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급주의, 접근금지

지난 주 이후, 날선 상태로 지내고 있다. 하루에도 감정 상태가 몇 번씩 변하는 거야 특별할 것 없지만 현재는 많이 가라앉아 있다.

그런 상태다. 루인을 향한 칼날이 루인의 몸을 뚫고 나가, 얇은 종이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상태. 그래서 누구든 접근만 해도 곧 바로 칼날이 종이를 찢고 튀어나오는 상태. 살유리 위를 걷고 있다.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는. 하지만 그래서 물에 빠지는 살얼음이 아니라 산산 조각난 유리조각이 온 몸에 파고드는 살유리, 그 위를 걷고 있는 상태다. 루인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 상태라 다른 사람의 상황은 이미 다른 세상의 것이다. 작은 일 하나하나도 무겁게 다가오기에 차라리 누구도 만나지 않고 한동안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상태다.

몇 해 전, 인터넷쇼핑몰의 포장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작업대에 있는 도구 중에 “취급주의”라는 스티커가 있었다. 붉은 빗금에 유리잔이 깨진 그림이 있는. 그걸 서로의 앞치마에 붙이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태다. 취급주의. 건드리기만 해도 깨져서 날카로운 조각이 당신에게 박힐지도 몰라요. 그러니 접근금지.

이런 루인을 비난해도, 욕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런 분위기를 통해 더 얇아지기만 할 뿐인 걸. 이런 상태에선 그런 자학쯤이야 오히려 힘이 된다. 넌, 원래 그런 걸.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만신창이로 너덜해진 상태를 기울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씁쓸한 초콜렛, 앰 아이 블루?: 이반/퀴어 성장담

며칠 전, 낭기열라에서 나온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앰 아이 블루?]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엮은 단편집, [씁쓸한 초콜릿]은 일종의 성장담.

[앰 아이 블루?]는 종종 들리는 몇몇 블로그에서 호평을 읽었기에 살짝 기대를 한 것도 있지만 “동성애”관련 단편집이라는 점 때문에 기대를 좀 했었다. 이후 우연히 낭기열라 블로그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씁쓸한 초콜릿] 관련 얘기들을 읽으며 끌렸었다. 물론 책 내용과 관련한 글은 읽지 않았는데(루인이 텍스트와 노는데 방해 되니까), 초콜릿이라는 제목 때문에 읽고 싶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앰 아이 블루?]는 꽤나 매력적인, 지금 루인이 가지는 고민과 겹치는 내용들이 많아 재밌었는데, 예상치도 않은 문장 하나가 허를 찌르듯 다가왔다.

“시작은 늘 그래, 마이클.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알게 되더라고.”(210쪽)

루인도 그랬다. 루인보다 루인 주변의 몇 명이 먼저 알았다.

그땐 정체성을 그다지 고민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냥 별다른 고민 없이 무덤하게 살던 그때. 남들은 사귀냐고 물었고 당사자는 아니라고 말하던 그런 관계의 상대방이 루인에게 말했었다. “넌, 동성애자인거 같아”(이건 내용을 좀 많이 바꾼 표현. 그렇다고 상대방이 폭력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고 다르게 표현했지만 그대로 표현하기엔 미안해서) 라고. 루인은 “아닐 껄”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지금으로선 얼추 맞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이후 그 사람과는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다시는 안 만나고 있지만 친구 중 한 명도 같은 얘길 했었다. “루인은 나중에 동성이랑 결혼할 것 같아” 라고. 이런 얘길 조용한 카페에서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두려움 같은 건 없었는데, 그래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땐 커밍아웃이나 아웃팅에 대한 개념도 없었지만 아웃팅이 곧 폭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에의 무관심이 곧 동성에의 관심을 의미하진 않지만 뭐 대충 틀린 것도 아니다. 루인이 루인의 정체성/섹슈얼리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전인데, 어떤 사람에겐 이런 모습들이 느껴지나 보다. 재밌는 일이다.

