인정한다니 누가 누굴 인정해? 당신이 인정하든 말든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뭘 인정해? “그들도 사람이다”라는 식의 인본주의/보편적 인권 논의는 한 사회가 누굴 사람으로 간주하는지, 사람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다. 즉, 트랜스의 논의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_M#]

하지만 이반queer이나 트랜스가 당신에게 고백을 한다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작년 여름,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야 동성애자든 트랜스든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거나 가족이라면 좀 그럴 것 같다는 얘길 직접 들었다. 물론 이런 얘긴 인터넷의 리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4인의 이성애정상가족을 가정하고, 당신의 아빠나 엄마가 어느 날 “난 레즈비언(게이)야”라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나 트랜스야, 곧 성전환수술 하려고”, 라는 얘길 한다면 위의 ‘쿨’한 반응은 사라진다. 이런 상황은 두 해 전, 수업 시간에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다.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란 내용의 수업이었는데 발표자들도 토론에 참여한 일부 몇 명도, 당연히 권리를 인정해야하며 특별법이라도 제정해야 한다며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하고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려고 안달했지만 “가족이 커밍아웃하면?”이라는 질문 앞에선 침묵하거나 발뺌했다. 남의 얘기, 나완 상관없는 먼 이웃의 얘기, 인터넷에서나 접할 수 있는 얘기라면 뭐든 상관없지만 정작 자신의 얘기라는 가정 앞에선 여지없이 ‘진심’이 드러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연하지만, 이런 ‘진심’을 접하면 때로 화나고 상처(이 상처는 앎의 쾌락을 위한 대가란 점에서 힘이며 자원이다)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에도 “지지해, 그의 행복이 중요하니까”라고 말하고선 다른 순간에 혐오증을 드러내는 사람을 접하면 짜증과 분노는 몇 곱으로 변한다. 그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안달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권 때문이다.

며칠 전, 졸업식 참석 때문에 올라온 엄마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玄牝의 한쪽 벽에 쌓아 둔 책을 찌푸린 얼굴로 한참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왜 이렇게 이상한 책들만 보냐?” 무슨 말인가 싶어 반문했더니, 지목한 책이 [동성애의 심리학]이었다. 순간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해서 부모님들도 알게 되는 것인가 하는 몸앓이가 스쳐갔다. 하지만 “이상한 책을 읽는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니까”라는 말로 맺었을 때의 루인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몸에 빠졌다. 아직 이성애혈연가족에게 커밍아웃할 의향은 전혀 없으니 이 순간을 이렇게 넘긴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평생 부모님에게 커밍아웃 같은 건 기대도 못하게 되었으니 슬퍼야 하는 건지, 이성애혈연가족에게서 들은 혐오증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같은 발언도 혈연가족에게 듣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은 의미와 무게가 다르다), 부모님이 온다는 얘기에 몇 가지를 숨겼는데 그것이 들키면 어떻게 될 런지 하는 공포까지. 그 외에도 아직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복잡한 감정들로 아찔했다. (설날 부산에 갔을 때, 엄마는 하리수만 나오면 짜증난다고 몇 번이고 혐오 발언을 했었다. 어떤 지점에선 참 얘기가 잘 통하는 엄마지만 이런 지점에선 아득한 높이의 벽을 느낀다.)

트랜스가, 이반이, 커밍아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다시 고민하고 있다. 트랜스가, 이반이 그렇게 끔찍해?

작년 가을, 한 강좌에서 한채윤씨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만약 지금 레즈비언인데 나이 60살 되어서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면 이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양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노망난 레즈비언인가요?”라는 말을 해서 모두들 웃었다. “노망난 레즈비언”이라니. 크큭. 하지만 농담처럼 한 이 말이 그날 강의의 핵심 중 하나라고 루인은 몸앓는다. 트랜스와는 달리 이반의 성적 지향/성정체성은 관계를 통해 의미가 생긴다. 즉, ‘나’의 성정체성을 명명하는데 있어 상대의 젠더가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 때문에 트랜스가 이반―좁게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배척되기도 한다.

