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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반queer이나 트랜스가 당신에게 고백을 한다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작년 여름,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야 동성애자든 트랜스든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거나 가족이라면 좀 그럴 것 같다는 얘길 직접 들었다. 물론 이런 얘긴 인터넷의 리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4인의 이성애정상가족을 가정하고, 당신의 아빠나 엄마가 어느 날 “난 레즈비언(게이)야”라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나 트랜스야, 곧 성전환수술 하려고”, 라는 얘길 한다면 위의 ‘쿨’한 반응은 사라진다. 이런 상황은 두 해 전, 수업 시간에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다.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란 내용의 수업이었는데 발표자들도 토론에 참여한 일부 몇 명도, 당연히 권리를 인정해야하며 특별법이라도 제정해야 한다며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하고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려고 안달했지만 “가족이 커밍아웃하면?”이라는 질문 앞에선 침묵하거나 발뺌했다. 남의 얘기, 나완 상관없는 먼 이웃의 얘기, 인터넷에서나 접할 수 있는 얘기라면 뭐든 상관없지만 정작 자신의 얘기라는 가정 앞에선 여지없이 ‘진심’이 드러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연하지만, 이런 ‘진심’을 접하면 때로 화나고 상처(이 상처는 앎의 쾌락을 위한 대가란 점에서 힘이며 자원이다)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에도 “지지해, 그의 행복이 중요하니까”라고 말하고선 다른 순간에 혐오증을 드러내는 사람을 접하면 짜증과 분노는 몇 곱으로 변한다. 그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안달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권 때문이다.
며칠 전, 졸업식 참석 때문에 올라온 엄마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玄牝의 한쪽 벽에 쌓아 둔 책을 찌푸린 얼굴로 한참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왜 이렇게 이상한 책들만 보냐?” 무슨 말인가 싶어 반문했더니, 지목한 책이 [동성애의 심리학]이었다. 순간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해서 부모님들도 알게 되는 것인가 하는 몸앓이가 스쳐갔다. 하지만 “이상한 책을 읽는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니까”라는 말로 맺었을 때의 루인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몸에 빠졌다. 아직 이성애혈연가족에게 커밍아웃할 의향은 전혀 없으니 이 순간을 이렇게 넘긴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평생 부모님에게 커밍아웃 같은 건 기대도 못하게 되었으니 슬퍼야 하는 건지, 이성애혈연가족에게서 들은 혐오증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같은 발언도 혈연가족에게 듣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은 의미와 무게가 다르다), 부모님이 온다는 얘기에 몇 가지를 숨겼는데 그것이 들키면 어떻게 될 런지 하는 공포까지. 그 외에도 아직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복잡한 감정들로 아찔했다. (설날 부산에 갔을 때, 엄마는 하리수만 나오면 짜증난다고 몇 번이고 혐오 발언을 했었다. 어떤 지점에선 참 얘기가 잘 통하는 엄마지만 이런 지점에선 아득한 높이의 벽을 느낀다.)
트랜스가, 이반이, 커밍아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다시 고민하고 있다. 트랜스가, 이반이 그렇게 끔찍해?
작년 가을, 한 강좌에서 한채윤씨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만약 지금 레즈비언인데 나이 60살 되어서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면 이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양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노망난 레즈비언인가요?”라는 말을 해서 모두들 웃었다. “노망난 레즈비언”이라니. 크큭. 하지만 농담처럼 한 이 말이 그날 강의의 핵심 중 하나라고 루인은 몸앓는다. 트랜스와는 달리 이반의 성적 지향/성정체성은 관계를 통해 의미가 생긴다. 즉, ‘나’의 성정체성을 명명하는데 있어 상대의 젠더가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 때문에 트랜스가 이반―좁게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배척되기도 한다.
‘레즈비언'(‘게이’)인데 상대가 어느 날, “나 성전환 수술 할거야”라고 말 한다면 성정체성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제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 ‘레즈비언'(‘게이’)이었던 정체성는 상대의 한 마디에 ‘이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적으면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 어떨까. 글을 시작하며 적은 상황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엄마가 어느 날 “나 트랜스야, 남자라고”, 라고 말한다면 아빠라고 불러야 할까? 여전히 엄마라고 불러야 할까? “엄마”란 명명과 “아빠”라는 명명은 (다른 여러 친족호명과 함께) 철저하게 젠더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존의 젠더를 붙잡고 있으려는 이상 해결 불가능한 문제다. (비록 사용하고 있지만, 가장 쓰기 싫어하는 호명이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누나”, “형”과 같은 젠더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명명들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하는 건 상대방의 몸/욕망이 아니라 젠더로 재현하고 있는 이미지, 혹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거울 역할은 아닌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아들(홍길동)이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한다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될 텐데 이것은 홍길동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혈연가족의 젠더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귀고 있는 상대방이 어느 날 커밍아웃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대방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보여주는 어떤 이미지를―일테면 긴 생머리나 “몸짱” 같은 몸매, 잘생긴 얼굴 같은― 사랑하는 것이며, 이런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젠더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전환 수술을 한다는 말에, 트랜스란 고백에 그렇게 끔찍하게 반응하거나 나중에 알게 되곤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출 거울 역할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지는 불안함은 아닌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