[씁쓸한 초콜릿]은 [앰 아이 블루?]보다 먼저 읽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루인에겐 [씁쓸한 초콜릿]이 [앰 아이 블루?]보다 더 이반queer에 관한 소설로 다가왔다. 루인은 [씁쓸한 초콜릿]을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로 표명하고 있고 하나는 그런 얘기를 전혀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아무튼,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한 권도 읽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조만간에 교보에 가야겠다.

트랜스/트랜스젠더-하리수의 협상

이 글 역시 며칠 전 발제문으로 쓴 글의 일부. 아아, 글 한 편 써서 이렇게 여러 번 우려먹을 수 있다니 좋다-_-;;; 조금 수정한 부분도 있다.
전문은 여기로.

이와 관련해서 하리수의 의미를 얘기할 수 있다. 하리수가 등장한 초기엔 기존의 ‘여성성’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다는 점과 “여자보다 예쁜 여자”라는 반응에 불편해하며 하리수를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트랜스들에게서 그럼에도 하리수가 트랜스를 가시화시켰다고 말하자 이런 비판은 줄었지만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루인의 느낌은 “소수자/약자에 대한 관대함”이다. 재수없어.) 루인이 느끼고 있는 하리수는 조금 다르다.

사례1. 즐겨 듣는 라디오 DJ가 하리수와의 일화를 얘기했다. 어느 날 오전, 하리수와 만났는데 목소리가 걸걸하게 나오자 그 DJ는 하리수에게 “목소리 조율이 안 됐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목소리 톤을 조정한 후 다시 얘기를 나눴다고.

사례2. 설날 우연히 TV에서 하리수와 아이비가 나오는 장면을 접했다. 사회자는 하리수에게 아이비의 노래 일부분을 해보라고 했고 하리수는 했다. 사회자는 아이비에게 하리수가 따라한 부분을 해보라고 했고, 했다. 방청객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이비에 환호를 보냈다.

종종 트랜스들의 행동은 진짜가 아니라 “어설픈 모방”이라는 비판/비난을 듣는다. 하리수를 불편하게 여기는 반응도 이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비난이나 불편함은 사실 “진짜”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 하리수가 이성애 ‘여성성’을 “모방”하고 있다면 그건 기존의 젠더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루인에겐 협상력으로 다가온다. 기존의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 뿐인 젠더구조에서 트랜스로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트랜스바에서 일하는 거? 활동가가 되어서 운동을 하는 거? (하지만 홍석천은 활동가가 되면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커밍아웃은 하더라도 아무 말도 안 하는거? 비록 동화(同化, passing)하여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을 숨기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이것은 젠더 억압적인 문화에서 연예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략/협상이 아닐까.
(젠더 구조에서 트랜스에게 가장 바라는 건, “입닥치고 구석에 거슬리지 않게 찌그러져 있어”가 아닐까.)

루인은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접하며 하리수가 젠더의 균열지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트랜스‘여성’의 경우 성전환 수술을 위한 조건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런 때의 조건은 ‘여성’처럼 행동하기다. 그렇기에 과거의 트랜스 관련 책들에 실린 사례엔, ‘남성’에서 ‘여성’으로 수술을 하고 마취에서 깨어나자 바로 바리톤이던 목소리가 소프라노로 바뀌었다는 식의 묘사가 많다(이런 사례는 의료담론에 식민지화된 결과다). 이런 맥락에서 사례1은 ‘여성’다움, ‘여성’으로 자라고 행동한다는 것은 훈육과 수행의 과정/결과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트랜스라는 “구역질나는 변태”의 “괴짜 같은” 행동이 아니라 젠더의 구성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사례2는 좀더 불편했다. 방송에서 트랜스 혐오가 드러난 경우인데, 루인에겐 그 장면이 “네가 아무리 여자인척 해도 넌 가짜야”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트랜스로서의 삶에서 겪는 슬픔과 그럼에도 나타나는 자부심도 느꼈다. 방송에서 하는 하리수의 행동을 과장되거나 “연기”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신이나 다른 연예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인데, 이런 인식은 그 자체로 문제다. 젠더는 본질적인 것도 단순히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닌 계속해서 반복하는 행동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트랜스인 다른 연예인들이나, 트랜스를 “연기”라고 말하는 것 속에는 자신의 젠더 수행은 자연스러운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젠더가 자연스러운 것이었나.