‘레즈비언'(‘게이’)인데 상대가 어느 날, “나 성전환 수술 할거야”라고 말 한다면 성정체성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제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 ‘레즈비언'(‘게이’)이었던 정체성는 상대의 한 마디에 ‘이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적으면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 어떨까. 글을 시작하며 적은 상황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엄마가 어느 날 “나 트랜스야, 남자라고”, 라고 말한다면 아빠라고 불러야 할까? 여전히 엄마라고 불러야 할까? “엄마”란 명명과 “아빠”라는 명명은 (다른 여러 친족호명과 함께) 철저하게 젠더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존의 젠더를 붙잡고 있으려는 이상 해결 불가능한 문제다. (비록 사용하고 있지만, 가장 쓰기 싫어하는 호명이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누나”, “형”과 같은 젠더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명명들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하는 건 상대방의 몸/욕망이 아니라 젠더로 재현하고 있는 이미지, 혹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거울 역할은 아닌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아들(홍길동)이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한다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될 텐데 이것은 홍길동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혈연가족의 젠더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귀고 있는 상대방이 어느 날 커밍아웃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대방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보여주는 어떤 이미지를―일테면 긴 생머리나 “몸짱” 같은 몸매, 잘생긴 얼굴 같은― 사랑하는 것이며, 이런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젠더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전환 수술을 한다는 말에, 트랜스란 고백에 그렇게 끔찍하게 반응하거나 나중에 알게 되곤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출 거울 역할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지는 불안함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랜 만에 산 앨범-‘처음’

아침에 눈을 뜨며, 교보에 들릴까 말까로 고민했다. 며칠 전부터 결정한 사항이라 안 가기도 애매하지만 오후에 있는 모임 전에 읽을거리가 있어서 망설였다. 결국 갔다 왔다. 계획한 책 외에 두 권의 시집을 샀다. 허수경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과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허수경은 오래 전부터 좋아했기에 이번 시집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대충 몇 편을 읽으며 예전과는 달라진 느낌이었지만 예전과 같은 느낌이었다면 오히려 실망했겠지. 황병승은 작년, 수업을 통해 접했다. 시집 제목부터 해서 “커밍아웃”이란 시까지 흥미롭고 재밌는 시가 가득하다. (시의 제목 중에 부제로 “여왕의 오럴 섹스 취미”란 시가 있는데, 아직 읽진 않았지만, 이때의 “여왕”은 queen인가? 그러니까 드랙 퀸drag queen의 퀸. 후후후.)

앨범을 사러 갈까는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여유 돈으로 이런 바람이 있을 때 사지 않으면 결국은 사지 않을 것만 같아 사러 갔다. 사고 싶은 앨범 목록엔 10장 정도가 적혀 있지만 네 장만 골랐다.

The Music의 [Welcome To The North]은 지난 앨범에서부터 매력적으로 들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And You Will Know Us By The Trail Of Dead의 [Worlds Apart]와 갈등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더 뮤직부터. 이유는 간단한데 And You Will Know Us By The Trail Of Dead는 앨범이 좋긴 하지만 손이 자주 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주문으로 살 만큼 좋아했지만, 자주 듣지 않는 앨범을 이 기회에 산다는 건, 망설이기 마련. 언젠가(도대체 언제? 한 달 뒤? 여섯 달 뒤? ;;;) 사러 간다면 그때 사겠지. 암튼 더 뮤직의 앨범을 지금 듣고 있는데 대체로 만족스럽다. 지난 앨범에서처럼 춤이라도 출 것 같은 신나는 우울.

Atmosphere의 [God Loves Ugly]는 이미 mp3로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던 만큼, 앨범을 소장한다는 기분으로 선택했다. 비트 신나고 랩 잘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확인하니 이제 품절인데 루인이 마지막 앨범을 산건가? 흐흐)

오랫동안 정말 사고 싶었던 앨범은 Cat Power다. 역시나 예전에 mp3로 들으며 혹했지만 이상하게도 앨범은 사지 않았었다. 루인에겐 Nina Nastasia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헤헤. 왕창 다 사고 싶은 욕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고르고 골라 [Moon Pix][You Are Free], 두 장.

오랜만에 산 만큼 많이 들을 것 같다.

종종 예전과 최근의 행동들을 비교하곤 하는데, 많이 사서들을 때 보단 적게 사서 여러 번 듣는 것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앨범을 사서 듣기 시작했을 땐, 몇 장 안 되는 앨범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었기에 어떤 곡의 아무 부분이나 1초 정도만 들어도 어느 앨범에 몇 번째로 수록된 무슨 노래인지를 다 알았다. 하지만 앨범을 모으기 시작하면서부터 “나, 그거 알아”라고 말 할 수는 있지만 앨범을 꼼꼼하게 듣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 오랫동안 앨범을 사러 가지 않게 된 것도 음악을 듣고 즐긴다는 기분보다는 앨범을 사 모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음악이 좋아서, 음악만이 삶의 유일한 위로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서 앨범을 사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그것이 일이 되었나 보다. 레코드 가게에 가면 몇 장씩이고 사야만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나 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처음은 두근거리는 몸으로 레코드 가게에 가서 처음으로 앨범을 샀던 그때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많이 변해있는 ‘처음’이다. 시행착오라고 불리는 경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는 처음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