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야, 예측할 수 찾아온 안녕.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어요. 며칠 전 맡긴 제본한 책이 루인의 몸에 딱 들게 되었거든요. 한 권은 사진이 중심인데, 사진 복사는 별도로 해야 한다는 아저씨의 말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잘 나왔더라고요. 글자들과 함께 있는 사진들은 대체로 흐리거나 희미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한 권만은 사진이 잘 나와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죠. 제본 맡기는 곳은 항상 가는 단골이죠. 자주 가는 곳이라 더 신경 써 준건지, 루인의 몸에 들게 해주니 자주 가는 것인지, 이젠 헷갈리지만 루인은 단골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금방 지루해 하기에 항상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편이죠. 하지만 가게만큼은 단골을 선호해요. 주인과 루인이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는 순간, 편해지거든요. 루인의 요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요. 아침엔 기분이 좋았어요. 또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냥 무덤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랬어요.

갑자기 당신이 떠오른 건, 그런 순간이었어요. 라디에이터에선 뜨거운 열기가 나오고 밖에선 찬 바람이 불고, 북향인 사무실은 어두웠지요. 즐거운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떠올랐어요. 오랜만이에요.

당신을 떠올린 건 너무 오랜만이죠. 오랫동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았거든요. 항상 몸의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었죠. 잊은 줄 알았어요. 몸 한 곳이 비는 순간이 와도, 그때그때의 옅은 우울함으로 지냈으니까요.

잘 지내시나요? 아쉽게도 당신과 공유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루인을 기억하시는지 물을 수도 없네요. 그러니 당신이 사는 세상엔 루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 하지만 당신이 잘 지내는지 궁금해요.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이런 날엔 궁금해요. …이런 관습적인 궁금함이 정말인 건 아니에요. 그저 한 번 쯤은 이런 질문도 해야지, 해서 하는 것뿐이죠. 당신을 향한 궁금함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어디선가 당신의 삶을 살아가겠지 하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죠. 혹은 그런 바람인가요.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피할 걸 알기에 당신의 안부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요. 너무 이기적이지만 그저 당신이 떠올랐다는 것, 그 뿐이죠. 그로 인해 조금은 우울해졌고 보고 싶기도 했지만 볼 수 없음을 알기에 가지는 보고 싶음이지 정말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알겠지만.

오랜 만에 떠올라서 반가웠어요. 당신의 이름을 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다이어리에 당신, 이라고 마구마구 적었죠. 당신의 진짜 이름은 적지 않아요. 그건 이제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까요. 행여 누군가 루인의 다이어리를 읽게 된다하더라도 당신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죠.

당신과 놀며 장을 봤어요. 주문했던 세탁기가 열하루 만에 도착하더니 주문한 옷이 아직도 오지 않아 궁시렁 거리면서도 당신이 떠오르면, 슬퍼요. 잘 지내세요. 당신이 사는 곳은 이곳보다는 따뜻한 곳이지만 그곳은 또 그곳대로 추우니 감기 조심하시고요. 마지막 인사일지 내일 또 찾을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이 즐거운 안녕.

2006 퀴어 오디세이

카페 “빵 “에서 “2006 퀴어 오디세이”를 한다고 해요.

▶ 일 시 : 2006년 2월 22일(수) 7시 30분
▶ 장 소 : 카페 빵 (홍대)
▶ 주 최 : (사) 한국독립영화협회, 카페 빵
▶ 후 원 : 영상미디어센터 MEDIACT
▶ 입장료 : 5,000원 (음료제공, 청소년 3,000원)
▶ 문 의 : 한국독립영화협회 (02-334-3166)
카페 빵 (02-6081-1089)

자세한 정보는 여기로

[이반 검열]등 그간 보고 싶었던 영화/다큐멘터리가 하네요. 힛.

취급주의, 접근금지

지난 주 이후, 날선 상태로 지내고 있다. 하루에도 감정 상태가 몇 번씩 변하는 거야 특별할 것 없지만 현재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

그런 상태다. 루인을 향한 칼날이 루인의 몸을 뚫고 나가, 얇은 종이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상태. 그래서 누구든 접근만 해도 곧 바로 칼날이 종이를 찢고 튀어나오는 상태. 살유리 위를 걷고 있다.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는. 하지만 그래서 물에 빠지는 살얼음이 아니라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이 온 몸에 파고드는 살유리, 그 위를 걷고 있는 상태다. 루인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 상태라 다른 사람의 상황은 이미 다른 세상의 것이다. 작은 일 하나하나도 무겁게 다가오기에 차라리 누구도 만나지 않고 한동안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상태다.

몇 해 전, 인터넷쇼핑몰의 포장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작업대에 있는 도구 중에 “취급주의”라는 스티커가 있었다. 붉은 빗금에 유리잔이 깨진 그림이 있는. 그걸 서로의 앞치마에 붙이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태다. 취급주의.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서 날카로운 조각이 당신에게 박힐지도 몰라요. 그러니 접근금지.

이런 루인을 비난해도, 욕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런 분위기를 통해 더 얇아지기만 할 뿐인 걸. 이런 상태에선 그런 자학쯤이야 오히려 힘이 된다. 넌, 원래 그런 걸.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만신창이로 너덜해진 상태를 기울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